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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조선시대 왕세자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작성자김한수11|작성시간05.12.11|조회수771 목록 댓글 0

국왕의 능력과 자질은 나라의 운명과 직결
각 분야 스승 수십 명 동원 전인적 지도자 양성에 노력

최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 조기교육, 영재교육, 엘리트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 유학을 보내는가 하면, 골프·수영·승마·석궁·수상스키·매너 등을 가르치는 소위 ‘귀족교육’ 프로그램은 연간 회원권이 400만원을 넘는다는 소식도 들린다.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법은 오늘날 유행하는 영재교육, 엘리트교육과 그 모습이 사뭇 다르다.

조선 시대 국왕은 그의 능력과 자질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존재였다. 국왕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일단 왕위에 오르면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평생 그 자리를 유지했다. 오늘날에야 선거로 뽑은 지도자가 능력이 모자란다고 판단하면 다음 선거를 통해 교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적절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국왕을 길러 내지 못하면 나라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었다.

때문에 왕세자의 스승들은 “위로는 역대 선왕들의 왕업을 이어받고, 아래로 신하와 백성들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며, 국가의 흥망이 왕세자 한 몸에 달려 있다”는 말로 왕세자를 다그쳤다.
조선 국왕의 막강한 권한에 대해 신료들은 국왕권의 남용을 제한할 방안을 마련했다. 첫째 방식은 국왕의 언행과 그에 대한 평가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국왕권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국왕 사후에 편찬되고 국왕은 어떤 경우에도 그 기록을 열람할 수 없게 함으로써 기록자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따라서 조선의 국왕들은 항상 자신의 행적이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지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고, 때문에 처신을 신중히 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방식은 교육을 통해 국왕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유학은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므로, 국왕은 성왕(聖王)이 되기 위해 심신의 연마를 계속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성인이 아닌 국왕은 신하를 스승으로 삼아 교육받았는데, 국왕의 스승들은 국왕을 교육시키면서 당대의 정책에 대해서도 견해를 개진했다.

조선 시대의 왕실 교육은 보양청 교육, 강학청 교육, 시강원 교육(서연), 경연 교육이라는 4단계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궁중에서 왕자가 태어나 두세 살이 되면 유아를 관리하는 보양청 교육이 있고, 네댓 살을 넘어 글자를 배울 나이가 되면 강학청 교육이 시작됐다.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면 시강원 교육이 시작되었고, 국왕에 즉위한 이후에는 경연 교육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국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망할 때까지 평생 교육을 받아야 했고, 왕세자 교육은 국왕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왕세자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이다. 이는 왕세자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공간과 그와 가깝게 접촉하는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왕세자 교육은 산모의 태교(胎敎)에서 시작된다.

왕실 여인이 임신하면 산모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거처하면서 몸가짐을 삼가야 했다. 산모는 매일 성현의 말씀을 듣거나 외워 이를 태아에게 들려주었고 색깔이 고운 옥과 수정을 바라보았다. 산모의 거처에는 악사가 배치돼 좋은 음악을 들려 주었다. 모두 산모의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왕자가 태어나면 주변 인물들의 선발에 유의했다. 유모는 왕자와 접촉이 왕비보다 많았기에, 유모 선발은 단순히 젖을 먹일 사람이 아니라 왕자의 스승을 뽑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왕대비가 선발하는 왕자의 유모는 ‘너그럽고 인자하며, 예의를 알고,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요즈음은 말을 잘 해야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말이 많으면 실속이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왕자와 유모의 인연은 국왕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국왕이 목욕할 때는 반드시 유모가 수발들었고, 왕비가 출산할 때 국왕이 자신의 유모를 특별히 파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국왕의 유모는 종1품에 해당하는 봉보부인의 품계를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연산군의 유모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사별한 연산군은 유모 최씨에게 모정(母情)을 느끼고 특별 대우를 했다. 최씨의 권세가 날로 높아지자 벼슬자리를 청탁하는 뇌물이 최씨에게 몰려들었고, 결국 최씨의 품계를 회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연산군은 최씨가 사망하자 사흘간 조회를 정지하면서 애도했고, 장례를 후하게 치러 주었다고 한다.

유모도 왕자에게는 스승

내관을 선발할 때도 신중을 기했다. 내관은 비록 고위직은 아니지만 평소 왕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왕자의 음식 습관이나 생활 태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자가 늦잠을 자거나 아침을 거른 채 수업에 나가면 내관이 처벌받아야 했다.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은 자연스럽게 덕을 쌓는 교육으로 이어졌다. 왕자 주변에 이미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배치되었으므로, 왕자는 이들의 말씨와 행동을 따라 배우면서 덕성을 길러 나갔던 것이다. 게다가 초기 교육은 대부분 ‘소학’을 학습해 오륜(五倫)을 익히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기본적인 예절 교육이었다.

왕자는 스승 앞에서 옷차림을 갖추고 자세를 바로 한다든지, 아침에 일어나 왕실의 어른께 문안을 올리고 밤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린다든지, 평소 부모님의 식사를 살피고, 병환중에는 약을 먼저 맛보고 올린다든지 하는 예절 교육을 받았다.

덕성 교육은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에도 여전히 강조되었다. 장차 국가를 경영할 최고지도자로서 비록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듣더라도 이를 경청하고, 신하들을 공경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여기며 보살피는 마음을 갖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조기 교육은 덕성 교육이 사라지고 지식 교육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시대의 교육법과 크게 다른 것이다.

조선의 국왕은 국가 전례를 주관했는데, 오례(길례·흉례·군례·가례·빈례)로 구성된 국가 전례는 종류가 다양하고 절차도 무척 까다로웠다. 따라서 왕세자는 국가 행사가 있으면 국왕을 수행하며 전례를 익혔고, 중국의 사신이 오면 주인 자격으로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다. 왕세자가 참석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시강원 관리들이 배석했는데, 이는 왕세자가 복잡한 전례를 잘 익혀 원만히 처신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도 일정한 통과의례가 따랐다. 어린 왕자가 처음 스승을 만나는 날에는 ‘상견례’를 해야 했고, 강의를 시작할 때면 ‘개강례’를 했다. 또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나 왕세자로 책봉되는 ‘책봉례’, 성균관에 가서 사부에게 교육받는 ‘입학례’, 세자빈을 맞아들이는 ‘가례’ 등의 의식을 치렀다.

특히 입학례를 거행할 때는 왕세자가 성균관을 방문해 스승에게 예물을 바치고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수업할 때 스승은 책을 책상 위에 두고 강의했지만, 왕세자는 책을 바닥에 놓고 보아야 했다. 비록 장차 왕위를 계승할 존귀한 몸이지만, 이날만큼은 학생의 자격으로 스승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어야 함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왕세자도 스승 앞에서는 책을 바닥에 놓고 보았다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국왕 사후에 편찬되고 국왕은 어떤 경우에도 그 기록을 열람할 수 없게 함으로써 기록자의 자율성을 보장했다. 국왕들은 항상 자신의 행적이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지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고, 때문에 처신을 신중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전통 교육은 덕성 교육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린 이후 지식 교육에 몰두하는 학습 방식을 택했다. 주자가 독서법을 언급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쓸고 닦은 후에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한 것도 덕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왕세자는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할 정도로 고된 학습 과정을 소화해 내야 했다. 따라서 특별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들었으며, 양녕대군이나 사도세자처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과목은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의해 유교 도덕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경전 공부가 덕성의 함양에 치중하는 것이었다면, 역사 교육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갖추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사실 조선의 국왕은 신하가 올리는 문서를 읽고 처리할 능력이 있어야 했고, 유교 경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정치 이념을 밝히거나 역사적 사례를 거론하며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가야 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는 당대의 학계까지 주도함으로써 삼대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君師)를 실현하려고 했다. 따라서 국왕은 많은 지식을 갖추어야 했고, 그 기초는 왕세자 교육을 통해 습득했다.

왕세자는 대부분 궁궐 안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여가 시간을 위한 교육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건강을 위한 체조를 배웠고, 성장함에 따라 점차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특히 활쏘기와 말타기는 국왕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능이었다. 정조는 활쏘기에서 만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자신의 활 솜씨는 어디까지나 집안 내림이라고 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활 솜씨를 가졌던 태조·태종·세조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조선초 왕실에서는 오늘날 폴로와 비슷한 격구가 유행했는데, 태조는 이 경기에서 자신만의 신기술을 선보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예술 교육 또한 소홀하지 않았다. 왕세자는 먼저 시를 짓는 법을 배워야 했다.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국왕과 신하들이 어울려 시를 짓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서예·그림·음악에 대한 소양을 갖추어야 했다. 국왕의 서예와 그림 중에는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중 세종은 악기의 오류를 찾아내고, 정조는 음악 이론서를 저술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왕세자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일을 중시했다. 예의바르고 덕망이 높은 사람의 언행을 따라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로 하는 언교(言敎)보다 몸으로 모범을 보이는 신교(身敎)를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를테면 책을 항상 가까이 하는 부모를 보면서 자란 아이는 굳이 책을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된다는 말이다.

왕세자 교육에서 지식보다 생활 태도를 중시한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응석을 지나치게 받아 주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왕세자조차 그렇게 버릇 없이 키우지 않았다. 비만이 바보를 만든다고 과식이나 편식을 못 하게 했고, 아침을 거르거나 늦잠을 자는 등 흐트러진 생활을 하면 국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식보다 생활 태도 중시

왕세자 교육은 결국 덕성과 감성, 지식을 함께 갖추는 전인교육이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새로운 정책을 놓고 논란을 벌일 때는 높은 수준의 학문과 설득력이 요구되었고, 군대를 이끌고 행진할 때는 무예와 통솔력이 필요했다. 신하들과 어울리는 연회에서는 시를 읊고 품평할 만한 심미안을 가져야 했고, 어려운 백성들을 대할 때는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는 덕성이 요구됐다.
물론 왕세자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물자가 동원됐다. 시강원에는 20명의 스승과 40여 명의 하급 관리가 배치돼 학문을 가르쳤고, 세자익위사에는 14명의 관리가 배치돼 왕세자를 호위하면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가르쳤다. 한 사람의 훌륭한 국왕을 길러 내기 위해 그만큼 많은 투자를 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해 이처럼 많은 투자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나 대기업을 운영하는 CEO에서 보듯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는 많은 지도자가 있으며, 이들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고 지도할 수 있는 특별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필자는 조선 시대의 왕세자 교육이 현대 사회 지도자 교육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 교육에 앞서 성장 환경을 중시하고, 모범적 인물을 통해 올바른 생활 태도를 익히며, 예술과 체육 교육을 통해 지성과 감성, 체력을 동시에 발달시키려고 했던 교육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김문식 규장각 학예연구사, 성균관대 사범대 겸임교수

역사탐험 2004.4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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