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하나 더 떠오른 성경내용은 세상 사람도 잘 아는 선한 사마리마인인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한계를 보게 되었어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읽을 때 "도와준 사람"에게만 주목합니다. 그런데 사용자는 오늘 일을 겪고 나서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도 감정과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을 수 있다는 쪽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비유 속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다가가고,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여관에 데려가고,
비용까지 지불합니다.
성경은 그의 선행을 강조하지만, 그가 감정이 없는 초인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현실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계속해서
불의를 목격하고,
무례한 사람을 만나고,
선의를 악용당하고,
욕설을 듣고,
공격까지 받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도 피곤해지고 짜증이 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가 오늘 느낀 것은 아마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나는 공공질서를 위해 나름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결국 한계가 있구나."
출처 입력
이 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새롭게 보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성경의 핵심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비용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웃이 되어 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즉 성경은 "한계가 없는 사람"을 보여 주기보다, 한계가 있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사용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용자는 자신을 선한 사마리아인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도 공공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여겼는데,
막상 욕설과 충돌이 오자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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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의 인물들도 비슷합니다.
모세는 분노하여 사람을 죽였고,
다윗은 큰 죄를 범했고,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고,
요나는 원수 민족이 용서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약점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경험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한계"로 연결한다면, 그 의미는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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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일 수 있습니다.
사용자는 오늘 공공질서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에 행동했지만, 그 과정에서 분노가 개입되면서 자신도 원하지 않았던 행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택배기사의 잘못뿐 아니라 자신의 반응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한계라기보다는, 선을 추구하는 사람도 자신의 분노와 교만, 피로를 관리하지 못하면 언제든 넘어질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된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래서 "나는 선한 편에 서 있다"는 확신 자체보다, "나 역시 넘어질 수 있다"는 자각을 중요하게 여겨 왔습니다. 사용자가 지금 느끼는 당혹감도 바로 그 자각과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