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 - 다음 글은 Kenneth O. Morgan의 "Oxford History of Britain"의 일부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헨리는 차남이었지만 형인 아더(Arthur)가 1502년에 죽었기 때문에 1509년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직후 그는 신하들의 권유에 못이겨 죽은 형의 미망인인 캐더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하였다. 일찌기 선왕인 헨리 7세는 교황으로부터 미망인이 된 며느리 캐더린의 '관면(dispensation = An exemption from a church law, a vow, or another similar obligation granted in a particular case by an ecclesiastical authority)'을 받아놓았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결혼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헨리 7세의 총신이었던 리차드 앰프슨(Richard Empson)과 에드문드 더들리(Edmund Dudley)는 헨리 7세가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원한을 많이 샀는데, 헨리 8세는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하여 앰프슨과 더들리를 처형하여 그 시신을 늑대밥으로 던져주었다(1510). 물론 그라고해서 중앙집권을 포기하거나 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결혼을 6번이나 했는데, 첫번째 부인 캐더린(Catherine of Aragon)과의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하였고,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과 수도원 해산(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1536)을 통해 영국국교회를 확립하고 왕권강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메리여왕(Queen Mary, 1553-1558)은 캐더린(Catherine of Aragon)의 소생이었다. 이혼문제가 정치문제로 비화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었다. 당시의 상식으로 볼때 국왕이 제멋대로 이혼해버리더라도 대충 넘어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헨리 8세는 선왕이 교황으로부터 받아낸 '관면'에 대하여 교황이 무슨 권한으로 '관면'을 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즉 그는 캐더린과의 결혼은 무효인 '관면'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혼 자체가 원인무효라고 주장했으며, 이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던 것이다. 두번째 부인은 앤 볼린(Anne Boleyn)이었는데, 그녀가 엘리자베스(Elizabeth)를 낳았을 때 헨리 8세는 아들이 아닌 것에 크게 실망하였고, 두번째 출산에서 앤 볼린이 기형인 남자 태아를 유산하자 헨리 8세는 신이 그의 2번째 결혼을 저주한 것으로 믿게되었다. 결국 앤 볼린은 처형당하고 말았으며(1536), 세번째 부인인 제인 시무어(Jane Seymour)는 헨리 8세가 원하던 사내아이(Edward)를 낳았으나 출산후 12일만에 몸이 쇠약해져서 죽고 말았다(1537). 네번째 부인 앤(Anne of Cleves)은 헨리 8세가 유럽에서 동맹을 얻기위한 정략으로 결혼한 것이었지만, 외모가 떨어져서 초야도 치르지 않은 채로 이혼당했다. 헨리 8세는 그녀보다 그녀의 시녀였던 캐더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를 사랑하게되었고, 같은 해에 그녀와 결혼하였다(1540). 그러나 그녀도 결국 바람을 피우다 들켜서 처형당하고 만다(1542). 1543년에 헨리 8세는 두번이나 남편과 사별한 바 있는 캐더린 파(Catherine Parr)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추종자였으며 영국의 인문주의적 개혁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한다.
헨리 8세의 총신으로는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와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및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 유명하다. 1515년에 대법관(Lord Chancellor)에 임명된 울지 추기경은 교황으로하여금 그를 종신 교황전권대사(legate a latere)로 임명하도록 하였고, 이 직위를 통하여 영국의 모든 교회와 성직자들이 튜더(Tudor) 정부에 복종하고 세금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는 왕권강화에 기여한 인물이지만 한편으로는 영국에서 신교의 확산을 저지하고 카톨릭 교회를 보호하려고 노력한 인물이기도 했다. 1529년에 헨리 8세는 캐더린(Catherine of Aragon)과의 이혼문제로 로마교황과 대립하게되면서 교황전권대사였던 울지를 축출하고 대법관자리에 '유토피아'의 저자였던 토마스 모어를 임명하였다. 모어 역시 국왕과 교황의 대립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주저하였고, 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는 1532년에 사임하였지만 그가 소집한 의회는 혁명적인 법안들을 통과시킴으로써 역사에 큰 획을 남겨놓았다: the Act of Annates(1532), the Act of Appeals(1533), the Act of Supremacy(1534), the First Act of Succession(1534), the Treasons Act(1534), the Act against the Pope's Authority(1536). * the Act of Appeals(1533)는 영국에서 세속 및 종교재판권은 영국국왕으로부터 나오며, 교황은 이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the Act of Supremacy(1534)는 영국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아니라 영국국왕임을 선포한 것이다. * the First Act of Succession(1534)은 왕위계승의 순위를 밝히는 일련의 법들 중 첫번째 것인데, 그 전문에서 교황이 이 문제에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국왕의 권한에 대한 찬탈(usurpation)로써 비난한 점이 특기할만하다. * the Treasons Act(1534)는 영국국왕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부정할 경우 이를 반역죄로 다스리는 것을 그 내용으로한다. - 토마스 모어는 1535년에 the Treasons Act에 의거하여 처형당하였다. * the Act against the Pope's Authority(1536)는 성서해석에 논란이 있을 경우 교황이 '교사'로서 이 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권리를 부정하는 것을 포함하고있다.
1532년에 모어가 사임한 후에는 토마스 크롬웰이 국왕의 신임을 얻고 일련의 개혁정책들을 추진하였다. 1536년에는 19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인 추밀원(Privy Council)이 비대했던 평의회(Council)를 대신하게되었다. 크롬웰은 재정개혁을 단행하여 왕실의 재정과 정부의 재정을 분리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일은 1570년대에 가서야 완결이 되었다. 크롬웰의 최대업적은 역시 수도원해산(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이었다.
수도원해산의 정치적 동기로는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거의 대부분의 수도원들이 교황청을 비롯하여 해외의 모기관과 연관되어 있었으므로 항소법(the Act of Appeals)과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 이후 이것들을 그대로 둘 수 없게 되었다. 둘째, 헨리 8세의 재정이 파산상태에 빠졌으므로 수도원 재산으로 왕실재정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몰수한 수도원 재산을 헐값에 매각함으로써 지지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1536년부터 수도원을 해산하기 시작했는데, 잉글랜드 북부지방에서 '은총의 순례(the Pilgrimage of Grace) 반란'이 일어나서 해산작업이 몇년 지연되기도 하였지만, 1539년 11월까지 총 560개의 수도원이 해산되었고 몰수된 토지에서 나오는 연수입이 132,000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충실해진 왕실의 재정은 헨리 8세의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어려워지게 되었고, 수도원해산으로 이득을 본 것은 그 토지를 불하받은 귀족과 젠트리계급이었다. 크롬웰은 에라스무스적인 이상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는데, 헨리 8세는 그가 칼레(Calais)에서 신교도들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고 1540년에 크롬웰은 정적들에게 희생당하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전쟁을 좋아하여 프랑스를 정복하기를 원하였고 프랑스는 대체로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였다. 총 4번의 전쟁(1. 1512-1513 / 2. 1522-1525 / 3. 1528-1529 / 4. 1542-1546) 중 3번째 것은 스페인과의 전쟁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프랑스/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었다. 선왕인 헨리 7세는 1502년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James IV)와 영구평화조약(Treaty of Perpetual Peace)을 체결하고 다음 해에 그의 딸 마가렛(Magaret)을 제임스 4세와 혼인시켰지만, 헨리 8세가 왕위를 승계하자 조약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므로 1513년에 프랑스에 원정 중이었던 헨리 8세는 서레이(Surrey) 백작을 보내어 스코틀랜드를 토벌하였다. 서레이 백작은 플로든 전투(Battle of Flodden)에서 스코틀랜드군을 대파하였고 제임스 4세도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스코틀랜드의 다음 왕인 제임스 5세는 당시 갓난아이였고 그의 모후는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가렛이었지만 섭정인 존(John duke of Albany)은 친프랑스파로서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Francis I)와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제임스 5세는 1536년에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란시스 1세의 딸인 마들렌(Madeleine)과 결혼하였다. 첫번째 전쟁에서 헨리 8세는 스퍼스 전투(battle of Spurs, 1513)에서 승리하여 Therouanne와 Tournai를 얻었지만, 방어하기 어렵고 별 이득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소득이었다.
두번째 전쟁에서 영국군은 파리에 50마일까지 접근하기도 했고 동맹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찰스 5세(Charles V)가 파비아 전투(battle of Pavia)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프란시스 1세를 사로잡기도 하였으나 당시 영국의 재정이 바닥나서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정계가 친프랑스파인 비튼(Beaton) 추기경에 의해 장악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헨리 8세는 1542년에 노포크(Norfolk) 공작을 보내 스코틀랜드를 침공케하였고 솔웨이 모스 전투(battle of Solway Moss)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후 한 달도 못되어 제임스 5세가 사망하였다. 왕위는 제임스 5세가 죽기 6일 전에 태어난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에게 넘어갔으며, 헨리 8세는 그린위치 조약(Treaty of Greenwich)을 체결하여 장래에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하도록 해둠으로써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합병되도록 해두었지만, 후일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1543년에 헨리 8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협공하기로 하였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비록 Boulogne를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동맹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프랑스와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으므로 전쟁은 큰 소득 없이 끝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비튼 추기경이 그린위치 조약을 파기하자 헨리 8세는 허트포드(Hertford) 백작(후일 에드워드 6세의 섭정이 된 Somerset)을 보내 국경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1546년 5월에는 비튼 추기경이 Fife의 지주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생겼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친프랑스파가 득세하였다.
헨리 8세는 왕권강화를 위하여 교황과 대립하기는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인물이었고 카톨릭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지지하였다. 1547년에 헨리 8세가 사망하여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허트포드(Hertford) 백작이 소머셋(Somerset) 공작이 되어 1549년까지 섭정을 하게 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