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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음악 - 부르고뉴 악파

작성자이한나36|작성시간06.01.15|조회수722 목록 댓글 0

부르고뉴(Burgundian ; Burgundy(영)) 악파

 

시대적 배경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음악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13세기를 안전과 통일의 시대라 한다면 14세기는 변화와 다양성의 시대라고 한다. 음악의 세계에 새 공기를 도입함으로써 음악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성향으로 등장한다. 인문주의는 인간을 억제하고 억누르는 중세적인 정신을 타파하고 인간성이 풍부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여 고대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단음율로 된 세속음악이 성행했을 무렵 다른 한편 대위법적인 복 음악이 현저하게 발전했고, 낡은 것에 대한 반항에서 새로운 것이 나왔으며 14C는 변화와 다양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부르고뉴 공작들은 프랑스 왕의 봉건 신하였지만, 그 권력에 있어서는 사실상 동등하였다.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을 통하여 부르고뉴의 공작은 일련의 정략적인 결혼과 외교의 과정을 통하여 100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프랑스의 왕을 압박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여,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북부 프랑스, 로렌, 룩셈부르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토를 획득하였다. 여기에 그들은 1477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독립된 왕국으로써 그 전체를 다스렸다.

  그들의 지정된 수도는 디종이었지만, 그들은 어떤 특정한 도시에 고정적으로 거주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 그들의 영토 내의 여러 곳에서 머물렀다.

 

 15세기 중엽 이후의 부르고뉴 궁정의 주된 순회궤도는 릴르, 브루제, 겐트, 그리고 특히 브뤼셀이었으며, 이 지방들은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동북방에 해당한다. 15세기 말 북방의 주도적인 작곡가들은 거의가 이 근방에서 배출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부르고뉴 궁전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발전 과정

 

  부르고뉴 공작들은 모두 예술과 음악에 대한 헌신적인 후원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위대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른바 교회(chapel)를 유지시켰고, 교회의 의식의 음악을 위하여, 그리고 궁중의 세속적인 여흥에 기여하고자, 그리고 주인들의 여행에 동반시킬 목적으로 일단의 작곡가들과 가수들 그리고 기악 연주자들을 돌보았던 것이다.

 

  1419년부터 1467년까지의 부르고뉴의 공작이었던 선한 필립(Philip the Good)의 궁정과 교회는 유럽에서도 가장 찬연하였으며, 음악의 후원자로서의 그의 영향이 너무나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버어간디안"이라는 이름은 그의 치하에 융성하였던 음악의 양식과 일단의 작곡가들에게 붙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를 자칭하는 것이 아니다. 15세기의 부르고뉴 공작은 일정한 주된 거주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의 통치 지역 안의 여러 곳에서 체재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들의 교회는 15명에서 27명까지의 음악가들을 갖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주로 파리에서 선발되었고 후에는 네델란드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교회와 함께 선한 필립은 일단의 민스트랄들―트럼펫, 비올, 룻트, 하아프, 오르간 연주자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들은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포르투칼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5세기 궁정의 이러한 범세계적인 분위기는 외국 음악가들의 잦은 방문,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한 곳의 봉사에서 다른 곳으로의 봉사로 더 좋은 "조건"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함으로 인하여 더욱 촉진되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음악의 양식도 국제적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부르고뉴의 명망이 높아서, 그곳에서 개발된 음악의 종류가 유럽의 다른 음악의 중심지들, 이를테면 로마교황의 교회, 독일의 황제, 프랑스와 영국의 왕, 다양한 이탈리아의 궁정들 그리고 성당의 합창단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 이들 다른 지역의 음악가들은 한 때는, 또는 언젠가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봉사할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심하였다.

 

음악적 특징

 

 부르고뉴 악파의 작품의 주된 형식들은 미사, 마그니피카트, 모테트, 프랑스 가사를 갖는 세속 샹송들이다. 유행하던 성부의 결합 방식은 프랑스 발라드나 이탈리아 발라타와 같았다. 테노르와 콘트라 테노르는 둘 다 c와 g'사이의 음역 속에서 움직이며, 꼭대기 선율, 또는 디스칸투스(discantus)는 정상적으로는 10도(a에서 c" 또는 c'에서 e")를 넘어가지 않았다. 14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각 성부는 뚜렷한 음색을 갖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는 투명한 짜임새를 갖고, 디스칸투스가 주된 선율로써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이 양식은 포오부르동의 화성 음악적인 산뜻함과, 이따금씩 모방구까지도 포함하는 어느 정도의 선율의 자유와 대위법적인 독립성을 결합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디스칸투스 선은 따뜻하고 감정이 풍부한 서정적인 구절로 흐르다가 중요한 종지형에 접근하면서 우아한 멜리스마로 구분되는 것이다 ―(악보1)

 

<악보 1> 듀페이의 「프랑 뀌르 젠틸」(Franc cure gentilx)

 

 부르고뉴의 종지형식은 아직도 전체적으로는 14세기의 것이었으며(악보 2), 란디니의 장식형도 아주 흔하였다.(악보 3)

 

<악보 2>  14 세기 종지형

< 악보 3 > 란디니 종지형

 

 그러나 이러한 구식형의 종지와 나란히 또 하나의 종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속음·주음 진행의 효과를 가지며, 3성부 서법에 있어서 거의 언제나 아래 두 성부간의 교차음을 갖는 것이었다 ―(악보 4 의 a 와 b)

<악보 4> 듀페이와 뱅슈아의 종지형

 

  이러한 성격을 갖는 화음 진행의 감각이 15세기 전반을 통하여 계속해서 눈에 띄게 증가해 갔다. 그리하여 1460년 경 이후에는 정상적인 종지 형식은 근대적으로 표기하자면 V-Ⅰ로 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작곡가들은 오늘날의 이 용어가 갖는 의미에서의 그러한 진행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16세기 중반이전까지의 이론가들은 조 기능의 화음 진행은 물론이거니와 개체로써의 3화음마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단위는 화음이 아니라 성부간의 음정차였다. 그러니까 <악보4>의 a와 b의 베이스와 <악보4>의 c와 d의 베이스와 알토는 "부가" 성부로써, 소프라노 테노르의 기본적인 뼈대 --- 여기서는(<악보 2> 의 종지형에 있어서와 같이)규칙에 따라 불완전 음정(6도)에서 완전음정(8도)으로 움직이고 있다 --- 의 음정 진행 속에 포함되며, 수직 구조만을 채우는 것이 된다.

 

  부르고뉴 악파 작품들의 대개의 작품들이 어떤 형태의 3박자로 되어 있었으며, ♩♩♩과  ♪♪♪  ♪♪♪ 형태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교차 리듬이 흔히 쓰였다. <악보 4>의 b와 d를 보라. 2박자가 사용되는 것은 주로 긴 작품에 있어서 단락을 지을 때 대조를 위한 것이었다.

 

  15세기에 있어서 샹송(chanson)이란 세속적인 시에 붙인 다성음악 곡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부르고뉴의 샹송은 실제 효과로는 반주 있는 독창 노래였다. 그 가사들은 론도의 형태인 때가 가장 많았으며, 흔히 두 줄 후렴이 있는 전통적인 형식이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네 줄로 된 확대된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샹송은 부르고뉴 악파의 가장 특징적인 산물이었다. 이것이 개발된 주된 중심지는 바로 부르고뉴 궁정이었으며, 이 분야의 대표되는 대가는 질르 벵쇼아였다.

 

 교회 음악에 있어서 부르고뉴 작곡가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뚜렷한 종교적인 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하였지만, 샹송의 방식으로, 모테트와 미사를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보통의 3성부 짜임에 있어서 테노르와 콘트라 테노르가 받쳐 주는 위에서 꼭대기의 독창 성부가 자유스러운 선율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꼭대기 성부는 새로 작곡된 수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그레고리안 성가를 장식한 것이었다. 의전적인 칸투스 파르무스를 사용하는 방식은 13세기와 14세기 모테트에서 사용된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 때에는 의전적인 선율은 구조에 있어서의 비밀스런 뼈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것이 있기만 하면 되었지, 그것이 리듬에 있어서 얼마나 일그러졌는지, 듣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지는 상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부르고뉴 모테트에 있어서는 이와는 반대로, 그레고리안 성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쓰여졌다. 그것은 전통과의 상징적인 연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분을 이루는 확실한 음악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부르고뉴 시대의 작곡가들이 처음으로 특별히 발전시킨 종교음악 양식은 미사에 붙인 곡으로써,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 세기의 말에 이르러 이 형식을 작곡가들의 사상과 노력을 전달하는 중요 수단으로 만들게 하는 변혁의 시발점이 되어 주었다. 이미 1420년경부터 일상의 여러 부분이 각각 따로 떨어진 악곡으로써 작곡되고 있었으며, 이따금씩 이렇게 따로 떨어진 곡들은 편집자에 의해 합쳐져서 통일된 곡이 되기도 하였다.

 

출처 : http://home.hanmir.com/~nenny/western/med3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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