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28세때의 자화상, 목판에 유화, 1498년작,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 젤로는 잘 알려진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이름은 조금은 낯설게 다가온다.
하나 서양에서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
그들에게 자리 잡아 온지 오래 다. 특히 북부 유럽에서는 더욱 그렇다.

들토끼ㅡ 수채화 자화상의 부분확대(아래 그림 참조)
뒤러의 유명한 '들토끼'는 어린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의 미술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삽화며 교회용품집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있는 '기도하는 손' 이 포스터, 열쇠고리
책표지등으로 대량 복사 되어 기독교인 들에게 팔려나간다.
뒤러는 북부유럽 최초의국제 미술가, 서양 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 맨이자 환상적인 상상가로 일컬어 진다.
뒤러는 유럽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15,16세기의 전환기에 살았다.
독일로 이민온 금속 장인의 헝가리 2세 출신으로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찍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이었으며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와 벨리니로 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다.
뒤러는 어린 시절 부터 스스로의 천재성을 자각하고 13세의 나이에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의 창시자 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1455년 헝가리에서 독일 뤼렘베르크로 이민온 금세공 장인이었다.
그 18명의 자녀중 셋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 부터 금세공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기술을 배웠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게 된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독일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마녀, 괴물, 성인의 모험담들 묘사한 소형 판화그림에서 부터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을 바라보자면 그 치밀하고 완벽한 화면 구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뒤러는 판화가겸 제도공이기도 하다
500여년이 지난 지금 뒤러의 작품은 회화 60여점, 목금속 판화작 350여점, 드로잉 970여점이 있다.뒤러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시ㄷ대에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당과 귀족 저택의
실내 장식 용도로 쓰일 회화가 미술 장르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여간해서 자국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면 칭찬에 인색했던 16세기 미술 평론가 '지오르 지오 바자리'
도 풍부한 상상력과 판타지를 한것 발휘한 뒤러의 기량을 칭찬했다고 한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가진 창조자'로
인정 받으니 그의 기분은 능히 짐작된다.
뒤러는 막스밀리언 1세 독일 황제의 황실미술가로서의 영광도 얻었다.
혹자는 뒤러의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을 일컬어 통속적이라고 평가한다.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때문에 일반고객을 상대로 대량 판매가 가능하다.
웬만한 대작 회화 한편을 완성하려먼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 수정 작업을 거쳐야 했던
화가들과 달리 뒤러는 그 솜 씨 좋은 손으로 펜,끌, 조각칼을 놀려서 스케치, 목금속판 파기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과정을 손수 혼자서 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다.
지금 그의 판화에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 모노그램(화가의 이름 첫글자 인 A 와 D를 따서
결합하여 만든 글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상표(TRADE MARK) 나 로고(LOGO)와
그 개념이 통하는 데가 많다.
그는 자신의 AD 모노그램이 무단 복제로 남용 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르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 법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판화들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시장에 내다 팔 정도로 대량 인쇄했다.
성서 묵시록을 환상적인 장면으로 해석한 이미지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에서 배어온 고전 누드상과 이교도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따온 모티브들을 뒤러가 즐겨 다룬 주제들이다.
여기에 르네상스 비례법과 원근법은 고딕 시대 독일인들이 전에 보지 못한 사실성과 감각적
역동성을 표현해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란 미술장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 시겼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건축가들과 장인들이 건축물이나 작품 한구석에 그들의 얼굴을 새겨넣은 관행을 즐겼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여행과 인문주의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 뵤사함으로써 더 이상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장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었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한 고대 의학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의사에게 직접 내리기도 하였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 증세를 천재성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 받느 예수의 도상을 빌린 한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