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햇살이 비만(肥滿)하게 내리쬐는 일요일 오후
나는 주말 텃밭의 절대 군주로서 엄숙한 사열을 마쳤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곧게 자란 고추들의 발육 상태를 점검하고
오이의 까칠한 사춘기 반항을 잠재웠으며 가지의 보랏빛 고독을 어루만져 주었다.
상추와 열무에게는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쌈장과의 삼자대면이 있을 것이라 위로했고
땅속에서 은밀하게 세력을 확장 중인 고구마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가는 옥수수의 등짝을 기특하게 두드려준 참이다
이 위대한 전원적 성취 끝에 찾아온 육체적 피로를 이끌고 나는 나만의 성역인 별채로 망명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미학을 논했지만 이 순간 내게 가장 아름다운 미학은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꺼낸 캔맥주가 내는 치익~ 하는 개방음이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액체 시베리아의 청량함 속에서 나는 마침내 은밀하고 위대한 의식을 시작한다
핸드폰을 켠다 화면 속에는 딱 한 번 그 스치듯 지나간 모임에서 마주쳤던 그녀가 있다.
그녀는 가히 백조였다
우아하게 긴 목 세상의 비속함 따위는 일절 모른다는 듯한 고고한 눈빛
그날 그녀는 마치 닭장에 잘못 날아든 천연기념물 같았고
나를 포함한 중년의 수탉들은 그 아우라에 압도되어 연신 헛기침만 날려댔더랬다.
지금 폰 화면 속의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자니 내 안의 문학적 은유가 맥주 거품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녀의 깊은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우리 집 텃밭의 잘 익은 고추를 노리는 고라니의 그것처럼 애타면서도 치명적이다
살짝 머금은 그 미소는 가뭄에 바짝 마른 열무밭에 내리는 스프링클러의 단비와도 같다
내 메마른 심장에 가차 없이 물을 뿌려대는구나
이쯤 되면 이건 단순한 짝사랑이 아니다
텃밭에 뿌린 비료가 흙 속에서 조용히 발효되듯 내 가슴속에서 그녀를 향한 연모의 정이
아주 은밀하고도 지독하게 숙성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청국장 급의 깊이다
비록 그녀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혹은 그날 수줍게 그녀를 바라보며 면 음식을 먹던 남자가 나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불평하지 않기로 한다
원래 백조는 호수 위의 우아함만 보여줄 뿐 물밑의 처절한 자포자기 발길질은 구경꾼의 몫이니까
나는 지금 방구석에서 아주 품격 있게 그 발길질을 즐기는 중이다
맥주 한 캔에 그녀라는 백조를 별채 가득 채워 넣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비록 내일이면 다시 이 평화로운 주말 별채를 뒤로하고 서울 집으로 올라가 도시의 일상으로 복귀하겠지만
오늘만큼은 이 별채가 베르사유 궁전이요 내가 바로 백조를 연모하는 고독한 성주(城主)다
잠시 후 다가올 귀경길 교통체증의 압박도
이 품격 있는 상상 스케치 앞에서는 한낱 미풍에 불과하다
낭만은 살아있고 나의 주말은 위대했다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