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이 무엇인지는 아시겠죠...
제 생각입니다만, 팜므 파탈이란 용어는 남성의 관점에서 본 여성상이지요.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는, 그럴 줄 알면서도 한번 빠져들면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
그것이 남성들이 보는 팜므 파탈입니다.
남성의 관점에서만 보면 헬레네는 팜므 파탈이 분명합니다. 그녀 한 사람으로 인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남자들, 그리고 몇 개나 되는 나라의 운명이 뒤흔들렸는가만 봐도 충분하죠.
하지만 역사상 팜므 파탈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남성에게 휘둘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한 여성이 대부분이죠. 클레오파트라라든가, 측천무후라든가, 황진이라든가.
그러므로 관점을 여성 자체로 맞추어보면, 적어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헬레네에게는 전혀 주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수시로 남자들에게 납치되었고, 그때마다 오빠들이 구해주었습니다.
나이가 차자 수많은 구혼자가 몰려들었는데,그 중 메넬라오스가 선택된 것이 그녀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의지였는지, 그리스 신화 텍스트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파리스에게 납치 혹은 함께 야반도주한 것도, 그리스 신화에서 보면 아프로디테의 농간이지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트로이 성에 잠입해들어온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를 눈감아준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그녀의 입장을 더욱 불분명하게 합니다. 파리스를 사랑하고 있다면 트로이 편이 되어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이고, 본남편에게 돌아가고 싶다면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와 함께 탈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아테나 여신상을 훔쳐서 달아났는데, 여신상을 들고 달아날 수 있다면 두 다리 달린 여자 하나 더 데리고 가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겠죠. 오디세우스는 지혜롭기로 소문났고, 디오메데스는 손꼽히는 맹장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헬레네는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남편에게 돌아가죠.
이러니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수동적인 여자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녀가 팜므 파탈이라면 그것은 남성들이 그녀의 미모에 반해 제멋대로 파멸하는 것일 뿐, 그녀가 자기 의지로 남자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혹시 모르죠, 아무것도 안 하는 척하면서 실은 모든 상황을 배후조종하는 게 그녀 나름대로의 처세술일지도. 그렇다면 그녀는 가장 소름끼치는 팜므 파탈인 겁니다. )
다음엔 팜므파탈에 관하여 좀도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