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일선(逸仙)이고, 호는 중산(中山)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廣東省] 샹산[香山:현재의 中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孫眉]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新敎系)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와 홍콩[香港]의 서의서원(西醫書院: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외과에 능하였는데, 병원은 날로 번성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三合會)의 수령인 정스량[鄭士良]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反淸運動)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領地)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宮崎滔天]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康有爲]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東京]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反淸)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大總統)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넘겨 주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護法運動)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北京]에서 객사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南京]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單稅論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비판
신해 혁명에서 과장된 손문의 역할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1895년, 손문은 중국 혁명파의 첫 봉기인 광주 봉기를 일으킨다. 그러나 실패하고 손문은 목에 현상금을 단 채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간다.이때 런던주재 청국공사관이 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곧 풀려나지만 이 사건은 중국 국내에 센세이션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개혁파의 기관지라 할 시무보를 비롯, 주요 신문과 잡지 등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손문 자신이 납치 경위를 밝힌 <런던에서의 납치(Kidnapped in London)>는 런던에서 발간된 그 다음해에 벌써 상해에 유통되고 있을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일개 봉기주의자요, 망명 정객에 불과했던 손문은 졸지에 전 중국과 온 세계에 반청 활동의 최고 지도자로 잘못 알려지기 시작한것이다.
손문의 역할이 과대평가된 만큼 신해 혁명의 의의도 과장되어 왔다. 신해혁명은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전제 군주제를 타도했다는 점 이외에는 완전히 실패한 혁명이다. 정권은 1년도 안 돼 수구 세력에게 되돌려졌고 원세개의 황제부활 시도까지 허용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후 새로이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국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혁명은 청조보다 더 타락하고 반동적인 군벌들에 의해 유린되었다.그럼에도 손문은 현재 중국 공산당, 국민당을 가릴 것 없이 전 중국인의 추앙의 대상이다.일찍이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결성, 반청 폭동을 주도하고 신해 혁명을 성공시키고 중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민 혁명의 불길을 댕긴 그의 화려한 투쟁 경력을 살펴보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신해 혁명에서 손문의 역할과 비중은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며 신해 혁명의 주도권은 오히려 다른 세력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신해 혁명은 청나라의 신임을 받는 장국이었던 원세개에게 정권을 가져다 주었고 결국 군벌들의 추악한 싸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신해 혁명을 추진한 주요 정치 세력은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와 강유위, 양계초 등이 이끄는 향신층(지주, 관리, 지식인)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은 청조에 대항한다는 점에선 같았으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연대보다는 대립하는 때가 더 많았다.
개혁파는 주로 지방지주와 상인, 개명 관료, 광범한 예비 관료(거인, 생원)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청조 자체를 타도하는 데는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의 실시를 목표로 했다. 그들이 활동하던 1890년대 중반으로부터 불과 20년 전 일어났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이들의 모델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태후의 기세에 허수아비 노릇을 면치 못하던 황제 광서제에게 접근하는 한편 지방의회라 할 수 있는 자의국을 설치, 세력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들의 무기는 출판물 등을 통해 여론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과 학연, 지연 등으로 얽혀 전국적인 연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또 이들과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이 관직에 널리 포진하고 있었던 것도 활동을 유리하게 만들었다.개혁파는 1898년 강유위를 중심으로 북경에서 여론 공작을 벌여 서태후를 궁
중에 연금시키고 광서제를 포섭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유명한 무술정변이다. 당시 북경을 방문한 `개명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당시 근대화를 추진하던 동양의 혁명가들은 대부분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의 존재가 개혁파의 집권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하자마자 서태후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 지도자들을 체포, 처형했다. 100일만에 개혁파는축출되고 강유위, 양계초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편 손문 등의 혁명파는 입헌군주제를 반대하고 오랑캐(청조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여 한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들은 즉각적인 무장봉기로 청조를 타도하고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노선을 뒷받침할 군사력과 자금력이 없었던 혁명파는 수백 년동안 농촌에 존재해 온 회당(유랑농민 등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산전 집단)을 선동하여 무모한 봉기를 반복했으나 청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희생만 내고 말았다.
무장봉기와 무술정변에서 각각 실패한 혁명파와 개혁파 세력은 일본에 모여 치열한 노선싸움을 전개했다.
혁명파는 도쿄에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회복했다. 손문의 홍중회, 황홍의 화흥회, 장병린의 광복회 등으로 분열돼 있던 혁명파는 1905년 동맹회를 구성하고 청조의 타도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분열하고 말았다. 개혁파, 혁명파의 망명객들이 도쿄에서 혁명의 방향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전열을 가다듬은 국내 개혁파들은 외국에 뺏긴 이권회수운동, 미국상품 불매운동, 철도국유화 반대운동 등 치열한 대중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지방에서 관할하던 철도를 국유화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 주려는 청조에 대항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은 대규모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마침내 신해 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1911. 10. 10)로 이어졌다. 손문은 동맹회의 분열로 국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무창봉기가 발발할 때까지 주로 구미 지역에서 자금조달이나 외교적 노력에만 관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창봉기가 났을 때 그가 크게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창봉기 후 개혁파는 혁명군 정부를 수립하고 청조의 장군인 여원홍을 대원수로 추대, 주도권을 장악했다.이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혁명 발발 한달 보름 만에야 귀국한 손문은 높은 지명도 때문에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긴 했다. 그러나 공화국의 국기로 그가 주장한 청천백일기 대신 개혁파가 내세운 오색기가 채택될 정도로 신정부의 주도권은 개혁파의 수중에 있었다.
손문은 청조 붕괴 후 그 군사력을 거느리고 북경에 응거하고 있던 원세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본래 원세개와 한뿌리인 개혁파는 협상에 의한 해결을 고집했다.마침내 손문은 취임 두 달여 만에 원세개에게 대총통직을 물려 주고 쓸쓸히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