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TV 앞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터질 듯한 긴장감과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올해로 결혼 30년 차를 맞이한 중년 부부 정수 씨와 미숙 씨는
오전 11시에 킥오프하는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체코전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숨을 죽인 월드컵 첫 전반전 이른 시간부터 TV 앞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도 묘한 활력이 감돌았죠.
아이고 저걸 못 넣네 체코 수비수들 피지컬이 좋긴 한데 첫 경기라 그런지 몸들이 좀 무거워 더 과감하게 찔러줘야지
정수 씨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한국 대표팀의 공격수가 체코의 탄탄한 장신 수비벽에 막혀 골문 앞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참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 미숙 씨가 넌지시 뼈 있는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당신 저 경기 보니까 누구 생각 안 나
누구? 체코 감독? 아니면 저기 첫 경기라 긴장한 미드필더?
미숙 씨는 남편을 흘깃 바라보며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니 우리 집 침대 위에서 유독 체코(체력 고갈) 현상 일어나는 누구 있잖아.
전술은 거창한데 막상 경기 시작하면 저 장신 수비수들처럼 굳어버려서 꼼짝도 못 하는 사람
심지어 요즘은 낮 경기는커녕 개막전 이후로 통 일정이 잡히지도 않더라
정수 씨는 순간 마시던 물이 얹힐 뻔했습니다.
헛기침을 크게 하며 아내의 눈치를 살폈죠.
서른 번의 사계절을 함께 보내며 은근히 밤낮 가릴 것 없이 전성기만 못해진 체력을 아내가 축구에 빗대어 완벽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30년 동안 다져진 부부 짬밥이 어디 가겠습니까
정수 씨는 이내 수비 태세를 정비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보 월드컵 첫 경기는 원래 전 국민이 지켜보니까 긴장해서 조심스러운 법이야.
그리고 축구는 원래 잔디에 햇볕이 화사하게 내리쬐는 낮 경기가 진짜 알짜배기야.
시야가 환하게 확보되니까 공격수가 파고들 틈이 더 잘 보인다고
아내 미숙 씨는 남편의 탁월한 변명에 피식 웃음이 터졌습니다.
어머 핑계도 좋아 감독은 언제나 문전을 활짝 열어두고 최고의 전술을 지시했어요
공격수가 체력 저하로 전반전 조기 종료를 선언해서 문제지 요즘은 월드컵 본선은커녕 예선전 인저리 타임도 없이 바로 상황 종료되는 거 알아?
허 이 사람이 나 이래봬도 30년 전에 이 경기장 처음 입성했을 때는 낮이든 밤이든 가리지 않던 아시아의 호랑이'였어
오늘 첫 경기 기분 좋게 끝내고 점심 먹기 전에 한번 보여줘
동유럽의 장신 수비벽도 무너뜨리는 가공할 슈팅 리바운드가 뭔지
오냐 골대나 비우지 마라 골키퍼 은퇴한 줄 알고 다른 집에서 골 넣으러 올까 무섭다
하하하 걱정 마 내 골문은 30년째 철벽 빗장 수비니까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젊은 날의 뜨거움은 깊고 아늑한 정으로 변했을지 몰라도 서로의 약점을 이토록 유쾌하고 품격 있는 해학으로 받아칠 수 있는 여유야말로 30년을 함께 산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다시 TV 속 해설위원의 목소리가 격양되었습니다.
자 대한민국 선수들 첫 경기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다시 후반전 시작합니다
정수 씨가 은근슬쩍 미숙 씨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며 귓속말을 속삭였습니다.
여보 오늘 점심 메뉴는 조금 늦게 고르고... 우리 집 월드컵 첫 경기도 오늘 화끈하게 개막하는 거다
브레이크 타임 주기 없기야
미숙 씨는 못 이기는 척 남편의 품에 더 깊숙이 기대며 대답했습니다.
비디오 판독(VAR) 철저하게 할 테니까 오프사이드 반칙이나 하지 마셔
화면 속 축구공은 거침없이 굴러갔고 TV를 끈 뒤 두 사람만의 대낮 월드컵 첫 경기 역시 아주 오랜만에 활기찬 슈팅으로 가득 찼다는 소문이... 며느리도 모르게 전해집니다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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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러비코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해당화 감사합니다
해당화님도 늘 건강하고 시원한 싦 사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김보연 작성시간 26.06.18 ㅎㅎ아시아의 호랑이
이젠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셨나요?
삼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해오신
부부만의 특별함과 애정이 잘 보이네요
부부끼리 손만잡고 자도
면멱력도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풀린대요
많이 사랑하세요
글을 때론 감동적으로
때론 유머스럽게 잘 쓰시는데
아침 편지라는 책을 쓴 작가처럼
책 한권 내보세요
오늘은 체코가 아니고
아시아의 호랑이 위용을 되찾는 하루되시구요
홧팅!! -
답댓글 작성자러비코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이빨은 아직 빠지지 않았구요 이빨은 튼튼한데 그넘의 지구력이 문제네요
전후반 다 뛰기가 힘들어요 ㅎㅎ
부족한 글을 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냥 가볍게 끄적이며 쉬어가는 정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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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김보연 작성시간 26.06.18 러비코즈. 남자분들의 착각하나!!
담금질만이 최선은 아니고
예열과 그 후가 중요한데 ᆢ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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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러비코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김보연 맞는 말씀~
드리블 오래하다가 정작 골문 앞에서 강슛 해야할때 헛발질할까봐 드리블을 간결하게 해야 되는 안타까운 체력이 된것 같아요
오히려 골을 터트린 후에 그 후의 세러머니를 즐기는 쪽의 게임이 되는것 같아요 ㅎ
유쾌한 교감 감사합니다
맛점 하시고 시원한 오후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