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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혁명가 , 체 게바라

작성자석윤홍|작성시간05.07.15|조회수347 목록 댓글 0

Ernesto Guevara

 

 

나의 삶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체 게바라와 존 F. 케네디의 공통점과 차이점 - 두 사람 모두 쿠바산 시가를 엄청나게 사랑했다는 것,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점은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 사랑했지만 게바라는 그 시가를 만들어 낸 쿠바와 쿠바 민중까지 사랑했다.

 

볼리비아 산중에서 체포된 직후 체 게바라 - 어쩐지 우리나라의 녹두장군 <전봉준>과 비슷한 인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언젠가 읽은 글 중에 시대와 불화하여 혁명을 꿈꾼 자들의 인상은 하나같이 비슷하단 글을 읽고 감탄한 적이 있다. 80년대 거리를 메운 수배자의 얼굴을 보라. 저마다 녹두장군같지 않았는가

체 게바라의 최후 - 미국은 CIA를 통해 이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를 끊임없이 조사했고, 결국 그린베레를 동원해 볼리비아 산 중에서 그를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그의 육신은 사로 잡을 수 있었지만 그의 영혼만큼은 포로로 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다.

체 게바라의 결혼식

 

 

무릎 꿇느니 서서 죽는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rnesto Guevara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노(Rosarino)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2살 때 발병한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혀 왔는데, 공기 좋은 곳에 이사를 다녀봐도 증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초등학교 과정은 결국 어머니 곁에서 자택학습(Home Schooling)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했으며 1941년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문학과 체육과목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 게바라는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환멸을 느껴 한때 '反 페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자본가들의 '富의 독점'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고 그들을 풍자하는 무언극을 쓰기도 했다. 기록에는 그의 어머니 역시 '反 페론'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나와있다.

 

194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 진학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했으며 급진적 학생운동에는 가입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만 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학을 공부하면서 우선 자신을 괴롭혀온 천식에 관해 관심을 보였으나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가 난생 처음 긴 여행길에 오른 것은 1951년 북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일주한 것. 그때 그는 병들고 가난에 찌든 인디오 원주민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1951년 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더 길고 긴 여행을 떠났는데, 칠레에서는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다. 페루의 나환자촌에서 한동안 봉사활동을 했고 콜롬비아를 여행할 때에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시위대로 몰려 잠시 구금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네주엘라, 마이에미 까지의 긴 여행을 마친 후 잠시 집에 돌아와 평소에 관심을 보였던 나병과의 인연으로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지만 중류계급을 보장받는 개업의가 되길 원하진 않았다.

 

다시 여행길에 오른 그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만났으며 이를 지켜보기만 하는 자신을 기회주의자로 자책하며 고민하다가 마야와 잉카문명에 관한 고고학 쪽에 눈을 돌려 과테말라에 오래 머물렀다. 과테말라는 당시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데, 게바라는 일찍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공산당 가입은 거부했고 따라서 정부가 제의해온 의료담당관 자리고 뿌리치고 말았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오 혈통의 마르크스주의 가디아(Hilda Gadea)와 함께 지내며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때 카스트로의 조직원인 로페즈(Nico Lopez)를 소개받았다. 과테말라에서 그는 미국 CIA의 반혁명 대리공작을 낱낱이 목격할 수가 있었는데 그는 그때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얻게 되었다.게바라는 이곳에서 운명적인 혁명가의 길을 택한 셈이다.

 

과테말라의 사회주의 정권은 망하고 1954년 그는 멕시코로 옮겨가 그곳에서 본업인 병원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또다시 가디아와 로페즈를 만났고 마침 그곳에 망명해온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결국 카스트로 조직에 가담했고 스페인 공화군 장교 출신인 바요(Alberto Bayo)로부터 전문적인 게릴라전 교육을 받아 훌륭한 비정규전투요원이 되었다. 바요는 자신의 전투경험 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게릴라전술도 가르쳤다. 그의 유망한 제자이자 그룹의 리더가 된 게바라는 이탈리아어로 '단짝'이라는 의미의 '체'(Che)라는 애칭이 따로 붙었다. 그 무렵 강도 높은 실전 훈련이 비밀리에 계속 되었고 그 현장이 경찰에 발각되어 많은 쿠바인 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1956년 드디어 쿠바에 상륙, 의사이자 혁명군의 지휘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고 탁월한 지휘자였으며 철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자였다. 그는 변절자들을 가혹하게 다뤘으며 특히 부정축재로 실각된 전직 대통령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y Zald ivar)의 추종자들을 다수 처형함으로서 조직을 강화했다.

 

마침내 혁명은 성공했고 1959년 설날 아침에 아바나에 입성함으로서 카스트로에 이어 쿠바의 제2인자가 되었다. 그의 동료 중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가 몇 있기는 했지만 정식 공산당원은 없었으므로 쿠바 공산당은 그들에게 비우호적이었다. 카스트로가 사회주의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미국의 지원아래 이뤄진 피그만 침공의 직후 였다. 1965년 카스트로는 쿠바공산당을 접수했으며 동시에 게바라는 국영농장의 감독이 되어 새로운 토지법에 의거 대부분의 토지를 압수했다. 국립은행의 총재도 맡아 전체 산업을 관리하게 되었으나 워낙에 황폐한 쿠바경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1959년 게바라는 마르치(Aledia March)와 결혼했고 함께 이집트, 인도, 일본,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유고를 방문했으며 공업장관도 겸한 그는 소련과 무역협정을 맺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시장에 종속되어 있던 쿠바의 설탕산업은 시장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혁명적 논리는 모택동의 전술에 매료되어 있었다. "혁명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수정주의라고도 비난했다.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원조 및 반란혁명의 완수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가 어딘가 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그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었다. 콩고에서 쿠바식 게릴라전에 의한 혁명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원조병력을 보내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마지막 혁명의 모험을 시도했다. 게릴라의 구성원은 쿠바,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페루 출신들이었는데 볼리비아는 사실상 남미 5개국과 맞닿는 곳이어서 혁명을 위한 최적지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는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들은 당연히 게바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자 조직이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 때마다 이탈자가 속출하고 기밀이 새나가 많은 조직원들이 체포되거나 피살되었다. 反게릴라전에 고도의 전략을 갖춘 미국CIA의 비밀첩보원들의 지원으로 게바라 부대는 숱한 기습을 받아 지리멸렬했고 그 역시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되었다.


1967년10월9일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 많은 일생은 볼리비아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수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 (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다)

번역 및 출처 : 미카엘 (longar@kebi.com)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

 

(이 글은 체가 쿠바혁명 이후 쿠바 공직에 봉직하던중, 자신은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쿠바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며 아프리카와 남미의 혁명현장으로 향할때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이다.)

 

"나는 공식적으로 당이 가지는 민족적 지도력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 수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할 때 부터 보다 당신을 더 신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써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그리고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화려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신과 일치했다는 점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국가들은 저의 순수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하나의 건설자로써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대항해 싸워 성서러운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깊은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다시 언급해두고자 하는데 쿠바혁명으로 생기는 의무감을 떠나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쿠바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 최후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해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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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며 자녀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이상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 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들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특히,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사랑하여라.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마.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  아빠가.

 

Albita - 뜨거운 꾸바 음악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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