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일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서 일하던 시절 피렌체의 정세는 크게 바뀌였다. 1498년 사보나롤라가 체포되어 종교재판소에서 이단 판결을 받고 공개 처형 된 후 그 곳에는 새로운 중앙 의회인 대회의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각계각층의 요구를 두루 만족시키기 위한 절충적인 정치기구였다. 이를 피렌체의 귀족들은 베네치아의 대회의처럼 귀족적인 기구로 여겼으며 그보다 신분이 낮은 많은 가문들은 대중적인 의회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회의의 구성원은 무려 3천여명이었고 그 가운데는 공직을 맡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기에 대체로 후자의 성격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잇다. 실제로 전통 귀족 가문의 후예들은 새 정치 기구의 지지자들을 경멸했다.
메디치 가문은 나중에 이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어 권좌에 복귀하게 되지만 피렌체는 워낙 복잡해서 어느 집단이 분명한 우세를 보일 수 없었고 그 다툼을 단순히 계급투쟁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1502년 11월 1일에는 정치제도가 다시 바뀌어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라는 종신직의 국가 수반직이 만들어졌다.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된 피에로 소리데니는 귀족가문의 대공으로 대중적인 정치에 관심이 컸다. 이 신생 공화국은 외교 정책에 관한 협정을 통해 어느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피렌체는 1503년에 죽은 피에로 데 메디치가 생전에 출범시킨 세 차례의 원정을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인 체사레 보르자는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를 건설하려는 야심에서 잠재적인 때로는 현실적인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또한 피렌체는 반란을 일으킨 피사를 정복하기 위해 매년 군사 원정을 감행했고 프랑스왕과 지속적인 동맹을 맺고 있었다.
예전의 세력을 복구하려면 피사를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황과 밀고당기는 정책이 필요했다. 미켈란젤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1501년부터 1505년까지 정치의 영향을 다방면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피렌체 시를 찬양하는 작품도 제작했고 프랑스에 보내는 외교적 선물을 제작하는 의뢰도 받았으며 심지어 이 시기의 말기에는 소데리니 정권과 교황 율리우스2세의 관계에서 작은 협상 도구가 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미켈란젤로의 모든 작품 가운데 [다비드]는 공화국의 이념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1504년 이 4미터 높이의 대형 대리석상은 정부와 소데리니 곤팔로니에레의 관저가 있는 베키오 궁전의 정면에 설치되었다. 그로 인해 원래 그곳에 있던 도나텔로의 청동상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이 군상은 메디치가로부터 공화국 정부가 압류한 작품이었으므로 독재의 몰락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었다. (도나텔로의 청동상 [다비드]도 메디치가에서 압수되어 궁전의 안뜰로 옮겨졌었다.) 오늘날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복제한 작품이 그 자리에 있어 피렌체의 정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좌]도나텔로의[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우]다비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하지만 이 조각상은 원래 오페라 즉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의 예술품위원회가 의뢰한 것이었다. 이 기구는 양모 길드의 거물급 대표자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에게 성당의 작업장에서 오랫동안 노출되어있던 커다란 미완성 대리석상을 완성하는 일을 맡겼다. 부분적으로 조각이 되어있기는 했으나 이렇게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는 야심찬 예술가에게 매력적인 재료였다. 그러나 이 돌덩이 자체의 역사에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 돌덩이가 생겨난 시기는 미켈란젤로가 태어나기 10년전이었다. 대성당측에서 볼 때 그 커다란 카라라 대리석은 상당한 재정적 투자였다 1466년 조각가 아고스티노 델 두초는 그것을 재료로 예언자의 상을 조각해서 한 해 전에 완성된 테라코타작품 [헤라클레스]와 짝을 이루어 대성당의 한 부벽에 설치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고스티노는 원래 네 개의 대리석 재료로 한 인물을 만들 계획이었다가 그 대신 가장 큰 석재로 인물상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는 곧 작업에 어려움을 가져왓다. 이미 카라라 채석장에서 원래의 디자인에 맞춰 석재를 다듬어 놓았기 때문이었다.결국 계획은 포기되었는데 성당측의 기록에는 단지 그 석재가 잘못 다듬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고만 되어있다. 1497년에도 인물상을 완성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1501년 7월 성당 관리들은 대충 조각된 그 석상에 처음으로 [다비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똑바로 세워놓은 뒤 '이런 작품에 경험을 가진 거장들'에게 자문을 구하고자 했다. 물론 거기에는 경쟁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8월 16일에 그 돌덩이는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졌고 9월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2년내에 완성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혔다. 미켈란젤로가 그 작업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로마에서 [피에타]가 거둔 성공이 힘을 실어주었을터이다. 하지만 콘디비는 또 다른 이유를 든다 조각가 안드레아 산소비노는 그 대리석에 새 대리석을 붙여 인물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대성당 위원들은 그 계획에 동의하기 전에 미켈란젤로와 협상했고 그는 그 석재만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던 것이다.
돈이 덜 든다는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이 상이 거의다 완성되었을 즈음 갑작스레 이 작품을 놓아둘 곳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주관하는 위원회는 기술적 전문가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안드레아 산소비노 같은 조각가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화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 같은 건축가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회가 왜 조직되었는가에 대한 것은 확실히 전해오는 바가 없다. 그 당시에도 확실치 않았는지 초청되었던 사람들 중 프란체스코 몬차토라는 목각사는 그러한 위원회에 대해 "뭐든 만들어진 것에는 목적이 있을게 아니오 벽기둥이나 부벽 꼭대기에 설치될 예정이었다는데 왜 이런 회의가 조직되었는지 난 알수가 없소"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작품인 다비드 상이 예상을 뛰어넘는 대작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놓자는 의견이 나왔을 수 있다는 설은 있으나 그러한 미학적 고려 때문에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회의록을 보면 도나텔로의 [유딧]이 있던 궁전 앞이나 안뜰 혹은 공식행사가 자주 열리는 인근의 로지아 데이 란치 (로지아는 한 면에만 벽이 있는 복도 모양의 방)
에 차양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전시하자는 주장이 있다. 이 세장소를 보아 다비드는 공화국의 잠재적인 상징으로 간주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결국 국가적인 이유로 다비드 상은 베키오 궁전 앞에 설치되었다.
사실 다비드는 그 광장에 놓이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원래 올려다 보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수평보다 약간 높게 바라볼 경우에는 과도하게 큰 머리와 손이 너무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고전적 조각상의 기준에서 보면 비례가 잘못된 다비드를 감탄하는 사람이나 비방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한 젊은이 혹은 흔히 말하듯 한 애송이의 자연주의적 표현이라는 평가를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아가 사방이 트인 공간에 설치될 경우 작품의 각 면은 마치 부조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러 각도에서 보면 조각상의 얄팍한 면모가 어딘지 편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설치할 장소가 합의된 뒤에 최종마무리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추측컨데 작품의 대부분은 손질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조각상의 얼굴을 촬여한 사진 -특히 비계(건설현장에서 쓰는 가설 발판)를 타고 다비드의 머리와 똑같은 높이에서 찍은 것을 보면 아래에서 볼 때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보이는 얼굴이 실은 상당히 찌푸린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면으로 보는 것은 계산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두 눈의 빈 동공 속에 남아있는 삼각형의 밝은 부분은 아주 늦게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존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중에서도 독특한 광택을 자랑하는 이 그림같은 조각상은 만약 너무 높이 설치되었더라면 의미를 판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뒷면은 작품을 재배치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앞면과 어울리도록 만들어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른 조각상들의 뒷면은 벽감속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정밀하게 조각하지 않는게 보통이다. 다윗의 투석기는 그물무늬의 음영이 새겨져 있어 거의 매끄럽게 처리된 대리석의 피부와 구별된다. 이 좁은 띠는 인물이 누구인지 확신 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이다. 흔히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와 칼을 지닌 모습으로 그려진다. 만약 조각상이 성당 안의 어딘가에 놓여졌더라면 투석기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조각상이 기단위에 세워진 직후에 끈과 그것을 지지하는 나무 조각에는 금이 입혀졌는데 당시에 이 젊은 전사는 금을 두른 화관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다빈치 상을 정면에서 찍은 것 현재 베키오 궁전 밖에 있는 다비드 상.(복제품)
예술품의 의미는 예술가만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재창조된다. 공교롭게도 다비드가 설치된 그 달에 피렌체는 피사를 향해 새 원정군을 파견했으므로 그 장소가 강조하는 정치적 의미는 일관적이지 않았다. 다윗이 블레셋 전사를 쓰러뜨리기 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그 젊은이를 승리의 표상이라기 보다는 준비의 표상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하지만 다비드는 거상이었다. 거인 골리앗을 죽인 인물이 거인으로 불린 셈이지만 미켈란젤로의 동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일 기간테(거인)이라 불렀다. 그런 크기의 대리석상은 고대의 신화화된 힘을 연상시켰고 피렌제에게 고대 로마의 힘을 부여하는 듯이 여겨졌다.
사보나롤라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자 종교개혁가. 민주정치와 신재정치(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 했으나 교회 내부개혁에 과격한 방법을 취함으로써 크게 반감을 샀다. 프란체스코회와의 대치끝에 화형당함)
메디치 家: 이탈리아의 명가. 로렌초 데 메디치 때가 전성기. 금융업을 중심으로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