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를 본떠 '교황의 바빌론유수'라고도 한다. 13세기 말부터 세속 권력이 신장하자 프랑스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싸워 아나니 사건(1303)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제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제6대인 우르바누스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였고,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역대의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 교황청 행정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유수 시대는 중세 교황권의 몰락기로 간주하고 있으나 근년의 연구에서는 클레멘스 5세에 의한 교회법, 교회재판 제도의 확립, 제2대 요한 22세에 의한 교황청 재정·징세기구의 재정비 등 근세적 성격의 혁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궁전 건축을 비롯한 미술 면에서의 번영과 휴머니즘 학회의 보호·장려 등의 측면을 인정하여 이 시기를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분열기인 1378년 로마에서 우르바누스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인파(人派)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내세워 또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어 1417년까지 존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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