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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게시판

로마의 공화정에 대하여..

작성자04-최성은|작성시간05.07.28|조회수455 목록 댓글 2

일단 로마의 공화정은 현대에 생각하는 만민 평등의 공화정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시작은 로마의 초대 왕 섹스퀸탈리우스가 로마에서 축출당한 후라고 할수 있

 

는데기원전 509년 왕을 축출한 로마는 귀족과 평민이 합세하여 나라를 꾸려나가는 공화정이

 

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귀족은 유력가문 출신자를 귀족이라고 하고. 그들은 원로원(초기에는 100명 나중

 

에 수가 늘어남)과 그들과 집정관(권력 독재를 방지키 위하여 1년마다 2명을 선출)

다른 세력의 힘 평민의 협의회인 민회를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최초에는 평등한 국가 건설을 기치로 왕을 몰아 냈었지만... 나중에는 원로원이라는 국가 중

 

대사 결정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집정관 배출층이었던 귀족들이 힘을 장악하자

평민들은 이른바 성산사건 병역(당시 로마의 병역은 부병제였음) 및 경작을 거부하고 성산에

 

올라가 투쟁했고, 그이후로 평민의 힘이 어느정도 신장되고 호민관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호민관은 평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집정관들의 원로원에서 만든 시책에 대한 비토(veto)권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집정관 탄핵권을 행사할수 있었으니. 그힘은 막강하였답니다. 또한 호

 

민관 재직중에는 원로원의 수사까지 피할수 있었다.

성산사건이후 이렇게 평민, 귀족간에 힘의 균등이 어느정도 이루어진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발전이 되고 최초 7개언덕을 다스리던 조그만 부족 국가 내지 도시 국가 수준

 

에서 국가가 방대해지고, 상설군의 필요성이 생기고 속주(식민지)를 통치할 인력이 필요하게

 

 되자 로마는 전임 집정관을 속주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면서 군대와 영역 통치권을 가진 귀

 

족 신력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던 도중 카르타고와의 충돌로 인하여 국가 중대사가 생기고 급기야는 로마 전역이

 

한니발 (카르타고의 명장)의 침입으로 힘들어지자 독재관(1인 통치 장기 집권)및 임페라토르

 

(총사령관, 나중에는 황제라는 의미로 쓰임. 현대 영어 임페리어의 어원)이 필요케 된다.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로마는 지중해의 패자가 되고. 또한 한층 강성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팍스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명목으로 주변국가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게 되고

영역은 더욱 늘어나 방대한 제국을 다스리기에 원로원과 집정관 민회 이들로만은 힘들게 된다.

또한 커다란 전쟁과 속주관리때문에. 군 출신자의 힘이 강대해진다. 이때 마리우스라는 사람

 

이 나타나는데, 그는 평민출신으로 포에니 전쟁을 통해 무공으로 신분상승하여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으로 갈리아 족의 로마침입을 격퇴하고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연임되는등 평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독재관으로써의 힘을 과시하죠

그러던중 나타난게 술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술라는 원로원 이나 집정관 배출가문인 유력 귀족출신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명망있는 씨족의

 

자제로 동방의 전쟁등으로 무훈이 높았다.


술라는 집정관이 되어 마리우스의 정책을 대부분 무너뜨린뒤.. 자신의 기반을 닥고

독재정치를 펴는데 술라는 자신의 임지를 동방 그리스, 터기 방면으로 배정 받아 동방속주 총

 

독으로 가는데  그 뒤에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술라의 측근을 다 죽이고 독재정치를 편다.

그러던 중 마리우스가 병사하자 술라는 로마로 귀환 로마 근처에 자신의 병사를 모아놓고 무

 

력시위를 한 후, 집정관에 당선되어 로마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한다.


이때 1400여명의 귀족 및 기사계급을 없애는 이른 바 살생부를 제작하여

로마를 집권하는데 (공화정 몰락의 주요원인중 하나임) 그 역시 죽게 되고

로마의 공화정은 어느정도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듯 하지만, 그러나 방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에는 어느정도 비현실적(집정관 임기가 짧고, 방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선 다원지도층이

 

 아닌 강력한 실권자가 필요했기 때문에)이었습니다.

이때 나타난게 그 유명한 카이사르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게르마니아 방책 설치등으로 평민층 귀족층 모두의 인기를 얻고 있

 

었으며 강력한 군단을 보유하였고, 마리우스의 처조카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고모부임)

였기때문에 귀족출신임에도 불고하고 인기가 많았다.


카이사르의 인기에 술라 마리우스를 떠올린 귀족층은 그를 갈리아 원정을 거의 마무리한 시

 

점에서 그의 군대를 해산할 것과, 또한 새 속주로 돌아올것을 명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원

 

로원의 기대와는 달리 군대를 동반  루비콘강(당시 로마와 속주 프로빈키아의 경계)를 넘게

 

됩니다.  이때 한말이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다.

그는 로마로 돌아온뒤 집정관이 되고, 이어서 지중해 해적소탕의 영웅 폼페이우스 대부호 크

 

라수스와 손을 잡고 삼두정치라는 것을 펴게 된다. 그 이후 카이사르는 삼두의 하나 크라수스

 

의 죽음과 폼페이우스의 배신을 통한 전쟁의 승리후 이집트 원정 동방 국가 원정 등을 이룩하

 

고 다시 한번의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공화주의자 부르투스에게 암살을 당한다.


어떤 사가들은 카이사르의 등장을 로마 공화정의 종식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또한 마지막 공화정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카이사르는 로마의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과도기를 연 사람이다.

로마의 공화정은 이런 역사를 지녔고, 12표법이라는 성문법을 바탕으로 각종 불문법을 이용

민법 형법 사법등 각종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이라는 개념은 최초 부족의 연장자들의 회의에 모태를 두고 있으며

원래 목축국가 였던 로마는, 외래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또한 변화에 잘 적응하였으며

평민 출신도 귀족으로의 출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강대한 1200년의 제국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는 너무 개방되고 계급의 고착화를 통한 향락 문화를 통해 멸망하지만,...

로마의 공화정은 로마인이 만든 발명품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대 미국 영국등에서 시행하는 상원, 하원의 양원제도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과 민회의 현대

 

판이며, 현재의 법의 대부분은 로마시대의 각종 불문법을 나폴레옹이 집대성한

나폴레옹 법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로마공화정이 지속될수 잇었던것은 외세에 대한 강한 군사력과 귀족 평민의 단결,

트인 사고를 가진 민족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의 특징은 현대의 민주주의 공화국들이 바탕을 둔 민본주의 보다는

참여정치라는 개념이 더 컷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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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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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화학공학 01 이재준 | 작성시간 05.03.16 오늘날 공화국들의 삼권분립이 그 옛날 로마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니 정말 놀랍네요^^
  • 작성자건축97김주현 | 작성시간 05.03.17 진정한 삼권 분립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오늘날 삼권 분립의 시초가 되기는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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