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예배장소는 고대의 신전을 본뜬 것이어서는 안되었는데여 왜냐하면, 그 기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고대 신전의 내부는 흔히 신상(神像)을 모셔놓은 작은 성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사나 의식은 건물 밖에서 행해졌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사제(司祭)가 미사를 드릴 높은 제단과 설교할 강단,신자가 한 곳에 모일 넓은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양식(비잔틴)의 예배당들이 지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교회의 내부 장식에 관심을 쏟았습니다.그것은 매우 어렵고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는데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한 가지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는데 그것은 즉, 신의 집에서는 조상(彫像)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열성적인 기독교인들은 조각에는 한결같이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했습니다.회화가 이교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상기하도록 도와주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해 주므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라틴계 사람들은 주로 이러한 견해를 지지했고 6세기 말의 교황인 그레고리우스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마치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그림책이 필요한 것처럼 형상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회 내부장식을 위해 사용된 것은 주로 회화와 모자이크였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모자이크화입니다.
모자이크는 대리석이나 유리,금속,색기와 등의 조각을 모아 붙인 벽이나 천정 등에 그림과 도안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본래 페르시아 지방의 수직물 도안에서 영향를 받은 것인데, 고대 헬라와 애굽 등지에서 시작돼 4세기에는 그리스 로마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고 아우구스투스황제 때는 돌을 박아 만든 로마의 도로에도 기하학적 모양의 장식을 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모자이크를 이용해 교회 내부의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시작된 모자이크화는 발전을 거듭해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의 교회에 보급됐고 특히 스테인드글라스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모자이크는 점차 로마에서 동방으로 옮겨갔고 콘스탄티누스황제 이후 비잔틴 미술의 한 양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기억할만한 것은 교회의 건축과 내부 장식이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감독 하에 진행됐다는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개혁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이와함께 황실의 돈독한 신앙에 바탕을 둔 새 정권의 이상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 :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호노리우스(Honorous)의 이복 누이인
갈라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무덤.
갈라 플라치디아의 마우솔레움 외관
수수한 벽돌집이지만 전체가 모자잌으로 덮인 내부는 영롱하기 그지없습니다.
내부천장
짙푸른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그 한 가운데는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자리잡고, 네 모서리엔 복음사가의 상징이 새겨졌습니다. 즉 복음사가에 의해 떠받들린 하늘의 예수인 것입니다.
목자예수

예수는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의 우아한 자세에, 황금빛 옷을 입고, 두광으로 신성함을 드러내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양들과 정원의 묘사는 고대 미술의 서정성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고대에서 비잔틴도상으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2.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
예수변신

우선 푸른 하늘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나무와 양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서 매우 평면적입니다. 이 모자익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아에게 나타난 예수의 변신과 라벤나의 첫 번째 주교 성 아폴리네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드러내지 않고 밤하늘의 십자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현실의 색과 형태를 최대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의 예수와 네 복음사가

승리의 아치 위에 예수와 함께 새겨진 네 복음사가도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이기 보다 신성한 계시를 신으로부터 받은 네 상징물 즉 사자(마르코), 소(루가), 독수리(요한), 천사(마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3. 초기 성상과 성상파괴운동
-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형상이라는 뜻의 단어로, 비잔틴에서 예수와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종교성이 짙은 특별한 형태로 발달시키면서 '성상'이라는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성상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초상화의 역할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성상 (성 카타리나 수도원)

우리가 초기기독교시대에 본 바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600년이 된 예수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700년경에 제작된 초기의 예수상은 한 손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구원자, 절대권한을 가진 존엄한 자의 모습입니다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모자 양쪽의 성인들은 좌우대칭의 엄격한 자세이지만 그 위의 천사들은 스케치풍의 자유로운 회화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성모자 또한 자세는 정면이지만 눈은 옆을 바라보며, 양쪽 눈과 눈썹이 서로 다른 초상적인 수법을 보여줍니다.
성베드로 성상 (카타리나 수도원)

베드로의 초기 성상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 초상입니다(도18). 얼굴과 몸통에서 볼 수 있는 명암처리에 의한 풍부한 양감은 고대회화의 방식인 반면 황금색의 두광과, 화면위의 메달등은 상징적인 중세회화의 기법입니다.
우주의 지배자 예수(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 )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엔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의 설명은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서 낳고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임을 설명해 줍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 )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는 것이 보이죠?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블라디미르 마돈나(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 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보이죠?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즉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이며,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입니다.
비잔틴에서는 726년 황제의 성상 금지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성상 금지령은 그리스도와 성인, 성모마리아등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운동이고,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의 벽화나 원본 조각상을 볼 수 없는 이유도 이 시기에 모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근거는 '나 이외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성서의 기록인데, 이는 교리적으로는 성상 남용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교황 권한의 확장에 대한 왕권 회복 운동이었습니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게르만 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는데 성상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고 그후, 비잔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갈라져(1054),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편 내부의 분열과 게르만족의 계속된 침입에 쇠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멸망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로마의 옛 땅에 지방왕국을 형성하고 로마문명의 유산을 흡수하고 기독교에 동화되었습니다. 유럽의 중세문화는 추상적이고 초월적 성격의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게르만족의 추상 장식문양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입었습니다.
한마디로 중세유럽의 미술가들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고, 그들은 성서의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고, 현실이란 언제나 덧없고 순간적이라고 생각한 중세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 치 않는 신의 정신을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