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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띠 사랑방

'파란만장(波瀾萬丈)'

작성자쉐도우영.|작성시간26.06.07|조회수129 목록 댓글 2


주지의 용어인 '파란만장(波瀾萬丈)'은 사람이 사는데 있어 곡절이 많고 시련과 풍파가 많은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역사적인 위인들이나 중요한 인물들의 일대기를 보면 파란만장 그 자체인 경우가 많은데, 온갖 시련과 풍파를 겪고도 극복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 있겠으나 이 사람도 누구 못지 않은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습니다. 기고만장(氣高萬丈)했던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는 낭만주의의 거장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경향을 풍부한 상상력과 웅장하고 화려한 문체로 나타냈습니다. 1862년 걸작《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을 완성했고, 작품에는 희곡《에르나니》와 시《동방의 시집》, 소설《노트르담의 꼽추》 등이 있습니다. 그의 수많은 명언 중 개인적으론 이 문장을 좋아합니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진정한 거인은 생각의 크기로 결정된다."

그는 인도주의를 외치면서도 사치스러운 부를 누렸고, 민중을 노래하면서도 여인의 영혼을 가두었으며, 자식들의 무덤 앞에서도 추악한 욕망을 멈추지 못했던 지극히 모순적인 인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날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눈물 흘리는 이유는 그가 완벽한 성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독한 모순과 광기, 뼈를 깎는 슬픔 속에서도 끝내 펜을 꺾지 않고 인간의 비참함을 구원하려 했던 '가장 인간다운 거인'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찬란한 문학적 성취와 자식 셋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막내딸마저 평생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등 그 이면에 숨겨진 참혹한 비극, 그리고 인간적인 모순을 아주 상세히 다룬 <빅토르 위고가 밤마다 흘린 피눈물, 레 미제라블에 숨겨진 인간 구원의 대서사시 풀스토리> 라는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더욱 요구되는 이 시대에 스스로 공부하자는 차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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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같은 딸의 죽음과 절망

​전 유럽의 찬사를 받으며 행복한 여독을 즐기던 마흔한 살의 빅토르 위고는 우연히 집어 든 신문 기사를 보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기사에는 프랑스 생강에서 배가 뒤집혀 한 젊은 부부가 익사했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는데, 그 죽은 여인은 위고가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했던 스무 살의 맏딸 '레오폴딘'이었습니다. 신혼이었던 딸은 남편과 배를 탔다가 돌풍에 휘말렸고, 물에 빠진 아내를 구하려던 남편마저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위고는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이 지난 후에야 신문을 통해 이 비극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이 죽어갈 때 자신은 휴양지에서 유유자적했다는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린 위고는 미친 사람처럼 파리로 돌아와 밤새 통곡했고, 이후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 긴 절필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불행했던 유년 시절과 내면의 모순

​빅토르 위고는 태어날 당시 몸이 너무 작고 나약해 의사조차 포기했던 아이였으나, 어머니의 필사적인 간호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란 환경은 이념의 전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자 열렬한 공화주의자였습니다.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국왕을 추모하는 뼈속 깊은 왕당파였습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위고의 유년 시절은 부모의 고함과 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전쟁터를 전전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던 중, 결국 부모는 이혼하게 됩니다. 어머니 밑에서 철저한 왕당파 교육을 받으며 자란 위고는 살아남기 위해 국왕을 찬양하는 시를 썼지만, 내면에는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공화주의적 기상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소년 위고는 숨 막히는 현실을 피해 서재 구석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만의 도피처를 구축했습니다.

​문단을 경악시킨 천재 신동의 등장

​위고의 문학적 천재성은 10대에 이미 폭발했습니다. 14살 때 일기장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거대한 야망을 적었던 그는 불과 1년 뒤,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한림원(아카데미 프랑세즈) 시 공모전에서 완벽한 시를 선보이며 심사위원들을 충격에 빠뜨립니다. 심사위원들은 15살짜리 아이가 이런 우아하고 철학적인 시를 썼다는 사실을 믿지 못해 조작 시비를 제기했고, 결국 1등상 대신 가작을 내리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억울한 오명은 오히려 그를 '천재 신동 '으로 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고가 동경하던 문단의 군주 샤토브리앙마저 그를 직접 초대해 "프랑스의 미래가 담겨 있다"라며 극찬했습니다. 자존심에 불이 붙은 위고는 잠과 끼니를 줄여가며 글쓰기에 매달렸고, 글자 하나로 세상의 권력을 쥐겠다는 잔인한 야망을 품기 시작합니다.

​잔혹한 결혼식과 형의 광기

​성공만을 향해 달리던 위고에게 소꿉친구 '아델 푸셰'와의 격정적인 첫사랑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아들에 대한 소유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위고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아델을 모욕하고 위고의 외출을 금지하는 등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했습니다. 1821년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위고는 이듬해 주변의 우려를 뒤로하고 아델과의 결혼식을 강행합니다. 인생 최고의 승리를 거둔 찬란한 결혼식 날 밤, 끔찍한 비극이 일어납니다. 위고의 친형 '외젠 위고' 역시 아델을 오랫동안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의 천재성에 가려 늘 열등감 속에 살던 외젠은 결혼식 피로연에서 술을 들이켜다 이성을 잃고 날카로운 고기용 칼을 휘두르며 동생 부부를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형 외젠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결국 평생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정신병원 독방에 수감됩니다. 위고는 자신이 대문호가 되고 행복해지기 위해 형의 인생을 훔친 것은 아닌가 하는 지독한 부채 의식과 죄책감을 평생의 아킬레스건으로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에르나니 대논쟁과 고전주의의 파괴

​위고는 슬픔에 침잠하는 대신 프랑스 문단의 장막을 깨부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는 엄격한 규칙과 이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위고는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뜨거운 열정을 담은 새로운 시대, 즉 '낭만주의'의 깃발을 들고 신작 희곡《에르나니》를 무대에 올립니다 ​공연 날, 엄숙한 고전주의 평론가들과 위고를 추종하는 낭만주의 청년 부대가 객석에서 맞붙었습니다. 무대 위 주인공이 거친 일상어와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자 고전주의자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이에 분노한 청년들이 맞서면서 극장은 주먹다짐과 의자가 날아다니는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거친 패싸움은 몇 달 동안 매일밤 반복되었으며, 이는 문학 역사상 가장 격렬한 전장으로 기록된 '에르나니 대논쟁'이 됩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위고였습니다. 연극은 매진 행진을 기록했고, 위고는 불과 28세의 나이에 프랑스 문단을 지배하는 낭만주의의 황제로 우뚝 서게 됩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의 탄생과 기괴한 집착

​1831년 위고는 오늘날《노트르담의 곱추》로 잘 알려진 불멸의 대작《노트르담 드 파리》를 발표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근대화의 바람 속에 중세 건축물을 흉물 취급했고,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파괴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조국의 영혼이 서린 성당이 사라지는 것에 분노한 위고는 성당을 활자로 구원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출판사와의 마감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위고는 기행을 벌입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자신의 모든 외출복과 구두를 자물쇠로 잠그게 했습니다. 옷이 없으면 부끄러움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스스로를 가둔 것입니다. 위고는 알몸에 오직 커다란 회색 털 담요 한 장만 걸친 채, 얼어붙을 듯 차가운 겨울 방 안에서 서서 글을 쓰는 기묘한 집착으로 하루에 수십 페이지를 쏟아냈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비극적인 사랑이 탄생했고, 소설은 출판되자마자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민중의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는 결국 성당 철거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고 성당을 복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위고는 활자 하나로 국가의 거대한 문화재를 구해낸 살아있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가학적인 사랑과 이중적인 삶

​명성의 정점에서 위고의 사생활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내 아델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밀실에 '줄리에트 드루에'라는 무명 배우가 나타납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으나 위고의 사랑은 가학적이었습니다. 위고는 그녀에게 당장 무대를 떠나라고 명령한 뒤 파리 외곽의 조그만 단칸방에 가두다시피 했습니다. 하인을 시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자신이 허락한 시간이 아니면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통제했습니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줄리에트는 졸지에 위고가 밤새 쓴 초고를 베껴 쓰는 활자의 노예로 전락했고, 가난과 고독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위고를 신처럼 사랑해 이 통제를 50년 동안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가장 추악한 사실은 줄리에트에게 엄격한 정절을 요구했던 위고 자신은 파리의 수많은 어린 여배우, 문학 지망생, 심지어 저택의 하녀들과 요리사들까지 불러들여 육체를 탐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낮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순고한 사랑을 노래하는 거장이었지만, 밤에는 자신의 권력으로 여성들을 착취하는 지독한 이중성을 보였습니다.

​아내의 배신과 가문의 스캔들

​1841년 위고는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 명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위원으로 선출되며 문단의 군주로 승인받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 위고는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배신의 칼날을 맞이합니다. 위고가 외도로 집을 비우는 동안 외로움에 신음하던 아내 아델이 불륜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상대는 놀랍게도 위고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 평론가인 '샤를 오기스탱 생트베브'였습니다. 가장 믿었던 아내와 친구의 배신에 위고는 분노로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도덕적 거장이라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추악한 스캔들을 묻어두고 철저한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대회적으로 가면을 쓴 채, 집안에서는 아내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냉혹한 복수를 했습니다. 이 배신의 흉터는 위고의 심장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냉소와 인간 환멸을 새겼고, 그는 현실을 잊기 위해 더 많은 여인의 육체를 탐하며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앞서 언급한 큰딸 레오폴딘의 익사 참변이라는 천벌 같은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치적 대전환과 19년의 망명 생활

​수년간의 절필 끝에 18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필립은 위고를 자작으로 봉하고 귀족원 의원(상원 의원)에 임명합니다. 권력의 중심에 선 위고는 산업혁명의 그늘 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민중들의 피눈물을 목격합니다. 보수적인 귀족 의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에만 혈안이 된 모습을 보며, 위고는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였던 자신의 모순에 괴로워하다 결국 침묵을 깨고 연단에 섭니다. 그는 귀족들을 향해 "가난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정치가 저지른 명백한 살인이다"라고 사자처럼 포효하며 민중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경험은 위고의 사상을 왕당파에서 좌파 공화주의자로 완전히 대전환시켰고, 그는 소설《레 미제라블》의 초고를 다시 쥐게 됩니다. 이후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서고 위고는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 군사 쿠데타를 단행해 공화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위고는 바리케이트가 세워진 거리로 뛰쳐나가 독재자에 맞서 싸웠으나 체포령이 내려졌고, 결국 연인 줄리에트가 구해온 노동자 작업복과 가짜 여권 덕분에 야반도주하듯 조국을 탈출해 외딴 건지섬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독재자 나폴레옹 3세가 위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면령을 내리며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유혹했지만, 위고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프랑스의 자유가 돌아오는 날 오직 그날만이 나의 사면이다. 마지막에 한 사람만 남는다면 그 망명객은 바로 내가 될 것"이라며 사면을 단칼에 거부했습니다.

​영혼의 붕괴와 강령술 빠진 거인

​대쪽 같은 영웅의 모습 뒤에서 인간 위고의 내면은 고독과 향수병, 그리고 죽은 큰딸 레오폴딘에 대한 죄책감으로 처절하게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건지섬의 어두운 독방에서 위고는 당시 사교계에 유행하던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르는 '강령술'에 중독됩니다. 이성을 숭배한다던 대문호가 딸의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듣기 위해 매일 밤 어둠 속에서 유령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집착은 갈수록 심각해져 나중에는 셰익스피어, 모세, 한니발, 사후 세계의 환영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믿으며 일기장에 대화록을 빽빽이 기록하는 등 정신 붕괴 직전의 광기를 보였습니다. 세상은 그를 불굴의 공화주의 영웅으로 우러러보았지만, 외딴 저택 안에서 그는 그저 죽은 딸을 잊지 못해 유령의 환청에 매달려 울부짖는 가련하고 깨져버린 아비에 불과했습니다.

​명작《레 미제라블》의 출간과 물음표 편지

​망명지의 고독과 광기를 땔감 삼아 위고는 마침내 17년 만에《레 미제라블》을 완성합니다. 원래 제목은 가난한 이들의 도덕적 구원에 초점을 맞춘《선행》이었으나, 가문의 광기, 아내의 배신, 딸의 죽음, 19년의 처절한 망명을 거치며 소설은 인간 영혼을 향한 거대한 구원의 기도문인《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로 진화했습니다. 1862년 소설이 전 세계에 출간되자 파리 서점가에는 새벽부터 수천 명의 노동자가 줄을 섰고 초판 수만 부가 동이 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돈을 모아 글 아는 사람을 고용해 밤마다 장발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가 탄생합니다. 망명지에 갇혀 책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던 위고는 대문호의 체면상 구구절절 물어볼 수 없어, 출판업자에게 커다란 종이 한가운데에 오직 문장 부호 '?'(물음표) 딱 한 글자만 적어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 출판업자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그 종이 위에도 오직 문장 부호 '!'(느낌표) 딱 한 글자만이 강렬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성공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위고는 이 소설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여 자본주의 방식으로 재산을 증식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대변하면서 자신은 부를 누리는 모순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의 문장은 이미 나폴레옹 3세의 총칼을 무력화하며 프랑스 민중의 심장을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황제였습니다.

​신이 되어 돌아온 조국과 인간 환멸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제국이 전쟁 패배로 무너지고 공화정이 선포되자, 위고는 19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옵니다.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역 광장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마차를 직접 손으로 밀며 행진했습니다. 조국을 지킨 불굴의 상징이자 살아있는 신이 귀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은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가난한 민중들이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을 결성하면서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에 잔인한 학살극이 벌어졌고 일주일 만에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즉결 처형당했습니다. 위고는 코뮌의 폭력성도 비판했지만 민중을 도살하는 정부군의 잔혹함에 분노하여, "쫓겨난 코뮌 전사들에게 내 집 문을 열어주겠다"라며 약자의 편에 서는 인도주의적 선언을 합니다. 하지만 고결한 외침에 돌아온 것은 군중의 잔인한 증오였습니다. 어제까지 그를 신이라 찬양하던 시민들이 단 하루 만에 돌변하여 횃불을 들고 위고의 집을 포위한 채 "반역자 위고를 단두대에 세워라"라며 돌을 던졌습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죽이겠다는 군중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며, 위고는 평생 대변하고 사랑했던 민중들이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현실에 뼈를 깎는 인간 환멸과 더없는 고독을 느껴야 했습니다.

​거인의 마지막 소박한 상여와 장엄한 국장

​파리로 돌아온 노거인 위고의 마지막 날들은 자식들의 무덤으로 뒤덮인 비극이었습니다. 맏딸의 익사에 이어, 둘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급사했고, 막내 아들마저 폐결핵으로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막내 딸은 장교에게 집착해 정신이 나간 채 평생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습니다. 모든 자식을 먼저 땅에 묻고 홀로 남겨진 위고는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신이 내게 명성을 주는 대가로 자식들의 목숨을 제물로 거두어간 것"이라는 천벌 의식에 괴로워했습니다. 1885년 5월, 마침내 위고가 숨을 거두자 프랑스 정부는 국장을 선포합니다. 위고의 마지막 유언은 대문호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박하고 슬펐습니다. "교회식 장례를 거부한다. 내 영혼은 신에게 맡기며 가난한 사람들의 상여차에 실려 가기를 원한다."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은 가난한 불랑자들이나 쓰는 볼품없는 나무 상여차에 실렸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관이 지나가는 파리의 거리에는 무려 200만 명이 넘는 전 세계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개선문 아래 거대한 가관이 설치되었고, 밤새도록 민중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상여차를 썼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장엄했던 장례식을 마친 후, 위고는 영웅들이 잠드는 판테온 지하 묘소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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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Victor Marie Hugo)의 명언들

"죽는 것보다 무서운건 진정으로 살아보지 못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of life is the conviction that we are loved.)

"사랑은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발견을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To think is to act.)
"동물이 먹이를 먹듯, 인간은 생각을 먹고 자란다."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진정한 거인은 생각의 크기로 결정된다."
"미래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약한 자들에게는 '불가능'이고, 겁 많은 자들에게는 '미지'이지만, 용기 있는 자들에게는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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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쉐도우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7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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