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에 대한 '챗돌(지피티)'와 나눈 대화들7(사격 후 총알탄피 수거에 있었던 개인적 경험, 사격후 10발중 6발 탄피 잃음?)
작성자jonglh작성시간26.06.16조회수19 목록 댓글 0
총의 탄알에 구리 탄피가 입힐때가 언제
총알에 황동(구리+아연 합금) 탄피가 붙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입니다.
사용자님이 M1 카빈, M16A1, K2에서 보셨던 탄약처럼 생긴 형태는 사실 상당히 늦게 완성된 기술입니다.
1. 초기 총기 (13~18세기)
처음에는 탄피 자체가 없었습니다.
사수는
화약
탄환(납구슬)
종이 또는 헝겊 마개
를 따로 넣었습니다.
발사 후에는 총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2. 종이 탄약 시대 (17~19세기)
화약과 탄환을 종이로 묶은 종이 탄약(Paper Cartridge)이 등장했습니다.
사수는 종이를 찢어 화약을 붓고 탄환을 넣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군인들이 사용한 머스킷총이 대표적입니다.
3. 금속 탄피 등장 (1840~1860년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뇌관
화약
탄두
를 하나로 묶은 금속 탄피가 개발됩니다.
대표적인 초기 사례가
Sharps rifle
이후의 금속 탄약들입니다.
4. 황동 탄피의 확산 (1860~1880년대)
황동 탄피는
녹이 잘 슬지 않고
적당히 부드러워 발사 시 약실을 밀폐하고
발사 후 수축하여 배출이 쉬운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 중요한가?
황동 탄피 덕분에
후장식 소총
연발 소총
기관총
이 가능해졌습니다.
만약 탄피가 없었다면 사용자님이 군대에서 사용한
M1 Carbine
M16A1
K2 소총
같은 반자동·자동 장전 총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활이 총에게 완전히 밀린 시기와의 관계
흥미롭게도 활이 최종적으로 군대에서 사라진 시기와 금속 탄피의 보급 시기가 거의 겹칩니다.
17세기: 총이 활을 대체
19세기: 금속 탄피 등장
20세기: 현대 소총 완성
즉 활을 몰아낸 것은 화승총·머스킷총이었고, 사용자님이 군대에서 다루신 M16A1이나 K2 같은 현대적 소총을 가능하게 한 핵심 기술은 19세기 중반의 황동 탄피 발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격장에서 M16이나 K2를 쏘고 나면 오른쪽으로 뜨거운 탄피가 튀어나왔을 텐데, 그 작은 황동 탄피 하나에 화약·뇌관·탄두가 모두 결합된 결과가 수백 년 총기 발전의 결실인 셈입니다.
한국 군대는 사격시 탄피를 수거하는 함을 총에 붙인다던지 하는데 다른 미국이나 일본 군대도 사격 후 탄피를 수거하나
네, 한국군의 탄피 회수 문화는 상당히 철저한 편입니다.
사용자님도 기억하시겠지만 사격 훈련 후에는
탄피 개수 확인
탄창 개수 확인
미사용 탄약 확인
을 매우 엄격하게 했습니다.
특히 K2나 M16 사격 시에는 총 오른쪽에 탄피받이(탄피회수망)를 부착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이 유난히 탄피를 회수하는 이유
탄약 관리
탄약 유출 방지
실탄 도난 방지
행정 확인
지급 탄약 수량과 발사 수량 대조
훈련장 정리
산에 떨어진 탄피까지 찾는 경우도 있음
예전에는 탄피 하나 부족하면 훈련 종료 후 전 인원이 수색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미국군은?
United States Army도 탄피를 회수합니다.
다만 한국군처럼 "탄피 하나 부족하면 전원이 뒤지는 수준"은 아닙니다.
사격장 청소
재활용
탄약 사용량 확인
목적으로 회수합니다.
특수 상황을 제외하면 탄피받이를 항상 장착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미국군 사격 영상을 보면 탄피가 바닥에 흩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자위대는?
Japan Self-Defense Forces 역시 탄피를 회수합니다.
일본은 장비 관리가 매우 엄격한 편이라 사격 후 탄피를 수거합니다.
다만 한국군처럼 모든 탄피를 완벽하게 개수 맞추는 문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습니다.
왜 한국군이 특히 엄격할까?
한국은
징병제
휴전 상태
탄약 유출에 민감
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용자가 복무하셨던 1980년대 후반에는 지금보다 관리가 더 엄격했습니다.
예비역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실탄 하나, 탄피 하나가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
출처 입력
물론 실제 뜻은 아니지만, 그만큼 탄약 사고를 두려워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용자님 세대는 사격훈련을 떠올리면 사격 자체보다 탄피 찾으러 다닌 기억이 더 강한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잔디밭이나 흙바닥에 떨어진 황동 탄피는 햇빛에 반짝여도 찾기 쉽지 않았거든요. 포병이든 보병이든 "탄피 하나 모자란다!"는 말이 나오면 긴장했던 경험이 있는 예비역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사격장에서 생긴 에피소드로 앞에서 언급한 누워서 사격때 총에 문제가 생겨 발을 들지 않고 손을 든 것으로 사격관리책임자가 깃발을 들고 뛰어온 기억과 함께 두번째로 사격장에서 탄피수거함이 달리지 않은 소총으로 사격 후 10발 중 탄피 6개가 아래 흙구멍에 빠져 이를 수거할려고 여러 동료들이 나서 삽을 동원하여 탄피를 수거함. 한발의 탄피라도 잃어면 부대 분위기가 좋지 않기에
그 에피소드는 당시 한국군의 탄약·탄피 관리 문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네요.
첫 번째 이야기는 사격장 안전수칙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사용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격 중 총기에 이상이 생겼을 때 손을 들면 사격통제관이 즉시 반응합니다. 사격장에서 가장 민감한 것은 총구 방향과 오발 가능성이기 때문에, 통제관 입장에서는 "왜 손을 들었지?" 하고 긴급 상황으로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깃발을 들고 뛰어온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더 당시 군대다운 풍경입니다.
10발을 쐈는데 탄피 6개가 흙구멍으로 들어가 버렸다면, 오늘날에도 찾겠지만 당시에는 특히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탄피 하나가 모자라면 간부들은 먼저 다음을 의심했습니다.
탄피를 제대로 회수했는가?
실탄이 잘못 처리된 것은 아닌가?
관리상 문제가 있는가?
그래서 실제 가치가 몇십 원, 몇백 원인 황동 탄피라도 행정적 의미는 훨씬 컸습니다.
사용자님 말씀처럼
"한 발의 탄피라도 잃어버리면 부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출처 입력
는 표현이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합니다.
그래서 삽까지 동원해서 흙을 파내고 탄피를 찾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흔히 "탄피 찾기", "탄약 찾기"를 사격 훈련의 일부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특히 1980년대 후반의 한국군은 지금보다 전산화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탄과 탄피의 수량을 직접 대조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포병 사격지휘분과였던 사용자님이 겪으신 그 장면은 당시 군대의 엄격한 탄약 관리 문화를 보여주는 생생한 경험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실제 사격 점수보다도, 사격 후에 "탄피 개수 정확히 맞았다"는 것이 간부들에게는 더 중요한 확인 사항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예비역들이 사격장을 떠올리면 과녁보다 탄피 줍던 기억을 먼저 이야기하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