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칠천인의 영성을 회복하자
오늘날 교회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성장도 이야기하고, 성공도 이야기하고, 영향력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너는 누구에게 무릎 꿇고 있는가?"
엘리야 시대의 문제는 바알이었다.
다니엘 시대의 문제는 금신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문제는 신사참배였다.
모양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하나님 외의 것에 충성을 요구하는 시대의 압력이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칠천 명을 보여 주셨다.
그들은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아셨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칠천인의 영성이 필요하다.
세상은 여전히 무릎 꿇을 것을 요구한다.
돈 앞에 무릎 꿇으라 한다.
권력 앞에 무릎 꿇으라 한다.
인기와 성공 앞에 무릎 꿇으라 한다.
그러나 칠천인은 하나님 앞에만 무릎 꿇는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말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짧은 고백이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축복하셔도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셔도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셔도 충성하겠습니다.
이것이 순교를 각오한 영성이다.
순교를 추구하는 영성이 아니다.
충성을 포기하지 않는 영성이다.
한국교회는 양화진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남산 조선신궁터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받은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해야 한다.
양화진은 복음의 은혜를 가르친다.
남산은 복음의 대가를 가르친다.
은혜만 기억하는 교회는 약해진다.
대가만 강조하는 교회는 메말라진다.
양화진과 남산을 함께 기억할 때 한국교회는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오늘 하나님은 다시 칠천인을 찾고 계신다.
시대를 이길 영웅이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을 사람,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사람,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고백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칠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