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사상사의 거대한 두줄기는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히브리 사상은 동적(動的)이고, 헬라사상은 정적(靜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섬기는 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맨먼저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 혹 <야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호와는 어떤 신이신가?
모세가 여호와께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정체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I am that I am)"(출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한 것이다.
여기에 쓰인 <예흐예>는 히브리 동사 <하야>의 미완료, 1인칭, 공성, 단수이다.
즉 "나는 있고 있느니라"는 뜻인데, "나는 계속 있느니라." "나는 항상 있느니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번역했고, 영어로는 <I am that I am>이라고 했는 데, 우리 번역이 영어번역보다 우월한 것 같다.
그러면 <하야>의 본래의 뜻은 무엇인가?
<하야>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영어로는 <Be>로 되어 있고, 우리 말로는 <이다. 있다>라고 되어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영어의 <Be>는 우리 말로 <이다>와 <있다>라는 뜻이 있지만, 사실상 히브리어 <하야>에는 <이다>라는 뜻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말의 <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것이 더 낫다.
그러면 이 <있다(존재한다)>가 동적개념인지 정적개념인지 살펴보자.
얼핏보면 정적개념 같이 보인다. 어떤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만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있다>는 것은 동적개념이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한 남자가 있다" 할 때, 그 남자는 움직이지 않고 존재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존재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있는 것이다. 그 남자가 아마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로 몇초간이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무리 부동한다해도 심장은 뛰고 있고 피는 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동작없이 존재하는건 불가능하다.
또 "여기에 "강이 있다."고 할때, 그것은 정적인 상태인가? 아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강이랄 수 없기 때문에 강으로써 존재하려면 물은 계속 흘러야한다. 이렇게 물이 계속 흘러야만 존재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정적인 존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 집이 있다." 얼핏보면 정적인 상태일 것 같다. 집이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집이 춘하추동 춘풍추우를 거치면서 수십년을 지나도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세월을 거치면서 벽은 허물어지고, 기둥과 석가래는 썩어 주저 앉을 것이고, 지붕은 쓰러져서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채의 집도 <있기>위해서는 많은 보존 에너지의 공급이라고 하는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있다>는 것은 정적개념이 아니고, 동적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야>는 정적인 동사가 아니다.
이제 <하야>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자.
<하야>가 창세기 1장에서만 해도 25회나 나온다. 그것을 해석된 것에 따라 셋으로 분류하여 설명해 보자.
1. <하예타 토후와 보후(혼돈과 공허하며...>(창1:2)
라는 말에 쓰인 <하예타>인데, 이 말은 <하야>의 완료형, 3인칭. 여성. 복수로써 "혼돈과 공허가 있었고"라는 뜻으로 한번 쓰였다.
이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이미 종말을 고하고, 창조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2. 먼저 <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예히>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있다>라는 뜻으로 5회가 쓰였다.
2-1. <예히 오르 와예히 오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예히>는 <하야>의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 단축형이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게 되었다는 보도인데,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신 후에 지금까지 빛이 계속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동적개념인가? 정적개념인가?
빛은 항시도 가만히 있지 않다. 매초마다 30만 km의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것을 정지상태라고 말할 것인가?
빛은 그 어떤 피조물 보다도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적 존재인 것이다.
이 외에도 <예히>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쓰였다.
2-2. <예히 라키아 (궁창이 있으라.)> (6절): 궁창이 하루라도 움직이지 않는 날이 있는가?
2-3. <위히 마브딜 벤 마임 라마임 (그리고 물과 물 사이에 분리가 있으라.)
<위히>는 접속사(그리고)에 붙은 <예히>이다.
2-4. <예히 메오롵> (광명체들이 있어 (14절): 해.달.별들이 가만히 있는 날이 있는가?
이렇게 볼 때, <하야>는 정지하고 있는 관념이 아닌 것이다.
3. 이제 <되다>라는 의미로 쓰인 경우들을 보자.
<하야>가 <되다>라는 뜻으로 창세기 1장에서 19회가 쓰였다.
3-1.<예히 에렙 와예히 보켈>(저녁이되고 아침이 되니...)(창1:5,8,13,19,23,31)
<하야>가 두번씩 여섯 번이나 사용되었으니 열두번이나 사용된 것이다.
<하야>가 <되다(become)>로 번역이 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되다>가 정적인 개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온세상이 어두워지고 서늘해진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다시 밝아지고 따뜻해진다.
이러한 변화와 운동으로 인해 우주와 온 세계는 질서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과 변화 속에서 세상은 새로와지며 생장하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현상을 보면서 <정지된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구절을 생각해보자.
3-2. <와예히 캔 (그대로 되니라)>
이 말은 창 1장에 모두 6회나 나온다.(7, 9, 11, 15, 29(이흐예), 30)
29절의 <이흐예>도 단축형이 아니라는것 외에는 <예히>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는데, 어느 것 하나 변화되지 않고,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위나 흙조차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무수한 입자들이 생성소멸하고 있으며 수많은 미생물의 분주한 움직임들에 의해 부식되고 또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이 우주엔 부동적인 것, 즉 정적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는 만물의 <있음>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하야>하고 계시는 자> 즉, <스스로 있는 분>께서 창조하셨고, 보존하시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억해두자.
우리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으로써,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히브리인의 사고는 동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