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을 패배시킨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큰 역할을 하게 되자 유럽의 중심은 파리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로 옮겨지게 되고 유럽 정치를 주도하는 인물도 나폴레옹에서 메테르니히로 바뀌게 된다.
****메테르니히는 1815년에서 1848년까지 유럽의 정치를 주도하다가 그 이후 다시 프랑스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에게로 유럽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 이후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 19세기 유럽 정치 주도권의 흐름이다.*****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 회의라 하는 Westphalia 회의 다음으로 열린 큰 국제 회의인 비엔나 회의에서는 비엔나 반동체제가 등장하여 1848년까지의 유럽을 풍미하게 된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각국의 군주와 외무상등 200여명에 달했는데, 전승국으로는 오스트리아(메테르니히), 영국(Castlereagh), 러시아(Alexander 1세), 프러시아(Heidenberg)의 4강국과 스페인, 포르트칼, 스웨덴같은 전승국이지만 회의에서 무시당하고 이로 인해 불만을 가졌던 3개국이 있었다.
이들이 나폴레옹을 엘바로 귀양보내고 난 후 영토 처리 문제로 갑론을박하는 도중 나폴레옹은 엘바을 탈출하여 그의 '백일천하'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워터루의 승리로 나폴레옹을 완전히 몰락시킨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영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 때 프랑스는 불만을 가진 소국들을 이끌고 자기 주장을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4강국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대 영국 프러시아로 갈라져서 대립하게 된다.
비엔나 회의의 지도 원리는 곧 비엔나 체제의 원리가 되는데 이것으로는 먼저, '정통주의(복고주의)'가 있다. 이것은 메테르니히가 주장한 것으로 유럽의 국경을 비롯한 통치자등 모든 것들을 1792년 이전의 상황으로 돌리자는 주장인데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왕정 복귀를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반동, 보수주의의 고수'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자유 및 이 시기에 일어난 국민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는 '배상주의'가 있는데 이것은 영토 문제로 회의에서 국가간에 대립할 때 자국과 이해 관계가 있는 어떤 지역을 포기하는 국가에게는 다른 지역으로 보상한다는 원리이다. 네 번째는 '세력 균형 주의'인데 이것은 한 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막는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비엔나 체제라는 모습으로 실현됨에 따라 이 원리들은 1848년까지의 국제 질서가 되었다.
비엔나 회의에 참가한 강대국들의 주된 대립점은 폴란드에 대한 문제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위치한 작센(Sachsen,Saxonia) 지방에 대한 문제였다. 먼저, 폴란드 문제는 폴란드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에 위치함에 따라 러시아는 서방 진출의 교두보로 이 지역을 탐내자 프러시아와 영국은 그러한 러시아의 진출이 장차 위협 요소가 될 것으로 파악하고 이것에 반대하는데 특히, 영국의 경우는 러시아가 폴란드를 차지할 경우는 영국과 바다를 마주하게 되어 직접적인 침공의 위협이 있으므로 강하게 반대하였다. 다음으로, 작센 지방은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독일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유리한 위치이므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서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다툰다.
따라서, 이 두 문제로 인하여 4강국들은 영국과 프러시아 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로 갈라지고 양자 사이에서는 전쟁도 불사 하려는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패전국인 프랑스는 양측에 대해 선택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미묘한 위치에 서게 되어 패전국이면서도 오히려 정승국들이 프랑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는 탈레랑(Talleyrand)이었는데 그는 매우 능란한 수단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그의 경력을 보면 이러한 점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언제나 여당의 편에서 활동한 사람으로 혁명전에는 주교로서 성직자 신분이었다. 그러던 그가 혁명 이후에는 혁명 정부에 결탁하여 '성직자 민사 기본법'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혁명 정부가 무너지고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그뤼메르 쿠테타에도 주역으로 참여하였으며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에는 프랑스 대표로 비엔나 회의에 참가하여 강대국들의 대립 상황을 이용하여 큰 역할을 하였고 왕정 복고시에도 여전히 그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훗일 7월 혁명이 일어났을때에도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는 등 언제나 권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처럼 능숙한 정치가인 탈레랑은 패전국 대표이면서도 스페인, 포르투칼 등의불평 소국을 이끌고 강대국들의 대립 상황속에서 그의 능란한 외교술이 엿보이는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먼저, 폴란드 무제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분할을 제안하였는데 폴란드의 댜蒁부분을 러시아가 장악하게 하고 프러시아는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도록 일부 지역을 차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해 당사자의 하나인 영국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도록 하였다. 작센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을 프러시아가 차지하게 하고 일부는 작센 왕국에게 맡겨서 이것으로써 독일 통일의 중심이 프러시아가 되는 계기가 생겼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회의의 원칙에 따라 다른 곳에서 보상을 받게 하였는데 그 곳이 이탈리아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요한 지역인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영국에 대한 보상은 유럽 대륙 내의 영토가 아니라 비유럽 지역 영토로 이루어졌는데 영국은 해군국으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요구하여 승인받게 된다. 당시 영국이 요구한 지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 지중해의 말타섬, 아시아의 실론등 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영국은 해군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평화적으로 지배하는 'Pax Britanica'를 이루게 된다.
비엔나 조약은 1815년 6월 9일에 체결되고 이로써 비엔나 반동 체제가 등장한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2개의 동맹이 맺어지는데 먼저, 그 하나는 '신성 동맹'이고 다른 하나는 '4국 동맹'이다. 신성 동맹(Holly Allience)는 1815년 9월에 결성되는데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결성을 주창한다. 이 동맹은 자유주의, 국민주의 등의 혁명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군주가 결합한다는 취지하에 조직되었으나 영국과 교황은 이에 참가하지 않았다. 1815년 11월에는 4국 동맹이 결성되는데 이것은 실질적인 군사 동맹으로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이 동맹에 참가하였으며 나중에 프랑스가 참가하여 5국 동맹이 되었다. 그리고, 이 동맹의 내용은 유럽의 국가에 혁명이 발생할 때는 연합하여 군사적으로 탄압한다는 것이었다.
비엔나 반동 체제의 실질적인 내용으로는 먼저, 자유주의와 국민주의를 탄압한다는 정통주의의 실현에 입각한 내용이 있고 다음으로, 세력 균형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여 프랑스의 고립화 정책을 취하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7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약탈해간 미술품들을 반환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러한 비엔나 체제로 인하여 영방 국가로 분리된 독일내에서 프러시아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이탈리아는 소국으로 분열되고 많은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