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앙리 4세의 수많은 애인들 가운데 그가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유일한 여자였다. 피카르디 출신으로 보포르 공작부인을 제수 받은 가브리엘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성품은 약간 잔인한 데가 있었다고 하며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앞두고 자간으로 사망했다. 항간에는 왕비였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독살이라는 설이 유포되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방돔 공작 세자르, 몰타 대 수도원장 알렉상드르, 엘뵈프 공작부인)
1598년 앙리 4세는 장자 방돔 공작 세자르를 로렌 가문의 일족인 메르쾨르 공작의 딸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세자르는 4살, 프랑수아즈는 6살이었다. 메르쾨르 공작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브르타뉴를 세자르에게 넘겨주라는 요구는 불만족스러웠지만 당시 왕이 가브리엘과 결혼하려 했었기 때문에 딸을 왕비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결혼식 며칠 전에 죽고 말았고, 세자르 드 방돔은 서자로 전락했다. 따라서 메르쾨르 가에서는 프랑수아즈를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얼마 후 메르쾨르 공작은 전사했으나 그의 부인인 마리 드 뤽상부르는 딸을 방돔 부인으로 만드느니 카푸친 수도회에 보내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토록 강경했던 그녀도 결국 가주 로렌 공작의 뜻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 공작은 앙리 4세의 누이인 카트린 드 부르봉과 결혼했으나 상처했다. 따라서 로렌 가는 다시 앙리 4세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세자르 드 방돔은 1607년 7월 5일 결혼했으며 그들 사이에 메르쾨르 공작이자 후에 아버지 사후 방돔 공작을 물려받은 루이 드 방돔, 보포르 공작 프랑수아 드 방돔, 느무르 공작부인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루이는 마자랭의 질녀인 로라 만치니와 결혼해 아들 루이 조제프와 필립을 두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지만, 마리에 대해서는 좋은 평이 거의 없다. 마리는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와 오스트리아 인 대공비 요안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의 누이이며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이자 칼 5세의 조카) 의 딸이었으며 토스카나 초대 대공 코지모 1세의 손녀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 1세는 국정보다 과학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결혼 전부터 베네치아 여인인 비앙카 카펠로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아내인 요안나는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에 동정을 받기는 했으나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상대와 결혼했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거만한 오스트리아 인" 이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결혼한지 13년 만에 요안나가 죽자 프랑체스코는 비앙카 카펠로와 재혼했다. 그러나 9년 뒤 두 사람은 열한시간 간격으로 함께 사망했고
프란체스코의 동생인 페르디난도가 뒤를 이었다. 페르디난도는 대공위 계승자였던데다가 바앙카를 격렬하게 미워했으므로 항간에는 그가 두사람을 독살했다는 설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부검 결과 독살은 아니었고, 오늘날의 사가들도 대체로 자연사로 인정한다.
페르디난도는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르도록 많은 지원을 해주었는데, 앙리와 친분을 돈독히 하려는 페르디난도의 생각과, 페르디난도에게 진 막대한 부채를 경감시켜보려는 앙리의 생각이 일치해 1600년 페르디난도는 조카딸인 마리아를 앙리 4세에게 시집보냈다. 카트린의 지참금도 엄청났지만 마리아의 것은 그것을 능가하여 역대 프랑스 왕비들 중 최고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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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그다지 지혜롭지 못한 여성이었으나 그녀의 금발과 크림 같이 흰 피부색은 앙리를 매혹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앙리의 바람기는 이미 잘 알려진 것이었고 마리는 그런 것을 그냥 보아 넘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리는 자신의 아이들과 앙리의 서자들이 함께 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했고, 앙리는 마리에게 서자들을 "내 아들아" 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싸움이 있었고 쉴리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는 화가 나면 거의 왕을 후려칠 기세였다고 한다. 명분에서는 항상 마리가 앞섰지만 그녀는 효과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나 왕과 극도의 파탄지경까지 갔던 마르그리트와는 달리 마리는 앙리를 정말로 사랑했다. 리슐리외에 의하면 마리는 앙리 4세의 사망 후 왕이 살아계실 때를 자주 즐겁게 회고하곤 했다고 한다. 왕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루이 13세, 왕제 가스통 도를레앙, 에스파냐 펠리페 4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 영국의 찰스 1세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 사보이 공작부인 크리스틴이 그들이다.
앙리의 사망 후 마리는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분골쇄신했던 카트린과는 달리 (카트린을 좋게 보지 않았던 학자들도 이것은 인정한다.) 유모의 딸인 레오노라 갈리가이와 그녀의 남편 콘치니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그들의 횡포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외국인에 대한 파리 시민의 미움은 극도로 강화되었다. 결국 루이 13세의 친정 선포와 함께 마리는 블루아에 유폐되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썼던 그 방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곧 블루아를 탈출하여 대귀족들과 연합하여 국왕에 대항했다. 하지만 패배하고 아들에게 용서를 빌어 다시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로도 둘째 아들 가스통 도를레앙과 며느리 안 도트리슈와 함께 국왕에 대한 음모를 계속 꾸몄고, 결국 스스로 키워냈던 리슐리외에게 밀려나 「속은 자(뒤프)의 날」을 겪고 국외로 추방되고 말았다.
추방된 마리는 네덜란드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로 남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딸인 영국의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메리(앙리에트 마리)에게 의탁했으나 그녀도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카트린의 자녀들보다 마리의 자녀들은 어머니를 덜 사랑했던 듯 싶다. 자기 아들에게 군대를 들이댄 마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지만 말이다. 딸에게도 버림받은 마리는 앤트워프로 갔으나 프랑스 왕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앤트워프 시의회는 그녀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했다.
마리가 마지막으로 머무른 곳은 쾰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리는 그곳에서 과거에 자기가 후원했던 화가 피터 폴 루벤스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게 되었다. 왕비였던 시절 마리가 루벤스에게 주문한 마리의 일생을 그린 24점의 연작은 당시 그녀가 건설한 뤽상부르 궁전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의뢰자인 마리는 왕비의 지위를 잃고 떠돌이 가난뱅이로 전락했고, 유명한 화가이자 외교관이었던 루벤스는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뒤 루벤스는 마리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부양했고, 마리는 1642년 불행한 삶을 마쳤다.
본명은 가스통 장 바티스 도를레앙.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치의 셋째아들로 퐁텐블로에서 태어났다. 1626년 공작 작위를 받고 마리 드 몽팡시에와 결혼, 부르봉 오를레앙 가 제3가계의 시조가 되었다. 평생을 모후가 꾸민 온갖 음모에 가담하여 리슐리외 대주교 및 마자랭 추기경과 대립하고, 딸 그랑 마드무아젤과 콩드 장군과 함께 프롱드 당의 반란에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심약하고 줏대가 없어 항상 음모사건을 실패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레오노라 갈리가이는 마리의 유모의 딸이었다. 그녀는 콘치니라는 한 건달과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도 수행원으로 마리를 따라왔다. 앙리 4세 사후 아내와 함께 마리의 총애를 받으며 앙크르 후작(Marquis d'Ancre)이 되어 고문으로 행세하면서 사실상 재상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능과 독재는 프랑스 귀족과 시민들, 그리고 특히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기 시작하고 있던 국왕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결국 1617년 4월 26일 콘치니가 루브르 궁에 깊숙이 들어왔을 때 근위대장 비트리 후작이 그를 체포했다. 콘치니가 반항하자 비트리는 권총을 발사해 그를 죽였다. 궁 밖에서는 흥분한 파리 시민들이 그 이탈리아 인에게 분노를 폭발시켰고 콘치니의 시체는 끔찍하게 훼손되었다. 또한 고등법원은 레오노라 갈리가이를 마녀로 판정해 화형시켰다.
루이 13세는 콘치니의 재산을 몰수해 륀에게 주었는데, 이때 마리 드 메디시스의 사촌인 토스카나 대공 코지모 2세는 콘치니의 아들의 권리를 옹호해 프랑스 궁정이 취한 그의 재산 몰수 조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으며 살해된 자의 아들에게 그 재산을 상속하게 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대립으로 두 나라 사이에는 악감정이 조성되고 상호 보복이 잇따랐는데, 이러한 상황은 대공 어머니 크리스틴 드 로렌의 가문인 로렌의 공작이 중재에 나서서 간신히 가라앉았다.
궁내부 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루이 13세의 사냥친구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콘치니를 살해하도록 선동하였으며 그의 사후 대신이 되었다. 그는 노르망디와 피카르디 지사로서 앙크르 후작을 제수받았다. 그가 궁내부 대신이 된 것은 1621년이었으며, 마리 드 메디시스의 후원 하에 귀족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앙굴렘 협정(1619)과 앙제 협정(1620)을 중재하여 루이 13세와 그의 모후를 화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621년 신교도들과의 전투 중 성홍열로 사망했다. 왕은 그다지 슬퍼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의 집권기는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나 그는 국제정치에 관한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해 어려움을 심화시키기만 했다. 그러한 잘못은 그의 사후 집권한 리슐리외에 의해 해소되게 된다.
파리 출생. 지금의 앙드르 에 루아르현에 영지를 가진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5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1606년 서부 해안의 뤼송 주교로 임명되었다. 1614년 전국 삼부회에서 열변을 토하여 루이 13세의 모후이며 섭정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눈에 들어 그녀를 섬겼다. 2년 후 왕실 고문관으로 있었으나 루이 13세의 친정과 함께 궁정을 쫓겨나(1617) 아비뇽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최초의 저서 《교리문답》을 썼다.
왕에게 저항 중인 모후 마리의 초청을 받아 측근으로서 각지에 전전하는 한편 화평을 위한 조정에 힘썼다. 1624년 궁정 복귀가 허용되어 왕의 고문관으로서 루이 13세의 신용과 신뢰를 얻었다. 1627년 왕과 협력하여 라로셸에 근거를 둔 신교도의 반란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왕과의 긴밀한 관계는 옛 은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다. 마리는 왕의 동생인 가스통과 마리약 형제 등 경건파(친 에스파냐 가톨릭) 고문관과 함께 부국강병·적극외교를 주장하는 리슐리외와 대립하였다. 왕권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야망을 가진 왕족 ·대귀족들은 모후인 마리편을 들었다. 1630년 11월 그들은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왕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것을 ‘뒤프(속은 사람들)의 날’이라고 한다. 그 후 리슐리외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되었고, 그는 왕으로부터 재상의 지위를 인정받아 책임관료제를 수립하고, 왕권의 위력이 전국에 스며들게 하였다.
1630년부터 합스부르크가와 직접적으로 대치하지 않은 채 「숨은 전쟁」의 전술을 견지하던 리슐리외는 30년 전쟁에서 신교파의 전황이 악화되자 1635년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에스파냐와 대치하였다. 이듬해 프랑스는 에스파냐 육군의 침입을 받아 한때 파리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으나, 적을 국경선에서 저지시켜 곧 반격전을 폈다. 1642년 루이 14세가 에스파냐의 지중해 연안 르루숑 지방을 제압하기 위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을 때 리슐리외도 동행하였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파리로 되돌아와서 12월에 죽었다.
리슐리외가 추구한 것은 단 하나, 「대 프랑스의 영광」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강대하게 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나의 첫째 목표는 국왕의 존엄성 확립이고 둘째는 왕국의 위대성 유지이다." 라는 그의 말에서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그 자신의 개인적인 영광의 추구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가에게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대 프랑스의 영광이란 유럽의 정복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국경을 확정하고, 합스부르크 가의 팽창을 견제하여 프랑스가 독립을 침해받지 않고 유럽에서 강한 국가로 남는 것이 그의 바램이었다. 사실 당시 에스파냐와 친하게 지냈더라면, 30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고 합스부르크는 명실상부하게 전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외교정책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외교의 기본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는 아주 잘 맞는 정치적 파트너였다. 루이 13세를 무능한 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오늘날은 대부분 그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루이 13세는 평소에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국정을 리슐리외에게 맡겨놓고 방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보고서 하나하나를 모두 읽어보고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또한 리슐리외가 내정을 돌보는 동안 수많은 전투들을 몸소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두 사람은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면서도 신임했던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안 도트리슈 (1601.9.22 ∼ 1666.1.20)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3세의 장녀이자 프랑스의 왕비. '유럽에서 가장 손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렸다. 1615년에 루이 13세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당시 여자에겐 아무 관심도 없었고 륀이 손을 잡아끌어 왕비의 방에 넣어주어 겨우 동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과 왕비의 사이는 그 뒤로도 계속 좋지 않았다. 왕은 왕비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시녀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이 점은 자신의 왕비 이외의 모든 여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아들 루이 14세와 조금은 닮은 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는 루이 14세의 아내인 마리 테레즈와는 달랐다. 안은 젊은 시절 버킹엄 공작과의 열애 사건을 일으켜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소재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루이 13세와 리슐리외가 살아있는 동안 모후·왕제와 더불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거의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에스파냐 인인 양 행동했다. 레몬즙으로 쓴 비밀편지가 슈브뢰즈 공작부인을 통해서 에스파냐와 프랑스를 넘나들었고, 안은 스파이 노릇을 했다. 그녀가 직접 후원한 「발 드 그라스」 같은 수녀원은 그러한 비밀스런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세기에 대법관이 비밀편지를 빼앗기 위해 그녀의 코르사주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안과 리슐리외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싫어했다. 그러나 결혼한 지 22년 만에 루이 14세가 태어났고, 그 뒤로는 프랑스에 대한 배신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왕의 유언을 파리 고등법원에서 파기시키고, 섭정으로서 전권을 장악하였다. 재상에 마자랭을 앉히고 그와 협력해서 프롱드의 난(1648∼1653)을 극복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의 길을 터 주었다. 그녀와 마자랭의 관계는 단순한 모후와 측근 재상의 관계는 아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항간에는 마자랭이 안 도트리슈의 비밀남편이라고 하는 설도 떠돌았다. 어쨌든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에는 보통 이상의 친밀감이 담겨있고, 왕을 사랑하지 않았던 안이 마자랭에게서 행복을 찾았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과 모성애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지, 안은 섭정 기간 동안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조국 에스파냐와 전쟁을 불사했고 1659년 피레네 조약을 맺어 1660년 그녀의 조카딸이자 며느리가 될 에스파냐 공주 마리 테레즈와 아들 루이 14세와 결혼을 성사시켰다. 안은 마리 테레즈와 매우 사이가 좋았고, 마리 테레즈도 그녀를 제 2의 어머니로 생각했다. 1661년 마자랭이 죽자 정계를 떠나 자기가 세운 발 드 그라스 수녀원으로 은퇴하였으나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루브르로 옮겨졌다. 그녀가 유언장을 작성할 때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부터 갖고 싶었던 진주들이
왕제 필립 도를레앙의 딸인 마리 루이즈에게 넘어갈까봐 안달을 하면서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까지 그 보석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그러자 모후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깃든 다이아몬드 목걸이, 즉 버킹엄 공작과의 연애사건을 상징하는 그 유명한 목걸이를 왕제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1666년 1월 20일 결국 숨을 거두었다.
만약 안 도트리슈가 일찍 후사를 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에스파냐의 편을 들어 프랑스에 대한 반역행위를 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루이 14세의 즉위 이후 섭정으로서의 그녀의 통치는 그녀가 아들에게 강대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안 도트리슈의 반역행위는 루이 13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녀에게 프랑스의 왕비이자 미래의 모후라는 자각을 심어주지 못한 것은 루이 13세의 홀대 때문이기 때문이다.
슈브뢰즈 공작부인 마리 드 로앙은 샤를 알베르 드 륀과 결혼했으나 곧 미망인이 되었고, 그후 20여년 동안 안 도트리슈의 측근으로 지냈다. 국왕과 추기경에 대한 많은 음모를 주도했으며 샬레의 음모 이후 추방당했으나 안 도트리슈와 계속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에스파냐와의 연락책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는 섭정이 된 이후 그녀의 추방을 풀긴 하였으나 궁정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왕비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브뢰즈 공작부인은 왕비와 관련된 모든 일에 관여했기 때문에 과거 버킹엄 공작과의 열애 사건, 생 마르스와 함께 했던 음모사건 등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왕비에게 위험요소가 되었다. 안 도트리슈와 마자랭은 그녀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 슈브뢰즈 유역에 있는 당피에르 성을 재건하러 보냈다. 그것은 사실상의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왕비와 마자랭에게 원한을 품은 그녀는 보포르 공작이 관련된 1643년 마자랭의 암살 사건에 관여하였고 실패하여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끈질기게 포기하기 않고 프롱드의 난에서도 반국왕파에 끼어 들어 미래의 레 추기경인 폴 드 공디에게 자기 딸을 정부로 주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음모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리 드 오트포르
왕비와 최악의 관계를 유지하던 루이 13세는 1630년 왕비의 의상담당시녀인 마리 드 오트포르 양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은 육체적인 관계를 경멸했고 남녀관계에 소심했다. 왕비의 침실에 처음 들어갈 때도 륀이 손을 잡고 겨우 들여보냈을 정도였다. 모트빌 부인은 "오트포르 양에게 들어보니, 국왕은 그녀에게 사냥개들과 새들, 사냥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고 한다. 오트포르 양은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왕이 자신을 유혹하려 하면서도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더라며 비웃었다." 라고 말했다. 또한 몽팡시에 부인은 왕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우울증이었다. 국왕은 그렇게 슬픔에 잠겨있는 동안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이 오트포르 양에게 했던 말과 그녀가 했던 대답들을 적으면서 보냈다. 왕이 죽은 후에 그의 개인 금고 속에서 그가 애인들과 벌였던 모든 말다툼의 기록을 찾아냈으니 정말 굉장한 일이다." 라고 했다.
마리에 대한 국왕의 사랑은 5년이나 지속되었지만 마리는 국왕을 사랑하지 않고 항상 도도하게 대했다. 좌절한 루이의 마음은 역시 왕비의 시녀인 루이즈 드 라 파예트 양에게로 옮겨갔다. 마리는 나중에 숌베르크 장군과 결혼하여 알뤼엥 공작부인이 되었다.
마리 루이즈 드 라 파예트 (1615 ~ 1665)
1630년 안 도트리슈의 시녀로 들어간 갈색머리를 가진 마리 루이즈 드 라 파예트는 왕이 두 번째로 열중했던 여인이자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1635년 루이 13세는 난생 처음으로 한 여인과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루이즈는 국왕의 슬픔이 측은하여 그를 감싸주고 싶었고 그것은 나중에 사랑으로 발전했다. 2년을 기다린 루이 13세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여인' 이 되어 달라고 루이즈에게 부탁했다. 왕이 이런 말을 한 상대는 루이즈 뿐이었다. 그러나 루이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당시 추기경에 대한 어떤 음모 사건에 이름이 거론되어 있었다. 따라서 루이즈 자신이 아무리 국왕을 사랑할지라도 그녀는 국왕의 정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국왕의 간청을 거절하고 1637년 5월 19일 생 탕투안 가의 비지타시옹 생트 마리 수녀원으로 향했다. 때마침 그때 안 도트리슈의 숙부인 페르디난트 2세 황제가 사망해 궁정은 검은 상복을 입었다. 그것은 수녀원으로 떠나는 루이즈의 슬픔과 연민을 가중시켰다.
"오오, 그를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 라는 말이 루이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국왕은 고통을 참지 못한 채 눈물을 억누르며 말에 뛰어 올라 베르사유로 떠났다. 루이즈 드 라 파예트는 이후 루이즈 앙젤리크 수녀라는 이름으로 비지타시옹 수녀원에서 생을 보냈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그 후로도 그녀를 잊지 않고 자주 찾아와 보았다고 한다. 1657년 사망할 때까지 루이즈는 비지타시옹 수녀원의 원장 자리에 있었다.
앙리 데피아 드 생 마르스
아메리카 대륙과 투렌에 땅을 가지고 있던 에피아 장군의 아들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긴 했으나 그 아버지 덕에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투렌 지역 법관이자 부르봉 왕조 대리인에 친위대 대위까지 역임했다. 리슐리외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했으나 그 뒤 루이 13세의 사랑을 받게 되어 방종한 행동을 일삼았다. 루이 13세는 항상 조각상처럼 그를 감상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고 한다. 스무살에 왕실 마사대감이 된 그는 마리옹 드 로르므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으나 후에 망투 공주이자 느베르 공작의 딸인 마리 드 공자그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공작의 지위와 리슐리외의 자리를 요구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왕제, 왕비와 리슐리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루이 다스타락 드 퐁트라이유, 프랑수아 오귀스트 드 투 등 다수)과 함께 에스파냐와 손잡고 리슐리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 내용은 추기경의 살해를 추진하고 프랑스 북부와 동부와 남부에서 획득한 모든 지역을 에스파냐에게 헌납하며 왕비가 섭정 모후가 되어(루이 13세가 곧 사망하리라는 가정 하에) 왕제의 지원을 받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생 마르스는 재상이 되어 마리 드 공자그와 결혼하고 이제껏 추방된 모든 망명객들이 소환되어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리슐리외의 밀정들에게 발각되었고 왕제와 왕비는 다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다. 생 마르스와 투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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