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은 페스트의 일종으로 폐에 병균이 침입하는 폐 페스트를 일컫는다. 일단 감염되면 별안간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하고 마는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리었다. 페스트의 발병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져 헛소리를 하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환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삶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 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 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몸뚱이를 채찍질해댔다. 이 사이비 종교 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흑사병은 일시적으로 인구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곧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노동력에 많이 의존을 하고 있던 당시 농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살아 남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보유지를 경작하기에 바빴으며, 공한지(놀리는 땅)가 늘어났다. 영주들은 노동력이 부족하여 그들의 직영지를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강제로 임금을 동결하고 농노 해방을 중지시키는 봉건영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응책은 지위 향상을 꾀하려는 농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으며, 농민 봉기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농민 봉기는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서유럽에서 차츰 농노제가 사라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삶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 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 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몸뚱이를 채찍질해댔다. 이 사이비 종교 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흑사병은 일시적으로 인구의 감소를 가져왔고 이러한 인구의 감소는 곧 노동력의 감소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노동력에 많이 의존을 하고 있던 당시 농업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살아 남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보유지를 경작하기에 바빴으며, 공한지(놀리는 땅)가 늘어났다. 영주들은 노동력이 부족하여 그들의 직영지를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러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강제로 임금을 동결하고 농노 해방을 중지시키는 봉건영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대응책은 지위 향상을 꾀하려는 농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왔으며, 농민 봉기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농민 봉기는 대부분 실패하였지만, 서유럽에서 차츰 농노제가 사라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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