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되돌아보는 역사 ☆
성삼문(成三問,
1418년~1456년 6월 8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조선의 사간원 우사간 등을 지냈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성삼문,
"어제 저녁,
한 송이 꽃이 떨어 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꽃이 피어서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
내 너를 대하니
기분좋게 한잔 하리라."
성삼문이 좋아한
백일홍, 배롱나무꽃,
"단종"(조선시대 제6대왕 16세)이 청령포로 귀양 가고 난 뒤에, 배롱나무 꽃을 바라 보며 술을 들면서 "단종"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성삼문"은 고려말 "최영 장군"이 출생한 충청도 홍주 지금의 홍성군 흥북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삼문"이라고 지은 이름은
성삼문 어머니가
삼문을 낳았을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세 번의 소리가 들려서
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니, 천재적인 재능(才能)을 타고 났다.
그뒤, 식년문과(式年文課)에 급제하고,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 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귀양보내고 용상에 올랐으니, 그 용상의 자리를 본래 주인에게 찾아 주고자 계획한 일이 "김질"의 배반으로 무산되고, 아버지 "성승"과, 세 동생
네 아들과 서자(庶子) 모두 참형(목을 짜름)을 당했다.
성삼문은 사지가 갈기 갈기 찢겨지는 "거열형"(머리와 양쪽 팔과 다리에 묶인 밧줄을 다섯마리의 소나 말이 각 다른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임)으로 38세에 생을 마감했고,
그의 일족(一族) 중의 남자는
모두 죽였다.
함께 죽은 사육신(死六臣)중에 "박팽년" 후손이 살아 남아, 숙종(조선19대) 때 신원이 회복되어 사육신의 제사를 지금도 모신다고 한다.
세종 대왕이 아들 "문종"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금지옥엽(金枝玉葉)
어린 손자 "단종"을 걱정하면서 집현전 엘리트(elite)학사들에게,
"단종"을 도우라고 부탁했는데,
그들이 육신이 처참하게 망가져
죽으면서 까지 세종대왕과 약속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그 이름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으로
천추(千秋)에 이어가고 있다.
성삼문은 형장(刑場)으로 가면서 절명시(切命詩) 한 수를 남긴다.
"둥~둥~둥,
울리는 북(鼓)소리가
내 목숨 재촉 하는구나.
머리 돌려 바라보니,
서산으로 해가 지는데
황천길(黃泉道)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집에 묵어 갈까?"
성삼문이 처형장(處刑場)으로 끌려 갈 때 어린딸 "호옥"이 수레를 따라 오면서 울자,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래고는,
집안의 종(奴)이 울면서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 마신 후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고 한다.
앞선 시(詩)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시(詩)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樂樂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 할제,
독야청청(獨夜靑靑)하리라]
죽음을 앞두고
꺾이지 않은 절의(節義)가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숙연(肅然)하게 한다.
이 시(詩)는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의 "성삼문" 각비(刻碑)에도 적혀 있다.
봄비가 멈추고 잠시나마
햇볕을 마주하니 시절(時節)은
여름이 가까이 와 있네!
권력(權力)이 도대체 뭔지?
동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 사회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일념(一念)으로
막가파와 무엇하나 다를바 없는,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의로운 사명감은
내팽겨치고,
오로지, 권력 쟁취 야욕(野慾)에만
몰두(沒頭)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 한심한 우리의 현실이
마음을 곤비케 흔들어 놓는다.
🌿 가정의달 !
계절의 여왕 5월입니다.
온가족들과 함께
웃음과 행복이 넘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