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쾌락을 조금 추구했다고 해서 신이 그 사람을 결코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찰스 2세는 왕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즐겼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던 때에는 크롬웰 시기의 엄격한 청교도적 분위기에 대한 반동으로 향락적이고 화려한 풍조가 만연했고 찰스 2세는 사촌인 루이 14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부도 많았고 서자로 인정한 아이들만 해도 13-4명이었다. 왕비 캐서린(1638-1705) 정략 결혼으로 그녀는 찰스를 사랑했지만 찰스는 정부들을 더 사랑했다. 그러나 왕비가 1670년대에 유산을 하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판명이 나와도 찰스는 왕비를 끝까지 존중하여 1678년 카톨릭 음모 사건 때 왕비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중상 모략이 난무해도 왕비의 결백을 굳게 믿고 혐의가 풀릴 때까지 왕비를 변호하였다. <찰스 2세의 정부들> 루시 월터(1630-1658) 몬머스 공작 제임스(1649~1685)의 생모. 웨일즈의 좋은 집안서 태어난 루시는 월터 가가 내란 동안 왕을 지지했기에 런던, 헤이그로 도망다녀야 했다. 그리고 1648년 헤이그서 찰스 2세를 만나고 그의 첫 정부가 된다. 갈색 머리의 미인이면서 대담했던 그녀는 찰스 2세의 사생아 두 명(제임스와 메리)을 낳았지만 자신이 왕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추방당해 어린 아들과 파리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루시가 죽은 뒤 아들 제임스는 1662년 영국으로 불려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산다. 그는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1663년 2월 14일 찰스 2세는 그에게 몬머스 공작, 동커스터 백작, 틴데일 백작작위를 주었으며 가터 기사에 봉하게 된다. 그렇기에 일부 영국인은 이미 그를 찰스의 후계자로 생각하기도 했지만 왕위는 삼촌 제임스 2세에게 돌아갔고 결국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주도하려 했으나 실패해 체포되어 참수됨. 캐슬메인 공작 부인 바바라 빌리어스(1641-1709) 바바라는 짙은 갈색 머리에 우유같은 피부, 짙은 속눈썹에 폭 싸인 보석 같은 눈을 지닌, 당시 가장 아름다운 귀족 여성의 한 명으로 여겨졌었고 1659년 그녀는 가족의 뜻에 따라 캐슬마인 백작 로저 파머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망명 중인 찰스 2세의 정부가 된 1660년에 부부는 영원히 헤어진다. 탐욕스러운 그녀는 찰스 2세에게서 막대한 돈과 지위를 얻어냈고 심지어 돈을 받고 작위를 팔기도 하였다. 거기다 왕 이외에 여러 연인들이 있었고 심지어 찰스와의 여섯 아이들 중 두 명이 찰스 2세의 아이들이 아닐 거라 한다. (마지막 아이인 바바라는 친부가 1대 말보로 공작인 존 처칠일 거라고...) 루이즈 르네 드 케루알. 포츠머스 공작부인 (1649-1734) 프랑스의 브르타뉴 귀족 케루알 공 기욤 드 페낭쾨의 딸로 1668년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안의 시녀로 있다가 1670년 5월 도버 비밀조약 체결을 위해 앙리에트를 따라 영국으로 갔다. 그러나 그 해 6월 앙리에트가 갑자기 죽어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찰스는 그녀에게 왕비의 시녀자리를 주게 된다. 영국 국왕이 그녀에게 호의를 품은 듯 하자 프랑스 대사 콜베르 드 크루아시와 수석 국무장관 알링턴 경은 프랑스의 국익을 위하여 그녀를 후원하는 데 힘을 모았다. 1671년 10얼 서퍽의 유스턴에 있는 알링턴의 별장에서 왕과 그녀는 관계를 맺었으며 1672년 7월 후에 리치먼드 공작이 된 아들 찰스가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의 이익을 위해 힘쓰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사절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루이 14세는 1673년 그녀에게 오비니 공작령을 비롯해 여러 선물과 특권을 내렸다. 또한 그녀는 계속 찰스의 총애를 누려 1673년 피터즈필드 남작, 페어럼 백작. 포츠머스 공작위를 받아 1674년에는 1년 수입이 적어도 1만 파운드에 가까웠다고 한다.(당시 왕실 재정은 연 120만 파운드.) 댄비 백작, 선덜런드 백작 샤프츠버리 백작 같은 고위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능란하게 자기 위치를 지켰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왕에게 자신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그러나 탐욕이 지나쳐 신망을 잃었으며 1678년 카톨릭 음모 사건이 일어난 뒤 로마 카톨릭교도이자 프랑스인이라는 이유로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게다가 영국민들은 그녀가 프랑스 인이자 카톨릭 교도여서 그녀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가 죽은 1685년 2월 6일까지 계속 국왕 옆에서 가까이 지냈으며 왕이 죽자 얼마 뒤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서 살았다. 오비니에서 보낸 말년에는 수입이 없었으나 루이 14세가 그녀를 채권자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넬 귄 본명은 엘리너 귄 (1650-1687) 코번트가든 지역에서 매음굴을 운영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던 넬은 1664년 언니인 로즈를 따라 드루어리 레인에서 오렌지 파는 소녀가 되었다. 그러다 곧 당시 유명한 배우였던 찰스 하트의 관심을 끌어 그의 정부가 되면서 연극을 시작해 1665년 12월 처음 무대에 오르게 된다. 1666-9년의 킹스 컴퍼니 극단의 일급 여배우였으며 그시기에 도싯 백작 6세 버크허스트 경의 정부이기도 하였다. 뛰어난 가수이자 댄서이며 그녀의 격식을 차리지 않는 솔직함, 너그러움, 뛰어난 재치, 주변 사람까지 즐겁게 만드는 쾌활함, 놀라울 만큼 거침없는 태도 등이 당시 청교도주의와 생생한 대조를 이루어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누렸는데 1670년 마지막 연극 <스페인의 그라나다 정복>를 공연하고 찰스 2세와의 첫 아들을 낳은 후 왕과의 관계로 사교계에 진출한 넬은 찰스 2세와 그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며 호화롭게 살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설득에 의해 찰스 2세는 서자인 찰스를 헤딩턴 남작이자 버퍼드 백작 이어서 세인트 앨번스 공작으로 봉하고 1671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은 보클레 경으로 삼는다. 자그마한 몸집이나 호리호리하며 균형이 잡힌 몸매에 갈색 눈과 밤색 머리를 지닌 그녀는 찰스 2세의 정부들 중 유일하게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글자는 알지 못해 편지는 누군가가 대신 써주었고 그녀는 'E.G'라고 서명만 할 뿐이었다. 찰스 2세의 정부가 된 후로는 왕이 죽을 때까지 왕에게 충실했고 왕이 죽은 뒤에는 그를 기리며 지냈다. 1685년 왕이 죽자 넬은 많은 빚 때문에 궁지에 몰렸으나 '불쌍한 넬을 굶주리게 하지 말라' 라는 왕의 유언을 지킨 제임스 2세에 의해 빚은 청산되고 1년에 1500파운드의 연금을 받다가 1687년 3월 졸중으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가 8개월 뒤에 죽었다. 그밖에 샬럿(1650-1684)이란 딸을 낳은 샤논 남작 부인 엘리자베스 플리마우스 백작 찰스(1657-1680)와 수녀가 된 딸 캐서린(1658-1759)을 낳은 캐서린 페기 가수이자 배우로 메리(1673-1726)란 딸을 낳은 메리 데이비스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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