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때 시민들이 쳐들어가 왕을 사로잡은 궁전 튈르리 궁전. 우리는 보통 프랑스 궁전하면 베르사유를 떠올리게 되는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프랑스 대혁명때의 왕이 있었던 장소는 튈르리 궁전이었다.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에서 불타 소실되고 없지만은 그 정원만은 남아 프랑스 시민들에게 아니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중요시한것처럼 그곳의 정원은 편안한 휴식처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맘껏 누리게 해주고 있다.소실되고 없는 튈리르 궁전의 사진은 없지만 모네가 그린 그림중 불타고 있는 튈르리 궁전을 찾을 수 있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시가전(市街戰)에서 태반이 불타 없어져 현재는 정원밖에 남지 않았다.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1560년대에 건축가 들로름을 시켜 세웠다고 한다. 루브르 궁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센강(江) 우안(右岸)을 바라보고 있다. 공사의 진척이 늦어져 카트린 드 메디시스 다음의 앙리 4세 때 겨우 정면의 절반이 끝날 정도였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건축가 르보를 시켜 정면 건축을 완성시키고 정원에 많은 조각을 배치하였으나 1682년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기게 되어 그 후로는 오랫동안 방치 상태에 놓였다. 1789년 10월 6일 루이 16세가 다시 이 궁전으로 돌아왔으며, 혁명 후에는 나폴레옹이 이곳을 황제의 거처로 삼았다. 1830년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립은 건축가 퐁텐을 시켜 일대 증축을 하게 하였으나,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증축의 서툰 솜씨를 책망하고 다시 르퓌엘에게 개축공사를 담당케 하여, 튈르리궁전과 루브르궁 사이를 복도로 잇는 구상을 실현시켰다. 지금은 1971년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파괴돼 궁전을 볼수 없지만 정원으로나마 아름답고 웅장했던 튈르리 궁전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모네의 작품중 튈르리 궁전과 정원
(뒤에 보이는 곳은 루브르 궁전(이 정원은 루브르 정원에서 콩코드광장까지 연결되어있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위에 모네가 그린 그림에서 튈르리궁전이 지금 루브르 궁전과 똑같이 생겼다 사진과 그림을 비교하시면 된다. 그 이유는 루브루 궁전 서쪽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건물의 미적 요소를 살리기 위해 같은 형식의 궁전이 지어진 것일 것이다.-그냥 추측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프랑스 선조들이 이룩해놓은 지금의 프랑스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