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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에대해서 주성준화백

작성자산토끼|작성시간15.06.02|조회수721 목록 댓글 0

“한민족 민화(民畫) 무시에 외롭게 싸웁니다”

북호 주성준 화백…한국미술계에 반기 들며 민화 새 패러다임 ‘창작민화’ 제시

김진희기자(jhkim@skyedaily.com

북호 주성준 화백(49)이 처음 그림을 접한 때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강원도 평창군 계촌에서 살다 전학을 가게 됐는데 모양새가 까맣고 작아 꼭 시골 촌놈 같아서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혼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린 시절 우연히 한 화가를 만나면서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화가들을 알게 된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는 미술학원에서 배우지 못하는 전문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화가들을 통해 직접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동양화를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화를 그렸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노장사상’ 등 동양철학을 접하면서 동양화로 방향을 선회했다. 동양화를 공부하면서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그림인 민화가 한국 미술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추사 김정희 같은 선비나 도화서에서 근무하는 관료 화가들 작품이 조선미술사를 독점하고 있었다. 주 화백은 조선시대 그려진 그림의 총 95% 정도를 민화가 차지하지만 한국 미술계는 조선시대의 ‘민화는 천하다’다고 치부하며 민화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미대에서 동양화 교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 민화가 아닌 문인화를 그리는 사람들이라 본인들이 전공하는 문인화에 비해 민화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현재 주 화백은 미술계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 미술계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을 당했다. 그는 여전히 제대로 된 한국미술사를 후학에게 알리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그동안 투쟁만 했던 것은 아니다. 본업인 작가 생활도 충실히 해서 수차례의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주 화백은 지난 25년 동안 호랑이, 용, 토끼 등이 등장하는 민화를 주로 그려왔다. 2010년 백호의 해를 맞이한 그는 호랑이 그림으로 자신의 이름을 석자를 알렸다. 최근 들어 그는 ‘북만주’를 의미하는 ‘북주(北洲)’라는 호를 버리고 대신 ‘북쪽 호랑이’라는 의미의 ‘북호(北虎)’를 자신의 호로 정했다. 스카이데일리가 미술평론가로서 한국 미술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개인 화가로서 한국 민화의 현대화에 앞장서는 북호 주성준 화백을 만났다.

 ▲ 북호 주성준 화백은 1990년부터 24년간 해학적인 호랑이 그려왔다. 그의 그림은 2010년 백호의 해에 주목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판화, 왕골 등을 접목시켜 새로운 방법을 구현하고 있다. 또 그는 대학시절 논문을 준비하면서 한국미술사가 잘못돼 있다고 생각해 후학들에게 올바른 민화사를 알리기 위해 화가 겸 평론가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학설이 다르다는 이유로 미술계에서 배척당하기도 했다. ⓒ스카이데일리

1994년 북호 주성준 화백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2004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미술사가 일제시대에서 규정한 것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제대로 된 미술사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됐다.
 
한국미술사에서는 조선시대 미술을 평하는 부분에서 ‘채색은 천하며 수묵이 최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수묵화는 지금으로 치면 문화부장관이나 기획재정부 차관 등이 그린 아마추어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한국미술사에는 민화(民畫)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없어요. 한국미술사는 도화서 등 문인 화가들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어요. 정작 조선시대 그림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민화는 천하다는 이유로 기록조차 없죠”
 
그는 문인화가를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의미로 ‘여기(呂紀)화가’로 표현했다. 여(呂)는 풍류(風流)를, 기(紀)는 벼리·뼈대를 뜻하며 취미화가를 미화한 옛말이다. 문제는 현재 유명한 미술대학 교수들은 주 화백이 여기화가로 지칭하는 그림들을 조선시대 미술의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학설은 이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미술사의 첫 번째 문제는 일제시대의 미술사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서울대, 홍대 등의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는 점입니다. 미술이론과 실기, 동양화와 한국화 등 모든 자료가 한국에 있는데, 그들이 미국에 가서 무엇을 배우고 왔겠습니까? 지금의 한국미술사를 집필한 사람들 상당수는 미국에서 교수로 꽂아 준 낙하산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회의를 느꼈습니다”
 

 ▲ 주 화백의 그림 중 잘 알려진 작품은 해학적인 호랑이 그림이다. 그는 해학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해학이 저항과 순수가 담겨있다고 말했다. [그림=북호 주성준]

일그러진 민화, 아전인수격 한국 미술사의 어두운 그늘
 
주성준 화백의 그림은 호랑이, 용, 토끼 등이 등장하는 민화다. 민화는 개념상으로 민상화, 민속화, 민족화, 민중화 등으로 구분되고 국제적으로는 ‘한국민화’(Korean Minhwa)로 불린다.
 
“원래 민화라는 명칭은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년)가 붙인 이름입니다. 그가 일본의 절 입구에서 팔리는 싸구려 그림을 ‘민중에서 태어나 민중을 위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사용된 그림’이라며 ‘밍가’라고 불렀던 것이 시초였죠. 그러나 현재는 민화의 의미가 바뀌어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성준 화백은 한국 사회에서 민화는 여전히 천하다는 의식이 팽배한데, 이는 미술학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미술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역사적인 부분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 주 화백의 그림에는 호랑이, 토끼, 용, 말 등이 등장한다. 그는 조선 프로화가들의 그림인 정통 한국화(민화)의 세계화와 현대화를 위해 ‘다시 쓰는 한국회화사’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또 한국 최초로 ‘십이지’로 불리는 12가지 동물들의 상징에 해학을 담아 재구성해 현대화하는 작업을 수년째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림=북호 주성준]

그는 한국 미술계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미술계에서 얘기하는 동방예의지국, 백의민족사상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기라고도 했다.
 
“우리나라를 ‘백의민족’이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영토가 확장될 때 재물이 늘어나 부유했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침략이 계속 됐고 재물이 없기 때문에 염색할 돈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었던 것은 경제가 어려웠기 때문인데,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그랬다는 것은 아전인수인 셈이죠”
 
사실 피카소같은 그림, 입체파적인 큐비즘, 미래주의적, 환상적인 그림이 우리 민화에 많이 있다고 주 화백은 전했다. 피카소 이전의 큐비즘, 입체주의 화법이 200년 전 한국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언론이나 학계에 발표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런 논문을 발표하면 자신들이 천민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 화백은 말했다.
 
“석사, 박사 논문을 쓰는 미술 대학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도 물어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어요. 처음으로 제가 그런 논문을 썼기 때문이죠. 전혀 모르더군요. 미술계가 이렇게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 화가 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 미술계와 다른 학설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주 화백은 미술의 근간은 종교와 철학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올바른 한국미술사를 알리기 위해 히말라야, 인도 등 해외를 오가며 다양한 종교를 연구했고 현재 이런 내용을 담은 미술사를 집필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미술계의 이단아…혼자라서 더욱 힘들고 외로운 길 
 
그는 서산대사의 글 중 “하얀 눈 밭 위를 걸어갈 때에 발자국이 삐뚤어지면 후학들이 삐뚤어진 발자국을 따라온다”는 글귀를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진실을 공부하며 후학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고 처음 가는 길이라 고난의 길이었다.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표현을 확실히 하게 됐다고 주 화백은 전했다.
 
“그때부터 외면받기 시작했고 힘들었어요. 전 세계에서 유교적 화풍이 남아 있는 곳은 한국밖에 없어요. 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교수가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서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는데 안 되고 있어요. 논문을 심사받는 것조차 제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대한민국 한국화 교수들 상당수가 ‘여기화가’ 풍의 그림으로 교수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만약 제 논문 내용을 그들이 받아들이면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미술사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석사 논문으로 무려 10번이나 재검토 심사를 받았죠. 번번이 퇴짜를 맞는 바람에 대학원을 10번이나 시험을 봐야 했죠”
 
그에게는 유혹의 손길이 뻗친 적도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쯤 교수들로부터 “키워주겠다”는 제의를 받아 잠시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술 자체에 더 관심이 있었고 당연히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대학원에 들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학설을 제시하며 한국 미술계를 비판하는 논문을 썼다.
 
주성준 화백은 이단아였다. 미술계는 그를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라며 배척했다. 북호 주성준은 미술계의 ‘골칫덩이’ 취급을 받았다. 단지 그의 학설이 일반적인 학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주 화백은 전했다.
 
지금은 그의 말의 ‘맞다’고 동조해 주는 교수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미술계에서 학설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그를 인정하면 모든 한국미술사를 부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주 화백은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같은 학설을 주장하는 동료도 없어 자신이 가야하는 길이 더 외롭고 힘들다고 했다.
 
“지난 2010년부터 2년 동안 2700명에게 24번씩 제가 쓴 칼럼을 보냈습니다. 단 한명으로부터 답장을 받았죠. 미술대학을 가려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씁쓸하면서 가혹한 현실이었죠”
 

 ▲ 그의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여운이 남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 화백이 그리는 민화는 천하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특히 그는 미술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외롭고 힘든 시간을 많이 보내왔다. 그는 시대가 변한 만큼 판화, 왕골, 수석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민화를 많이 알리고 있다. [그림=북주 주성준]

주 화백은 지난 2년 간 모 잡지에 ‘다시 쓰는 한국회화사’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이를 근간으로 독창적인 ‘한국미술사’, ‘한국회화사’를 집필하고 있다. 주성준 화백은 한국 민화를 현대화해 캐릭터 작업을 하고 있다.
 
“현대에는 프로슈머의 세계라고도 이야기하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융합세계라고도 말하는데 지금 지방대학의 미술대 동양화과가 폐과되고 있는 실정이에요. 예를 들어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렸는데 풍속화로 유명해지니 정조는 김홍도를 불러 도화서에 일을 시켰죠. 그는 궁에서 정조 어진을 그렸고 그 후 충청도 연풍(지금의 괴산) 현감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풍속화는 한 장도 안 그렸어요. 주변의 양반이나 사또들이 ‘천한 것들이나 그리는 채색 그림을 그리느냐, 양반은 매란국죽을 그려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죠. 벼슬이 그림을 망친 것이죠”
 
주 화백은 채색은 나쁜 것이 아닌데 유독 우리 전통화에서는 천한 것으로 인식이 되고 있다고 한탄했다. 고구려, 고려 시절 그림에는 화려한 채색이 있었고, 상상력과 창의력은 채색으로부터 나온다고 주 화백은 주장했다. 그는 검은 색 먹으로만 이뤄진 그림이 사람들을 사무적으로 만든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관료제의 문제점이 미술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민화라는 것은 고구려 벽화, 채색화의 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종교와 철학이 맺어지지 않으면 한국 회화사가 발전할 수 없다고 봐요. 민화는 해학이 있어요. 그런데 해학에 대해서 미술학 서적에서 어떠한 설명도 돼 있지 않아요. 무식하고 천한, 유치한 그림이 아닌 우리 민족의 근원을 알리고 싶어요”
 
새로운 창작법으로 민화의 지평을 넓히는 작가 주성준
 
그는 민화를 대학교 때부터 그렸고, 최근 판화를 접목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전문화가 중에서는 왕골에 판화를 하는 작가가 없었는데 그가 최초로 시도를 했다. 전문화가 중 최초로 돌에다 호랑이를 그린 수석화 개인전도 열었다.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정신이 젊은 작가였다.
 
“한번은 호랑이 그림을 그렸는데 꿈에 화폭에서 호랑이가 나와 제 발을 밟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괘씸해서 그 그림을 태웠던 적이 있습니다. 제 그림을 소장하신 분들이 호랑이 꿈을 많이 꾸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웃는 호랑이상을 많이 그리곤 합니다”
 
흔히 글씨나 그림을 평가할 때 신품(神品), 묘품(妙品), 능품(能品), 일품(逸品)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인간이 만들어서 잘 만든 작품이 일품이고, 신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 신품이라면, 이 중간에서 오묘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작품을 묘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 화백을 아끼는 주위 사람들은 “주 화백 작품의 소장자들이 꿈에서 호랑이를 본다는 걸 보면 주 화백의 작품은 묘품에서 신품으로 가는 단계일 것이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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