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렐리아누스와 성벽
성벽중 로마로 통하는 주요 도로 가운데 하나였던 성문 포르라 라티나의 모습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Lucius Domitius, 215?~275] 는 서기 214년 속주 일리리아의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군인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정치가로서의 안목도 있었다. 그는 기우는 로마제국
의 운명을 조금이라고 늦추기 위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즉,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쌓은 국경 방어용
요새 방벽(llimes)를 포기하고 로마제국 내의 주요 도시는 각자 알아서 스스로 방어하도록 한 것이다. 이
것은 로마제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로마 시 둘레에 높고
긴 벽돌 방벽을 세우는데, 당시 공병들은 모두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민간 건설업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따. 이리하여 서기 217년 로마 시 주변에는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쌓은
성벽의 길이에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장장 19Km의 성벽이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275년에는 어느
정도의 방어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완공이 된것은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프로부스 황
제 때였다. 이 긴 성벽을 불과 4년 만에 세웠다는 것은 야만족의 침입이 임박했던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
었을 것이다.
로마에는 푸리우스 카밀루스 이래 600년 동안 국력이 밖으로만 뻗어나가던 시대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
던 '성벽'이라는 새로운 건축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서양에서는 이와 같은 대규모의 도시 방어용 성벽
은 어느곳에도 없었다. 그런데 서양 '최대'라는 단어와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부끄러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 로마는 이 방벽이 세워짐으로써 수세에 몰린데다가 도시로서 더 이상의 확
장이 금지되는 선고를 받은 셈이 되었다.
서양에서 가장 긴 성벽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긴급한 상황에서 '방어' 라는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면 그
만이었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전쟁 시에 최대한 효과를 발
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건축자재를 절약하기 위하여 기존의 공공건축물,
개인 별장, 고가수로의 일부분, 심지어 케스티우스의 피라미드 묘소와 서민들이 사는 집들고 성벽의 일
부로 편입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이질적인 성벽'은 모두 전체 성벽 길이의 10분의 1정도가 된
다. 성벽을 세우면서 로마 시내에 있는 황제들의 사유지와 주요 공공시설을 최대한으로 보호했다.
일례로 로마 외곽에 있는 카라칼라 목욕장 같은 대규모의 건축물들도 성벽 안에 보호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로마가 포위될 경우 대규모의 건축물이 적의 요새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성벽은 북쭉으로는 현재의 포폴로 광장이 있는 핀치오 성벽까지, 서쪽으로는 테베레 강 너머 쟈니콜
로 언덕까지 방어했다. 성벽의 높이는 6~8m, 두께는 3.5m, 간격마다 망루가 세우졌고, 주요도로가 지나
는 곳에는 성문을 만들었다.
성벽은 세월이 지나며 더욱 보강되었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기존의 방벽이 로마 방어에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 성벽 주위에 돌아가며 깊은 해자를 만들었고, 5세기 초 호노리우스 황제는 고트족의 침입이 점점 피부에 와 닿기 시작하자마자 방벽과 망루를 12m로 높였다.
현재의 모습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는 이와같이기상천외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 방벽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러 번 복원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다시 유린당했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로마의 교통량을 해결하기 위해 곳곳에 방벽이 헐려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연결되어 있어야 할 방벽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잘려 나간 부분도 많다.
출처 : 정태남,<내가 사랑한 로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