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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강단

부활을 얻기 위해 달음박질하는 사도 바울

작성자갈렙|작성시간18.05.13|조회수232 목록 댓글 3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들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0-14)


  이 구절을 보면 바울은 아직도 스스로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사도고 뭐고, 체면 생각하지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신자들에게 실망을 줄 수도 있는 말인데도 솔직히 말합니다. "나는 아직 얻은 것도 아니고 이룬 것도 아니라고..."


도대체 바울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단박에 찾아내기는 어려울 정도로 이 문장은 좀 복잡합니다.

차근 차근히 살펴 보겠습니다.


우선 이 본문이 몇개의 문장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헬라어에도 한 문장을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주는 쉼표(comma)가 있고, 문장을 끝내주는 마침표(period)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은 여러개의 쉼표들이 있고, 세개의 마침표(period)로 되어 있으니, 세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문장, 두째 문장, 셋째 문장으로 칭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문장: 7절에서 11절까지.

두째문장: 12절 한절.

셋째문장: 13절과 14절.


<첫 문장>

  첫문장은 꽤 긴데, 그것을 다 옮겨보겠습니다.

"(7절)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8절)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하노니"


이 구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에게 유익하던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긴다.

<2>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3>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4>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즉 하나님께로서 난 의다.

<5>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자 한다.

<6>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어찌하든지 간에 (그리스도 처럼)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


  이 내용으로 볼 때, 핵심은 바울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 처럼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왜일까요?

그리스도의 지식, 즉, 그의 죽으심과 그 분의 부활에 참예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말이 10절에 나오는 부활은 [아나스타시스]가 사용된 반면, 11절에 나오는 부활은 [엨사나스타시스]가 사용되었는데, 전자는 신약성경에서 40회 이상 사용된 일반적으로 부활을 의미하는데 반하여, 후자는 이곳에서 딱 한번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알기가 용이하진 않지만, [엨사나스타시스]는 일반적인 [아나스타시스]앞에 [에크]라는 전치사가 접두된 것일 터이므로, 그 뜻이 더 역동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죽은 자들로 부터"가 더 강조된 <부활>이라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우리 나라 말에 <던지다>란 말도 있고, <내던지다>란 말도 있는데, 전자 보다는 후자가 더 역동감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봅니다.

즉, 바울은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하는 <보통 부활>이 아니라 힘쓰고 애써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죽은 자들로 부터 확실하게 살아 나오는 <힘있는 부활>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 이렇게 사료됩니다.


바울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배설물같이 여기면서 까지 이러한 부활을 얻고자 하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은 아직 부활을 하지 못한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부활을 한 자라면,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째 문장>

이제 두째 문장을 살펴 보겠습니다.

두째 문장은 앞서 말씀드린 것 처럼, 12절 딱 한 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상태를 노골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직 얻은 것이 아니고 이룬 것도 아니고,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입니다. 

무엇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것일까요?

세상의 명예나 권세일까요? 

아닙니다. 

시시하게 세상의 권세와 명예를 잡기 위해서 좇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잡고자 좇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 즉 부활이라는 엄청난 상급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말을 심각하게 음미해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가 된 바울도 "아직 얻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데, 우리가 감히 "나는 부활을 했노라~!...그러므로 나는 부활을 더이상 기다리지 않노라~!"라고 말할 수 있겠는지를...

언어도단입니다. 


<셋째 문장>

  이제 세 번째 문장을 살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두번째 문장에서 한 말을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왜 반복을 할까요? 강조하여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은 그 만큼 진실하고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리고 부활을 앞에 있는 푯대라고 말합니다.

달리기나 승마경주를 할 때엔 마지막 결승점에 깃대를 꽂아 둡니다. 

왜냐하면 그곳을 향하여 오직 전력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활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전력질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도 우리가 "나는 부활을 이미 얻었기 때문에 죽자 살자 달릴 필요가 없는데..."

"나에겐 더이상 부활이 필요가 없는데..."라고 너스레를 떨 수가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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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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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진리와사랑 | 작성시간 18.05.13 유대교에서 율법적 종교와 자기 의로 흠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다 믿었던 것이 하나님에게는 다 해가 되어 배설물로 버려야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말씀하는 뜻이

    현재도 자기 열심으로 종교생할과 자기 선함이 하나님에게는 다 해가 된다는 알고 배설물로 버려야 그리스도를 얻게 되지
    기존교회는 신앙이 참 믿음인줄 알고 있어 버리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침례 | 작성시간 18.05.13 진리와사랑님은 무엇을 얻으셨는지요?
  • 작성자Haloje | 작성시간 20.08.05 스크랩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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