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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장 : 나사로를 살리심

작성자갈렙|작성시간10.06.27|조회수68 목록 댓글 0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

(31년 2월 베다니에서)


11장은 예수님의 여섯 번째 기적인 나사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라는 촌에서 두 누이인 마르다과 마리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3 남매는 예수님께서 아주 사랑하시는 가족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자인 요한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6절)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

특히 나사로는 더욱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누이들이 예수님께 전갈을 보내면서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말했고,

주님께서 나사로의 누이들을 만나서 말씀을 하실 때에도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도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36절)


이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소식을 그의 누이들이 보낸 전갈을 통해 받으셨을 때는 요단강 근처에 계실 때였습니다. 급히 서둘러 가시면 하루면 가실 수도 있는 과히 멀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체하셨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로는 예수님은 급히 서둘러 가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두르시기는커녕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6절)

아마도 사랑하시는 그 친구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 같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랑하는 그 친구를 통해 가장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또 가장 놀라운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병든 상태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은 <치유>에 불과하지만 죽은 상태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은 <부활>인 것입니다.

무엇이 더 귀한 것일까요? 치유보다는 부활이 천만배 귀합니다. 그 놀라운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자는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하셨을까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절)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 최고한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서도 가장 사랑하는 자가 선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는 가장 힘든 십자가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한 방식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욕망의 눈으로 보자면 주님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판단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되며  이것이 최대의 가치 있는 삶임을 안다면 자랑스러워야할 일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의 광휘 충만한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하시기 위한 주님의 의도는 나사로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의 면모

나사로는 죽어 말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한 성질들을 나타냈습니다.


먼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말씀하시자,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12절)”라고 말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신 잠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또 주님께서 "유다로 다시 가자"라 말씀하시니까 그들은 “주여 방금도 돌로 치려하였는데 그리고 가시고자 하십니까?(8절)”라고 겁을 냈습니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위험이 증가해 가고 있었고 동시에 제자들의 마음에도 기대가 큰 만큼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현기증과 고독을 이겨야 됩니다.

주님은 “낮이 열두 시간(hour)이 아니냐? 낮에 다니면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않느니라(9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위험이 만연해도 빛 가운데로만 걷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 안에만 걷는다면 어떤 환경일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시는 것을 강행하시자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라고 하여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도마의 믿음이 본받을 만하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나사로의 누이들입니다.

그들의 말들은 모두 주님에 대한 원망일색입니다.

마르다도, 마리아도 예수님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한 말은 이러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32절)

이것은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라는 원망조의 말입니다.

살다보면 주님께 대한 야속한 마음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은 남달리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일수록 십자가가 다가오면 몹시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하여 믿음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현재의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까지는 믿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믿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고,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은 영적으로 부활된 자들의 영원한 삶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영적인 의미를 육적실체를 통하여  실증해 주시고자 나사로는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지만 마르다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동생 마리아에게  조용히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하여 마리아에게 주님을 떠넘기시고는 자신은 뒤로 빠져 버렸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서 발 앞에 엎드려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울움 소리가 얼마나 처량하였는지 동네 사람들도 울고 급기야 예수님까지 우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Jesus wept." 영어성경으로는 가장 짧은 절이라는 이 구절은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곧 주님께서도 우리와 똑 같은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통분히 여기셨습니다.”(33절)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 의도를 하셨을 지라도 사랑하는 자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시는 순간 죽음 앞에 무력한 인생에 대한 비통함과 사단에 대한 분노가 솟아오르셨던 것입니다.


무덤 앞에서 있었던 순종과 감사

주님은 일행들과 함께 무덤에 가셔서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39절)”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는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냄새가 날 정도이니 이젠 시체가 썩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무덤문을 열어서 무엇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으로 보면 좋은 점수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냥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땐 “주여,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하더니 지금은 도무지 못 믿겠다는 투입니다.

예수님께서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시자 마지못해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순종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인함이오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들으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늘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버지께 감사하셨습니다.

참 아름다운 감사입니다. 그런 감사를 있게 만든 원인은 주님께서는 늘 아버지 안에 거하시며 또 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요, 믿는 모든 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내가 구하는 것 역시 말씀 안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구하는 바는 곧 아버지의 원하시는 바였으니 어찌 들어주시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의 소원을 아뢰지 말고, 주님의 소원을 아뢰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자, 아버지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곧 나사로를 살리심이 예수님의 뜻으로 인해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난 나사로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나사로가 베로 수족을 동인채로 나왔습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전혀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지 자신은 꽁꽁 묶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살아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내 영이나 혼이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전적으로 외부(하나님)의 힘에 의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그동안 어디 있다 나왔을까요?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죽으면 사흘 동안은 주위에서 있다가 사흘이 지나면 음부로 떠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음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설명도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까지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계1:18)


예수님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절)”고 하셨습니다. 살아났다 해도 역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자기 힘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권속들과 이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형제들을 가급적 도와야 합니다. 금방 거듭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세상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될지 당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세상에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기 까지 도와야 합니다.

나사로의 살아남은 엄밀한 의미에서 부활은 아닙니다. 그것은 회생(回生)입니다. 그러나 영적 부활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일곱 가지의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모두가 영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나사로의 부활은 영적부활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몸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롬8:11)


영이 부활한 사람들은 몸이 죽는다 해도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죽은 것”이 아니고 “잠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죽었다”고 하시지 않고, “잠들었다”라고 하신 것이 그 이유입니다. 또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3)


나사로의 간증전도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45절)

입으로 백 마디 전도하는 것 보다 실제로  변화된 삶으로 보여주는 것 한 가지가 더 호소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들로써 분명 부활의 능력을 삶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점증하는 살해모의

나사로 까닭에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47-48절)

그들은 이대로 놔두면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어서 마침내 왕이 될 것이요, 그러면 로마의 미움과 공격을 받아서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만일 그리된다면 왕 되신 주님의 권능이 로마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얼마든지 보호해 줄 것이라는 것 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속주로 머물러 있으면서 세금을 내고 통치를 고스란히 받는 현 체제만이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결과 마침내 예수님을 제거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도다.”(50절)

이것은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는 예수님은 제거되어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기실 나라 걱정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의 인기가 떨어지니까 시기심이 나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에도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52절)


영적으로 밝은 사람은 자연인의 말 한마디 속에서도 어떤 징조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사건마다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은 세상을 동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흥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생기고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면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날로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53절)

요즘에 교회가 세상과 사이좋게 동행을 하는 것은 교회나 세상이나 본질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교회를 굳이 핍박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난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을 아시고는 멀찌감치 빈들 근처의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로 도피하셨습니다.
“빈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54절)

사실은 유월절이 되기까지 기다리시면서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길을 위하여 호흡을 가다듬는 기간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는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는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5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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