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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 게시판

잔다르크에 대해..

작성자곽현희|작성시간05.08.10|조회수294 목록 댓글 3

 

<샤를7세 대관식에서 잔다르크>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일으킨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이다. 역사에서 잔 다르크가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하다. 아마도 프랑스 정치·군사의 역사에서 보다 인간용기의 역사에서 잔은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프랑스의 내란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를레앙의 구출은 분명 빛나는 승리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북부의 일부가 샤를 7세 편에 섰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잔의 사후에도 22년간 더 진행되었으며, 발루아 왕조 재건의 기초가 된 것은 1435년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샤를 7세와 강화를 맺은 사건이었다. 더구나 잔이 내세운 사명의 성격을 두고 역사가·신학자·심리학자 들은 계속 논란을 벌여왔다. 잔의 전투 행적, 그 지지자들과 적들의 동기와 행동 등 셀 수 없는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예를 들면 잔이 보쿨뢰르·시농·푸아티에를 몇 번이나 방문했고 그 날짜는 각각 언제인가, 어떻게 그녀가 시농에서 가진 샤를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바로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는가, 랭스에서의 즉위식 뒤 있었던 샤를의 순회는 개선행진이었는가 아니면 자신 없는 과시용 시위였나, 그녀의 재판관들이 '종심금고형'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가 신앙을 철회한 뒤 다시 남자복장을 한 것은 자신의 뜻이나 '음성'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나온 이야기처럼 잉글랜드인 간수의 강요에 의한 것인가 등이다.

  뒤의 세대들은 잔의 사명이 가지는 의미를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관련해 파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입장에 따라 왜곡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대분열(1378~1417)의 여파와 공의회 운동 기간(1409~49)에 일어난 교황권 실추로 인해 신앙문제에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종교재판의 판결은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영향을 받기 쉬었으며, 당시 변론이 허용되지 않고 감금상태에서 심문을 받았던 피고는 잔 혼자만이 아니었다. 성인으로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혹독한 심문에서 그녀가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와, 자신의 음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입장이 정당하다고 믿는 심오한 확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떻든 잔은 거의 프랑스 북부 출신인 재판인단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은 프랑스 내부투쟁의 희생양으로서, 신조와 파벌을 초월해 국민 모두로부터 공감을 얻은 프랑스 국민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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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법학부 남궁성일 | 작성시간 05.05.23 교수님이 잔다르크 설명할때 뭐라고 하실지 대충 감이 오네요 매일 잠잘 수밖에 없는 사람 잔다~ ㅎㅎㅎㅎ
  • 작성자joucheol | 작성시간 05.05.23 웬 말씀. 자는 다큰 애라고 해석하면 어떨까요
  • 작성자법학부 남궁성일 | 작성시간 05.05.24 다커서 국방에의를 신성히 수행했군요 쟈는 다큰애라 영국이 프랑스를 침공했을때 맞서 싸웠고 어린애들은 숨어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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