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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작성자신일호29|작성시간05.09.24|조회수202 목록 댓글 0
바이킹  

8세기 말부터 11세기 후반 사이에 해상에서 유럽 각지에 침입한 북게르만민족(노르만인)의 별칭. <바이킹>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관용적으로 쓰이지만 <비킹>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뉜다. 이 민족의 이동은 그 무렵 유럽에 침공한 마자르인과 이슬람교도 아랍인과 함께 제 2 의 민족이동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바이킹이 활동한 원인으로는 인구증가로 인한 토지부족, 해외에 신천지를 얻은 족장(族長)의 존재, 원정에 적합한 기후 등을 들 수 있으나 돛을 장비한 하천항행선, 대양항해가 가능한 쾌속군선(快速軍船)의 개발이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대양을 건너 연안에서 주요하천을 따라 내륙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 민첩한 기습전을 벌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활동은 약탈행위에 그치지 않고, 정복·식민·교역·용병(傭兵)으로 다양하게 변화했다. 초기단계에는 전리품 획득을 목적으로 한 여름철 <품팔이>식 원정이었으므로 무방비상태인 교회·수도원을 습격하고 겨울이 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차츰 여러 다른 나라의 하구·연안에서 월동하고, 이곳에서 침입을 되풀이하면서 조직화하여 정착했다. 당시의 유럽 내부의 분열상태는 바이킹의 침입을 쉽게 하였고, 왕후(王侯) 중에는 바이킹의 침공에 바이킹용병으로 대처한 사람도 있어서 그들의 식민에 박차를 가했으며, 잉글랜드의 데인로지방(Dane law;데인인의 법·관습 시행지역), 프랑스의 노르망디공국(公國), 러시아의 노브고로트공국 등의 건설을 보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이런 대외활동은 서유럽 봉건사회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 시대는 북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일기였다. 더욱이 유럽 각지에서의 약탈·교역·식민활동은 덴마크의 헤드비, 스웨덴의 비르카(Birka) 등의 주요 교역지를 발전시키고, 원격지교역을 촉진시켰으며, 또 이 교역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도활동이 이루어져 북유럽은 오딘이나 토르의 신들을 신봉하는 이교사회로부터 점차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로 편입되어 갔다.


1 덴마크계
덴마크에서의 원정은 9세기 초엽, 프랑크왕국 카롤루스대제의 작센족 평정으로 인해서 국경 남부를 위협받은 데인인 고드프레드왕이 프리슬란트를 공격한 데서 시작되었다. 대제 이후의 여러 왕은 연안방비 강화와 함대를 건조하여 이에 대항하였으나 효과는 없었으며 9세기 중엽까지에는, 상업지 도레스타트와 칸트비크·함부르크 등이 약탈, 파괴되었다. 당시 이미 잉글랜드 북동부에 식민하고 있던 부대도 가담하여 마스강 유역과 내륙의 트리어에 도달할 형세였으나, 891년 루뱅에서 아르눌프왕에게 격파되어 패주했다. 한편 820년 이후 노르망디지방에 정착하기 시작한 한 무리는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 845∼889년 사이에 파리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그 결과 샤를 3세(單純王)는 911년 생클레르쉬르에프트조약에서 개종을 조건으로 수장(首長) 롤로를 노르망디공에 봉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급속하게 프랑스화하고, 이후 침입도 그쳤다. 잉글랜드 북동부는 835년 무렵부터 습격을 받아 9세기 중반에는 광범한 식민이 진척되어 이곳으로부터 대륙공세도 실시되었다. 웨식스의 알프레드대왕은 그들의 남하를 저지하고 886년 조약으로 데인로지방을 승인했으나, 대왕이 죽은 후 다시 웨식스왕가의 지배에 들어갔다. 925∼980년은 평온한 시대가 계속되었다. 10세기 말이 되어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와 하랄의 아들 스벤은 994년 잉글랜드를 위협해서 많은 액수의 데인세를 징수하고, 다시 스벤의 아들 크누드(대왕)는 덴마크·노르웨이·잉글랜드 왕이 되어 그리스도교적 <북해제국>을 수립했다(1017∼35). 1066년, 노르망디공 기욤(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에는 침입도 그치고, 이곳에 노르만왕조 봉건국가가 형성되었다.


2 노르웨이계
노르웨이계는 8세기 말에 셰틀랜 드·오크니 두 제도를 기지로 하여 스코틀랜드 와 아일랜드의 연안을 엿보았다. 9세기 초에는 맨섬에 식민하여 아일랜드 침공을 시작하였고, 837년에 투르게이스는 요새도시 더블린을 건설 하고 아일랜드왕이라 자칭했다. 올라프백왕(白 王)이 853년에 건설한 더블린 왕국의 여러 왕은 뒤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데인인과 싸우는 한편 아일랜드 통일을 꾀했으나 1014년 토착부족 왕 브라이언 보루에게 격파당해 쇠퇴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일랜드에 건설한 기지는 후에 교역지로서 발전하였다. 이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노르웨이 올라프 1세·올라프 2세 등의 대규모 원정을 거쳐 하랄 3세(强意王)가 정복을 꾀했으나 1066년 요크셔 스탬포드 다리에서 전사하여, 이것이 잉글랜드 최후의 대공세가 되었다. 프랑크왕국에서는 843년에 루앙이 소실되고 이듬해 베스트팔딩기(Westfaldingi;오슬로 협만의 Vestfald지방 주민들이라는 뜻)가 루아르강 하구 낭트를 약탈하고 소금과 술의 집적지 누아르무티에섬에서 교역에 종사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베리아반도를 우회하여 지중해의 이슬람교도세력과 접촉한 사람도 있었다. 북대서양에서는 페로제도를 거점으로 860년 무렵 아이슬란드가 발견되고, 930년 무렵에 이르러 식민이 완료되었다.


3 스웨덴계
동방에 진출한 것은 주로 스웨덴계이며 그들은 7세기부터 발트해 동쪽 연안으로 진출하고 9세기에는 북러시아의 라도가호수 주변에 정착하여, 드네프르강과 흑해를 건너 비잔틴제국과, 또 볼가강을 따라 카스피해를 건너 이슬람교국과 주로 교역을 하였다. 1112년 무렵, 키예프에서 편찬된 《원초연대기(原初年代記)》에 의하면, 862년 루시(스웨덴인을 가리키는 핀어가 와전된 것)의 수장 류리크는 슬라브인들에게 초빙되어 노브고로트공국을 건설하였고, 그의 부하인 올레크는 882년에 천도하여 드네프르강 중류에 키예프공국을 건설하였다. 10세기에 루시인은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원정을 하여 여러 가지 상업특권을 제국령 내에서 획득하였는데, 두 나라 사이에 맺어진 912년·945년의 통상조약에 서명한 루시인 이름을 비교하면 그들의 급속한 슬라브화의 과정이 판명된다. 그러나 키예프 여러 공작과 올라프 1세·올라프 2세 등 북유럽 여러 왕의 친연관계는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이 시대 키예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용병 또는 황제의 친위대로서 용맹을 떨친 북유럽인을 바랴크라고 하는데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유명하다. 그들을 통해 그리스정교와 비잔틴문화가 러시아와 북유럽에 전해졌다. 한편 9세기 무렵 노브고로트에서 볼가강 중류의 도시 불가르의 큰 시장으로 나아갔고, 게다가 카스피해까지 내려가서 아랍인과 교역관계를 유지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9∼10세기 중엽까지 북러시아와 스웨덴에 아랍은화를 대량으로 유입시켜서 아랍인들은 그들을 루시상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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