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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삼두정치.

작성자고고미술사학과01학번김용건|작성시간05.07.28|조회수864 목록 댓글 0

1차는 카이사르(시저),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 이 3사람이 정국을 좌지우지한 것입니다.

일단 로마의 정치 체제부터 알아보면 일단 국회와 같은 '원로원'이 있습니다.원로원에는 200명정도의 원로원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귀족집단으로 로마의 지배층의 정점에 선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인재, 관료 양성소이기도 하구요. 이 원로원에서 1년에 한번씩 집정관을 뽑습니다. 2명씩 말이죠. 이 집정관은 국정을 총괄하고 모든 군대를 이끄는 현 대통령+합참의장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렇게 강한만큼 두사람 뽑아서 서로 견제하도록 해놨죠. 이 집정관은 말입니다~ 원로원 의원을 지내고 40세인가?(검색하면 나올것입니다) 하여튼 정년이 지나면 출마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출마한 집정관 후보들중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이 투표해서 뽑죠. 선거를 해서 말입니다.

위의 3세사람이 정국에 등장할때의 판세는 이랬습니다. 로마에는 2가지 정치세력이 있었는데 민중파와 귀족파(공화파) 입니다. 그당시 민중파는 민중의 편에서 개혁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었으나 그라쿠스형제(맞나??)의 개혁이 숙청으로 끝나고 계속된 내부항쟁끝에 거의 말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허물어져 가던 민중파 정치집단의 젊은 대표자격이 바로 카이사르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있는 귀족파의 얼굴마담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활약하기 이전의 최고, 최강의 장군이였지만 정치력은 꽝이였습니다. 그래서 원로원의원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죠. 실제로 자신도 귀족파적인 성향도 있었구요. 하지만 폼페이우스에게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로마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심말입니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폼페이우스에게 자신이 가진 정치력과 인맥을 내주었죠. (실제로 밀약당시에는 더 구체적인 서로의 이득교환이있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생각이 잘 안나는군요.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폼페이우스는 대신에 자신이 이끌고 있고 자기 명령을 절대적으로 듣건 휘하의 군인들로 카이사르와 자신이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당시 카이사르는 인기와 정치력은 있었지만 그 인기가 집정관투표의 득표로 이어질 만큼 강한 인기도 아니었고 민중파의 대장격이긴 했어도 민중들의 마음은 그렇게 확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보들도 쟁쟁했기 때문에 집정관 선거에서 폼페이우스가 도와줬어야 한 것입니다. 그당시 로마 남자시민들은 모두 군대를 복무했어야 했습니다. 그런 로마시민들에게 폼페이우스는 절대적인 인기였죠. 실제로 자기가 이끌던 병사들도 전시가 아니여서 로마에서 일반 시민으로 돌아와 있었기도 했구요. 그런 그가 카이사르의 집정관 투표를 도왔으니 집정관이 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폼페이우스도 같이 집정관에 취임한건 당연한 것이였죠.

두 집정관은 정해졌지만 카이사르는 두사람만으로는 정국을 휘어잡기엔 불안하다는 생각을 했고, 폼페이우스를 확실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크라수스를 끌어들였습니다. 크라수스는 그당시 최고의 재력가였고 경제계인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 그를 끌어들임으로써 세사람의 힘의 균형이 맞추어졌고 로마 정국장악력은 더욱 강해졌죠. 이 세사람은 서로의 정치적 야망과 이득을 위해서 서로 힘을 빌려준다는 정치적 밀약을 한 셈이였습니다. 이러한 삼두를 중심으로 집정관 2자리, 원로원, 호민관 등 거의 모든 기관, 요직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안정된 정국을 기반으로 카이사르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갈리아 정벌에 나설수 있었죠. 그리고 그 갈리아정벌을 끝내고 자신의 정예병과 후원자들을 확보한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넌 것입니다!!!


2차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써보죠.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배신하고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인 끝에 이기고 로마전체를 장악했습니다. 그때부터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고 로마를 안정시키게 되죠. 이후 로마정국에서는 원로원을 불신하는 여론이 많아졌고 집정관을 폐지하고 1인집권제를 하자는 대한 의견이 터져나왔습니다. 당연히 1인 집권의 주인공은 카이사르, 시져였죠. 이런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원로원 의원파중 (많은 의원들이 위에서 언급한 내전중에 숙청되었긴 했지만 카이사르는 많은 의원들을 살려주기도 했습니다.)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던 불온세력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에 이릅니다. 암살자중에서는 아들처럼 아끼고(양아들이라는 설도 있는)재능을 높이 사줬던 그 유명한 브루투스도 있었죠.

어쨌건 암살을 하긴 했지만 결과는 대 실패였습니다. 암살자 10여명중 대다수는 분노한 시민들에게 죽었고, 그리스쪽으로 도주한 자들도 결국 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카이사르 암살이후~! 그 뒤를 이을 포스트 카이사르로 두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실질적인 오른팔이자 군사적재능도 뛰어났던 안토니우스. 그리고 천만 뜻밖에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목한 옥티비아누스. 이 두사람이였죠. 하지만 거의 모든 권력이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가게 생긴 실정이였죠.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재능은 뛰어났지만 정치력는 꽝이였습니다. 결국 정국을 장악하지 못하고 또다시 원로원의원들과 대립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엄청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심복들이 거의다 옥티비아누스의 밑으로 들어가있던 실정이라 결국엔 옥티비아누스와 손을 잡게됩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티비아누스 이 둘이 연립하고 거기에다 카이사르의 왼팔격이였던 온건한 성격의 레피두스가 참가해 힘의 균형을 맞추며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차 삼두정치는 정치 밀약이였던 반면 2차 삼두정지는 노골적이였죠. 거의 매년 3명이 돌아가며 집정관을 했고 노골적으로 연합하여 정국을 지배했습니다. 개혁에 방해가 되는 인사들의 숙청도 주저하지 않았죠. 어쨌거나 그 완벽한 연합은 반대파가 반란을 일으키며 깨지게 됩니다. 귀족파(공화파)가 일으킨 반란을 제압한 3두정권은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여러번의 갱신끝에 3두중 에스파냐와 갈리아지방을 지배하던 레피두스가 옥티비아누스를 지지하게 되면서 실각하죠.(지지가 실각의 주요인은 아닙니다만 어쩄든 옥티비아누스쪽으로 사태가 돌아갑니다.)
이로써 3두정치는 막을 내립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티비아누스는 서로 로마제국 동쪽(안토), 서쪽(옥티)를 지배하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bc36년에 한판 붙습니다. 그 마지막 전투가 유명한 악티움해전!!! 이집트에서 모든 전력을 이끌고 (클레오파트라까지) 나온 안토니우스는 결국 악티움이란 해안에서 옥티비아누스군에게 패배했고, 이로써 로마는 긴긴 혼란을 끝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난뒤 자연스럽게 옥티비아누스는 로마의 황제! 프린캡스에 오르게 됩니다.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퍼왔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참고로 그 스스로는 황제라는 말이 아닌 프린캡스! 즉 '제1의시민'이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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