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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4 [맹트농 후작부인]

작성자52 임채성|작성시간05.12.06|조회수1,182 목록 댓글 0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정부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뉴

 

 

1635년 9월 8일 니오르에서 출생

1719년 4월 17일 생 시르에서 사망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뉴는 1635년 니오르의 감옥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다. 프랑수아즈의 아버지는 쉬리노와 오비니의 영주인 콩스탕 도비뉴 남작이었고, 어머니는 잔느 드 카르디약이었다. 잔느는 감옥에 갇힌 남편 곁에 머물게 되었다. 콩스탕은 위조죄로 수감된 것이었지만, 또한 그는 살인자이기도 했다. 프랑수아즈는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 큰 오빠인 콩스탕은 1628년 태어나 1646년 사고사했으며, 작은 오빠 샤를은 1634년 태어나 1703년 사망했다.

 

프랑수아즈의 할아버지는 테오도르 아그리파 도비뉴로, 군인이자 역사가이며 시인이자 칼뱅교도였다. 앙리 4세 치하의 위그노 운동 속에서, 조부인 테오도르의 삶은 위험과 모험으로 점철되었다. 테오도르는 제네바의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영웅으로 죽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불태워졌다는 'Histoire Universelle and Histoire Secrete'를 비롯하여, 'Les Aventures du baron de Foeneste' 와 'Les Tragiques, poemes satiriques'같은 저서를 남겼다.

 

프랑수아즈의 아버지는 위그노에 대한 찬동으로 박해받았다. 신교도 신앙의 대물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즈는 카톨릭 교도로 세례를 받았다.

콩스탕이 출소했을 때, 콩스탕은 자신이 라 마르티니크의 통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가족들을 전부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맡고 있었다. 2년 후, 그는 결국 단념하고 라 로쉴로 갔다. 가족들은 마르티니크에서 몇 년을 보냈으나, 콩스탕의 부음을 접하자 프랑수아즈와 어머니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들은 아주 빈곤하게 살았다. 12살 때, 프랑수아즈와 두 오빠는 친척인 신교도 아주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대모 뇌이앙 부인은 안 도트리슈 왕비로부터 특별 승인을 받아, 어린 프랑수아즈를 그 신교도의 집에서 납치했다. 이 당시, 프랑수아즈는 칠면조를 모으며 시종으로 일했다.


마침내 프랑수아즈는 니오르에 있는 위르쉴린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수아즈는 여전히 카톨릭 신앙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파리에 있는 다른 수녀원에 보내졌다. 그곳에서 프랑수아즈는 자유를 얻기 위해 개종하기로 결심했고, 매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프랑수아즈가 아직 16살일 때, 그녀의 대모는 프랑수아즈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하고는 프랑수아즈보다 25살이나 연상에 심각한 류마티즘을 앓고 있던 한 남자를 배우자감으로 골랐다. 1652년, 프랑수아즈는 폴 스카롱과 결혼하였다.

시인이었던 폴 스카롱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Roman comique'로 기념되는 극작가였다.
폴 스카롱의 'Nouvelles magicomiques'는 몰리에르, 보마르셰 등에게 캐릭터, 플롯 그리고 타이틀을 제공하였다. 스카롱은 자신의 집에 살롱을 열었다. 그의 살롱에는 방세라드, 마리니, 모르트마르, 빌라르코, 세비니 후작부인 등이 출입하였다. 스카롱의 지위를 통해 프랑수아즈는 파리의 문학계와 지식인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녀 스스로도 훌륭한 작가였다.


1660년 스카롱은 약간의 빚을 남긴채 세상을 떠났다. 프랑수아즈는 빈털터리였지만, 왕의 모후는 그 미망인에게 죽은 시인의 연금을 계속 지급하였다.


진짜 전설은 1669년 시작되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 14세와의 사이에 첫아이를 갖게 되었다. 맹트농 부인은 이 아이를 비밀리에 감추도록 고용되었고, 태어날 때까지 대기하다가 아이를 파리에 있는 작은 집에 숨겼다. 이는 몽테스팡 후작이 이 아이를 그의 적자로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아이가 생겼을 때도 같은 일을 요구받았고, 이번에는 파리 밖에 있는 또다른 집에 숨기게 되었다. 몽테스팡 부인이 다시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왕은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를 가정교사로 임명하기로 결심했다. 왕의 사생아 6명은 모두 보지라르에 머물렀다. 1673년 모후가 죽었을 때, 왕은 몽테스팡 부인의 아이들을 합법적인 자식으로 만들었고, 프랑수아즈는 베르사유 궁으로 갈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 왕비의 시녀였던 몽테스팡 부인은 몽테스팡 후작과 이혼하고 왕의 공식적인 정부가 되었다. 맹트농 부인은 마리 테레즈 왕비에게 헌신하였고, 왕비는 그녀의 품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때가 1684년으로, 루이 14세는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뉴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프랑수아즈가 왕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비록 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녀의 높은 도덕적 규범을 생각한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맹트농 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맹트농 부인은 재치에 부족함이 없었고, 화술이 뛰어났다. 그녀는 후작부인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지 ?訪柰?, 맹트농 부인으로 불리는 걸 더 좋아하였다.

맹트농은 왕세자비를 싫어했는데, 이는 왕세자비가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다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왕세자비는 궁정을 지키고 싶어했고, 맹트농 부인 프랑수아즈가 스스로의 신분에 맞게 살길 바랬다.  그러나 이 늙은 여자는 참을 수가 없었고, 참으려 하지도 않았다. 맹트농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걸 아주 좋아했고, 나중에 부르고뉴 공작부인과 함께 그렇게 했다. 그녀는 왕이 자신을 왕비로 여기고 그렇게 선포하길 바랬다. 그러나 맹트농 부인의 갖은 술책에도 불구하고, 왕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비와 왕세자비가 있던 그 시절에는 궁정의 모든 것이 정숙함과 위엄으로 통솔되었다. 은밀한 환락에 탐닉하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상황을 계속 존중하였다. 그러나 맹트농의 지배가 시작되고부터, 그리고 왕의 서자들이 왕족의 일원으로 만들어진 뒤부터, 전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맹트농 부인은 1715년 왕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맹트농 부인은 왕의 장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국가의 문제들에 있어서 왕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중 대부분은 앙리 4세 이후로 여전히 프랑스에 살고 있던 다수의 신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맹트농은 7년간 감옥에 갇혀있던 마담 드 기용을 석방시켰다. 기용 부인은 당시 교황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정적주의(17세기 말 신비주의적 종교운동)를 가르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맹트농 부인은 귀족 혈통을 가진 가난한 소녀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여, 그 소녀들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 또는 그 이상의 남자와 결혼할 때를 위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날 무렵, 맹트농 부인은 생 시르로 떠나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출처 http://cafe.naver.com/westhistorystudy/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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