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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자유, 혁명의 도시. 파리.

작성자윤선영 정보05|작성시간05.12.11|조회수167 목록 댓글 1

 <예술과 자유, 혁명의 도시, 파리>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다. 북부의 파리분지 중앙부 센강 중류변에 있다.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통일이 가장 빨랐고 프랑스의 정치·경제·문화·과학·예술 등 모든 분야의 중심도시이다 세계 대도시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의미의 수도이다.

 파리는 예로부터 수도로서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시가 중심부 센강변의 해발고도는 26m에 지나지 않지만, 주위에 100m가 넘는 언덕이 5개 있다. 파리분지의 남북방향 주요 연락로는 몽마르트르와 쇼몽언덕 사이의 산마루를 지나 센강 안의 시테섬을 딛고 이 골짜기를 건너 남쪽에서는 생 주느비에브언덕과 몽파르나스 사이의 비에브르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넓은 대지 위로 나온다. 우아즈·마른 등 센강의 지류는 동쪽 및 북쪽 두 지역과의 연락로가 되었다. 이 천연의 십자로라고도 할 만한 입지조건은 파리의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영향력을 전국에 미치게 하였다.


[파리의 역사]

①고대에서 중세까지

 파리분지에는 구석기시대 생활 흔적이 보이며 도시로서의 근원은 BC 3세기, 켈트계의 파리 인이 시테섬을 중심으로 살았으며, 파리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초기에 어로생활을 하였던 그들은 곧 센강을 이용한 상업활동도 하였다. 이곳을 로마인들은 루테티아라고 하였으며, BC 50년대에 카이사르의 갈리아정복과 함께 로마제국 지배 아래 놓였다.

 그 뒤 3세기에 이르기까지 주로 센강 왼쪽 연안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로마 도시 루테티아에는 이미 수상상인조합이 만들어져 있었다. 원형투기장과 클뤼니수도원 안의 욕장 유적에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4세기에 게르만인 특히 프랑크족의 침입이 격렬해져, 그에 맞서기 위해 로마에서 파견된 율리아누스는 이 땅에 정착해 살며 360년 황제로 추거되었다. 시테섬을 중심으로 집단화가 진척되어

 5세기 초에는 최초의 시벽이 만들어지고 로마지배는 사실상 끝이 났다. 5세기 중엽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내습을 받아 파리는 다시 위험에 놓였으나, 성녀 주느비에브가 물리쳐 그 뒤 파리 수호성녀로 공경받게 되었다.

 6세기 초부터 클로비스에 의해 메로빙거왕조의 수도가 되어, 상업을 중심으로 오른쪽 연안으로 도시가 확장되고 수도원이 건립되어 종교적으로도 중요해졌다. 그러나 메로빙거왕조 말부터 카롤링거왕조 시대에는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카를대제는 아헨을 수도로 정하였다.

 9세기말 노르만인 이른바 바이킹이 센강을 거슬러 습격해 와 갈리아·로마 시대로부터의 도시 부근은 타격을 입었다. 888년 파리 백작 우드가 프랑크 국왕이 되고, 그 자손 위그 카페가 987년 카페왕조를 시작한 무렵부터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12세기 전반 카페왕조의 루이 6세 때부터 주변의 농업생산 향상으로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영국 왕과 싸워 프랑스왕국 영토를 늘리고 봉건 제후를 거느려 국왕의 권세를 강화하였다.

 13세기 성왕 루이 9세 치세 때 고등법원과 회계원이 설치되고, 상업발전에 맞추어 인구도 10만을 넘었다. 1302년 교황과 대립한 국왕 필리프 4세는 성직자·귀족과 나란히 시민대표에게도 지원을 얻어 파리에서 최초의 3부회(三部會)를 열었다. 그 뒤로 파리는 국왕의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세말 백년전쟁에 따른 주변 농촌의 황폐, 식품부족과 물가앙등, 무거운 세금의 경제적 난관에 페스트 유행에 의한 대량 죽음의 공포가 더해졌다. 정치개혁을 바란 파리는 시장 E. 마르셀의 지휘 아래 1358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지만, 샤를 5세가 이를 진압해 일단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오른쪽 연안의 시벽을 넓혀 상공업 발전을 꾀하고 시테섬 왕궁에는 질서와 혁신의 상징인 시계탑을 세웠다. 그러나 샤를 5세가 죽은 뒤 혼미한 정국으로 인해 14세기초 20만 명이던 인구가 14세기 말에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더욱이 귀족들은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로 나뉘어져 전국적으로 싸움을 벌였으며, 15세기 초 한때 파리는 영국군과 내통한 부르고뉴파에 지배되어 황폐와 혼미가 극에 달하였다.


②중세에서 근대까지

 왕권 강화에 부심하던 프랑수아 1세는 1528년 파리에 본거지를 정하였다. 시내에 르네상스양식의 건물이 신축되고, 인문주의 바람이 파리에도 불었다. 상업도 번영해 인구가 다시 늘었으며, 동시에 하층민도 많이 흘러들었다. 그 뒤로 파리에는 누적된 심각한 하층민 문제가 계속 일어났다.

 16세기 말엽 약 30년 동안의 종교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가톨릭 세력 지배 아래 1572년에는 성 바르톨로뮤의 학살이 일어났다. 이 종교대립을 수습한 앙리 4세의 통치 때부터 점차 근대도시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한 보주광장과 드핀광장, 그리고 퐁뇌프를 완성시켰다.

 1648년 프롱드의 난으로 다시 파리는 왕권에 맞섰지만, 그 전의 루이 13세 시대에는 재상 A.J.P. 리슐리외의 지휘 아래, 그리고 17세기 후반부터 루이 14세의 치세 때에도 구획정리와 재개발이 계속되어 귀족 등 상류계층이 사는 서부지역이 특히 잘 정비되었다. 루이 14세는 반항적인 파리를 좋아하지 않아 1677년 베르사유로 옮겨 1682년에 그곳을 정부 본거지로 삼았으나, 파리는 상업은 물론 종교·문화·문예의 도시로서 전유럽에 이름을 떨쳤다. 


③대혁명에서 현대까지

 1789년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시작되어 파리시민과 상퀼로트(하층민중)가 활동한 대혁명 아래 파리는 다시 수도가 되었다. 혁명 직전 약 65∼70만 명 정도의 인구는 주변 도시와 마을 합병 뒤인 1761년에 170만 명, 1901년에는 27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 증가는 대부분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는데, 도시 정비는 인구 급증을 따르지 못하였고 서쪽의 부유한 부르주아지구와, 북·동쪽의 수많은 하층노동자지구의 격차가 엄청났다. 특히 19세기 전반 노동자들은 위험한 계층으로서 지배자계층에 두려움을 주었고, 실제로 1830년대부터는 노동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860년부터 주변 마을을 합병, 현재의 면적에 카르티에 전체를 20개 행정구역으로, 각 구역을 4개 구(區)로 나누었다. 제정의 강권 아래 폭넓은 대로가 구시가지를 가로지르고, 뒤얽힌 골목과 낡은 건물이 중심부에서 일소되어 제2제정양식의 건물이 신축되었으며, V.M.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유명한 하수도 정비도 본격화되었다. 코뮌 봉기로 한때 중단되었으나 제3공화국 때 개조가 계속되어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된 파리는 19세기말 에펠탑과 지하철 등 철과 전기로 표현되는 공업문명에 의해 그 변화가 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수도권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파리는 2번의 세계대전과 인민전선, 1968년 5월혁명 등의 사건으로 계속 정치의 명예로운 무대가 되었다. 또한 초현실주의의 근원지로 세계 각지의 전위적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파리는 패션의 중심지이며, 또 학문연구 및 현대사상의 새로운 움직임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파리의 문화유산]

 

           <사크레쾨르대성당>

: 프랑스 파리.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 때 행정가 알렉상드르 르장티와 로오 드 플뢰리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이다. 1875년에 착공 1910년에 완공.

            <생자크탑>

: 프랑스 파리. 1552년에 건설된 후기 고딕양식의 탑. 1648년 물리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기압실험을 한 곳이다.

 

           <에투앙 개선문>

: 프랑스 파리의 드골(에투알) 광장 중앙에 있는 석조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휘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였다.

 

<샹젤리제 거리>

: 원래는 귀족의 저택이 많았으나, 현재는 파리풍(風)의 호텔 ·레스토랑 ·극장 ·영화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궁(宮)을 비롯하여 항공 ·해운회사 ·자동차 전시장 ·고급 의상실 등의 건물이 많다.

 

                <루브르 미술관>

: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궁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로댕 미술관>

: 조각가 A.로댕의 만년의 아틀리에였던 파리의 호텔 비롱 및 뮈동의 주택에 로댕의 대표작 거의 모두와 데생, 작품의 주형(鑄型), 미술 컬렉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콩코르드 광장>

: 중앙에 루이 15세상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부르다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 15세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개칭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00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뒤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개칭되었다.

 

 

           <파리 오페라 극장>

: 정식 명칭은 '국립음악무용아카데미'로, 1669년 대본작가 피에르 페랭이 루이 14세로부터 오페라 상연을 허가받아 1671년 로베르 캉베르와 함께 왕립음악아카데미로 개장하였다. 1939년 이래 파리 오페라코믹극장을 포함하여 국립 오페라극장 연합이 운영하고 있다.

 

 

        <파리의 시가지와 주요 문화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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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선영 정보05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12.11 사진파일이 안열려서..ㅠ-ㅠ 원본을 첨부해두었어요! 죄송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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