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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게시판

엘리자베스 여왕..

작성자과교04오현정|작성시간05.07.27|조회수346 목록 댓글 0



[없는 사진 같아서 올립니다.]

 

 

 

 

 

 

엘리자베스 1세

 

-一世 Elizabeth Ⅰ 1533∼1603 영국 튜더왕조 제5대 여왕(1558∼1603). 그리니치 출생.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어스컴에게 그리스 ·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에스파냐 왕 펠리페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체제수립기(즉위시∼1572년)〕

1559년의 <국왕지상법(國王至上法)>과 <예배통일법>으로 부왕이 수립한 잉글랜드교회를 재건하고 중도주의를 취했다. 63년에는 <39개조>를 제정·공포하여 국교회의 교의적(敎義的) 입장을 밝혔다.
외교면에서는 메리 여왕 이래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결지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자의 선동으로 일어난 반란에 무력개입하여 에든버러조악을 성립시킴으로써 프랑스세력을 일소하고 브리튼섬 통일의 기초를 쌓았다. 내정면에서도 1560년에 은화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63년에는 <인클로저 단속법> <직인법(職人法)> <구빈법>을 제정, 과격한 변혁을 억제하고 경제·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 69년에는 <북방 여러 백작의 반란>이 일어나 엘리자베스체제에 대한 공공연한 적의를 드러내었다. 70년 2월에는 결국 여왕에 대한 파문장이 공표되었고, 이를 틈타 리돌피의 음모가 발생했으나 모두 타개하여 그 치세가 견고함을 실증하였다.

 

〔체제안정기(1572∼85년)〕

 1560년대 말 이후의 위기는 체제의 안정과 그에 따르는 평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하였는데, 72년 4월에 에스파냐를 가상(假想)의 적으로 여겨 프랑스와 맺은 블루아조약은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여왕은 국민에게 경모(敬慕)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년 11월 17일에는 그 즉위를 기념하여 성대한 식전이 거행되었다. 내란이 일어날 염려가 없어졌고 내외전쟁의 어려운 사태도 없어져 73∼78년의 5년간은 특히 안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교회에 대한 신구 양파의 공격은 차츰 격화되었는데,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도 화근이 되었다. 외부에서는 에스파냐의 위협이 커지고 있었으며 여왕의 후계자는 정해지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체제고난기(1585년 이후)〕

 여왕 암살 음모와 관련된 배빙턴사건이 드러나게 되어 1587년 2월 메리 스튜어트는 처형되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네덜란드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이 그때까지의 해상에서의 각축을 가중시켰고 드디어 영국과 에스파냐는 전쟁상태로 돌입하였다. 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퇴시켜 여왕의 명예는 크게 높아졌으나 전쟁은 장기화되었으며, 재정도 부족해졌다. 또한 94년부터 5년간이나 흉년이 들어 곡물가격이 크게 인상되었고 극도로 곤궁해진 서민에게 부과된 과중한 조세 및 징병 등으로 여러 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여왕을 핵으로 하는 정부쪽은 진부한 이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므로 유효 적절한 법령을 만들 수가 없었다. 95년 아일랜드 북부에서 에스파냐의 사주로 반란이 발발, 98년 무렵에는 나라 전체적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1601년 2월 그 진압에 실패한 총신인 에섹스백작이 반역함으로써 여왕을 실망시켰다. 그해 10월에 개회된 의회는 <독점특허>를 논의하면서 격화되었다. 여왕의 실질적인 양보와 훌륭한 연기 등으로 사태는 수습할 수 있었다. 그 때의 국민에 대한 헌신적 애정을 강조한 유명한 연설은 치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 되었다. 1603년 여왕의 죽음과 함께 튜더왕조도 끝났으며,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 즉위함으로써 스튜어트왕조가 시작되었다.

 

〔통치의 특색〕

 엘리자베스 1세는 군주권의 존엄을 중요시하여 여왕의 권위를 높이는 데 힘썼다. 통치를 할 때는 항상 의회의 협력을 구했으나, 대권사항(大權事項)에 의회가 관여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힘썼으며, 자주 시도된 순행(巡幸)도 그에 대한 일환이었다. 감정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었으나, 신하는 잘 다스렸다. 많은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대권 유지에만 전념하였다. 해상발전에 관심이 많았으며, 드레이크 등의 해적행위를 도와준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는 여왕의 치세 아래 문운(文運)이 융성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W.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영국르네상스의 전성기였다.

 

 

 

 

 

 

 

국가와 결혼한 엘리자베스1세- 라고까지 합니다. 처녀여왕으로 노쇠하여 죽었다는군요..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본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교황도 그를 가톨릭의 수호자라고 일컬을 만큼이었죠. 그러다가 그가 스페인과의 외교를 위해 억지로 결혼하게 된 부인과 결별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영국 국왕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로마 교황과 스페인 국왕은 매우 반발했지요. 결국, 헨리 8세는 새 아내를 맞게 되고 두 번째 왕비 앤을 맞게 됩니다. 이 앤에게서 엘리자베스 1세가 나옵니다. 첫번째 부인에게서는 메리 1세가 나오지요. 그런데, 문제는 첫번째 부인과 헤어진 이유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못 낳는 것이었는데, 두번째 부인 또한 아들을 못 낳게 되자, 제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앤을 참수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번의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게 됩니다.

 문제는 가톨릭이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이 같은 헨리 8세의 망동에 대해 파문으로 응답하고 섬나라였던 영국은 이것을 무시하고 가톨릭과 교리는 모두 같지만, 그 수장을 영국왕으로 하며 이혼을 허락하는 성공회라는 국교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에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분개하여, 몇몇은 국왕 암살 시도까지 하게 되고 이것이 들통나 성공회의 가톨릭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헨리 8세가 죽으니 메리 1세가 영국법에 따라 여왕이 됩니다. 그런데 스페인 부인의 딸이니만큼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를 매몰차게 차 버린 헨리 8세에 대한 증오가 성공회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성공회를 엄청나게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메리1세는 "피의 메리"라고까지 불립니다.

 결국,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인 메리는 말년에는 "정신질환"까지 일으킨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합니다. 이 엘리자베스는 해적 드레이크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해상 무역에서 얌체 무역을 하여 수익을 올립니다.

 또, 성공회 신자였던 만큼 가톨릭에 대해 억압합니다. 물론,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만큼 영국의 전성기가 없었기에 영국인들은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덮어 두는 편입니다.

 이 때의 시대적 배경은 막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자본을 많이 축적한 자본가들과 과학적 지식을 쌓은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가톨릭에 대해 매우 도전하던 시기였습니다. 또, 국가라는 개념의 틀이 잡혀, 서서히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전 유럽에 행해졌던 시기였습니다. 유럽은 종교전쟁으로 완전히 기틀이 잡힙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등은 하나의 국가로 자리잡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등은 완전히 쪼개져 버립니다. 특히, 독일은 종교전쟁의 주요 싸움터가 되면서 3류 지방으로 전락했습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무역력을 바탕으로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함대라는 스페인의 아르마다(무적함대)를 무찔러 세계 해상권을 장악합니다. 이 시기에는 벌써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식민지로 삼았던 시절입니다. 다시 영국은 이 식민지를 뺏기 위해, 장악한 해상권으로 세계로 뻗어 나갑니다. 특히, 동인도회사야말로 대영제국 식민수탈의 상징입니다.

 또, 엘리자베스는 신대륙을 개척해 보라는 의미에서 일반인 십여명을 미국 땅으로 보냅니다. (미국 땅인지는 모르고 다들 죽었지만요.)  어쨌든, 엘리자베스 시대에 영국은 미래의 대영제국의 기초를 다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서 깊이 존경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네이버 지식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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