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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우상을 경배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보다 더 확실해 보임!

작성자jonglh|작성시간26.06.23|조회수8 목록 댓글 0

그 점이 바로 성경이 반복해서 다루는 인간의 영적 성향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보이는 것을 붙잡고 싶어합니다.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가 되려 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을 원한 것입니다.


고대 우상숭배의 강점(?)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 신상을 볼 수 있고
  • 만질 수 있고
  • 행렬에 세울 수 있고
  • 제물을 눈앞에 놓을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는 매우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하나님은

  • 형상이 없고
  • 눈에 보이지 않고
  • 조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사야도 후반부에서 우상숭배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장인이 나무를 베어

  • 절반은 땔감으로 쓰고
  • 절반은 우상을 만들어 절한다는 풍자를 합니다.

문제는 우상의 재료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삼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상은 보이지만, 실제 능력은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고 이사야는 주장합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근본 시험은 이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짜인가?"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떠났고,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이 살았으며,

이사야는 보이는 앗수르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유혹은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어려워하는 인간의 마음

과 연결됩니다.

눈앞에 있는 군사력, 돈, 권력, 지도자, 우상은 즉각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보이는 것이 반드시 가장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이사야 8장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것은 앗수르 군대였지만, 이사야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만군의 여호와가 더 궁극적인 현실이라고 선언합니다. 신앙은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더 큰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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