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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

작성자홍대용70|작성시간05.12.11|조회수417 목록 댓글 0

박정희 암살사건에 이어서 암살 미수사건...

모르는 사람들은 미수 사건이 뭐지? 라고 하시는데요...

 

우리에게는 박정희 암살 미수사건보다는  육영수여사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죠.

한번 자세히 알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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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
『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2년 11월)
 
강준만
 

▲문세광(南條世光, 1951∼1974)

경찰을 허수아비로 만든 경호실의 위세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나온 당국의 발표는 의문투성이라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최종 정리를 해보자면, 범인 문세광이 쏜 처음 총탄이 빗나가자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경호실장 박종규가 연단에서 뛰쳐나왔고 박종규를 노린 범인의 총탄에 육영수가 맞은 것이다. 그리고 박종규가 쏜 총탄은 빗나가 합창석으로 튀는 바람에 여고생 장봉화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그간 너무 비대해진 경호실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동시에 박 정권 체제가 사람을 얼마나 수동적으로 만든 체제인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경호원들의 위세는 어찌나 당당했던지 그들은 평소 경찰을 함부로 대했고, 행사 직전에도 경찰들에게 “우리들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
1) 이건개는 1971년 12월 11일 31세의 젊은 나이에 최연소 서울시경국장이 되었다.
부 부본부장을 맡았던 서울시경국장 이건개1)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세광이가 일어나서 연단까지 뛰어가면서 총을 모두 7발을 발사했는데, 연단으로 가는 좁은 복도 양쪽에는 그 당시 중부경찰서를 포함해서 모두 경찰관들이 앉아 있었다. 문세광은 그들이 손을 뻗치면 잡을 수 있는 위치였고 또 발을 걸어서 넘어뜨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계속 문세광이 총을 쏘며 나가는 것을 앞에서 구경하고 옆에서 구경하고 뒤에서 구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총을 다 쏜 뒤에 맨 앞에 있던 세무서 직원이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가? 당연히 경찰의 기본 업무상 국가원수를 향해 저격하는 문세광을 달려들어 체포하든가, 최소한 체포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방관자적인 구경꾼의 자세로 있었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평소의 강압적 지시, 그리고 이런 것은 경호실에서 알아서 하겠거니 하는 방관자적인 자세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경폭격론’에서 ‘국민총화’로

당시 당국은 범인 문세광이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도시락에 숨긴 권총으로 저격을 시도했다고 발표하였다. 문세광은 일본 정부 발행의 여권으로 입국하였고, 일본 경찰에서 훔친 권총을 저격에 사용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한일 양국간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공범자의 색출을 위한 수사협조 및 조총련을 비롯한 반한단체의 규제 등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측은 국내법상의 제약 등을 들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저격 하루 전날인 74년 8월 14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사건 수사 중지(사실상 종결)를 일본에 통보했는데, 일본은 이것과 연계시켜 문세광 사건을 보고자 했다. 즉, 일본의 항변은 “납치 사건이 한국 국가기관(정보부)에 의한 일본의 주권침해 행위이며 그 요원 김동운의 지문까지 나와도 서울 정부가 버티는 판국 아닌가. 왜 문(文)이라는 한국인의 한국에서의 범행을 일본이 책임지고 사죄하란 말인가”라는 것이었다.

▲박정희(1917∼1979)

박정희는 참모들과 대화하면서 일본과 단교(斷交)하는 것은 물론 ‘동경폭격론’까지 거론할 정도로 격앙되었지만, 한국의 국력이 그렇게 세게 나갈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0여 일 간에 걸친 한일간 교섭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8월 27일에는 전국 34개 단체 20여만 명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규탄대회를 개최하였고, 9월 6일에는 시위 군중들이 일본대사관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반일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미국이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개입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일본측이 자민당 부총재 시이나를 진사 사절로 파견하고 사태 수습 협조를 담은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박 정권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일시적으로 다소 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장 지명관은 이렇게 말한다.

“육영수의 유해 안치소에서와 장례 때 흐느껴 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마음을 놓은 박정희 정권은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는지 8월 23일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를 해제하고 투옥된 사람들도 많이 석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동안 충격 요법적인 효과를 나타낸 데 불과했다. 그 뒤에 찾아온 반동이란 더 무서운 것이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해제에 즈음한 특별담화에서 광복절 경축식장에서의 참변을 보고 국민들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정부가 취해온 긴급조치의 참뜻도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8ㆍ15 사건을 계기로 국민총화가 굳건히 다져졌음을 보고 긴급조치를 해제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전혀 다른 시각도 있다. 『월간중앙』 기자 김재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ㆍ4호 해제 조치는 미국 포드 행정부의 압력을 고려해서였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포드 미 행정부는 미 의회ㆍ언론의 압력을 받아 박 정권에 대해 강권 정치를 얼마간 완화하도록 주문을 내고 있었다. 박 정권으로서도 그 해 11월 방한을 앞둔 포드의 체면을 살릴 현실적 필요성이 뒤따랐다. 그 참에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국민총화’ 운운하며 답이 뻔히 내다보이는 주사위를 던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국을 휩쓴 육영수 여사의 추모 물결

육영수 사망 직후 애도의 뜻을 표하기 위해 라디오 및 텔레비전은 5일 간

▲육영수(1925∼1974)

광고가 전혀 없이 방송되었고, 한 달 간 연예프로그램은 전면 중지되었다. 육영수가 쓰러지는 장면이 MBC에서만 76회나 방송된 걸 포함하여 애도와 추모의 뜻을 담은 프로그램들이 한 달 내내 방송되었다.

그런 작위적인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육영수 사망 직후 애도와 추모의 물결은 전국을 휩쓸었다. 할머니와 부녀자들은 빈소에 와서 엎드려 통곡을 했고, 8월 17일 상오에 일반 조문객의 수는 10만을 넘어섰다. 도청마다 마련된 빈소에는 미처 상경하지 못한 지방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육영수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은 1974년을 넘어 75년, 76년까지 계속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1976년 7월 4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 사설에 의하면 어제 7월 3일에 육영수 여사 묘소를 참배한 인원이 1천만 명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육 여사가 국립묘지에 묻힌 지 685일째 되는 저 7월 3일 오후 4시 3분에 꼭 1천만 번째로 참배한 사람은 경북 문경군 점촌읍 6리에 사는 김경자란 여인이었다. 육 여사 묘소 참배를 위해서 오래전부터 여비를 모아서 이제 와서야 성묘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고 하면서 서울 구경도 하지 않고 당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나라 착한 백성들의 순박한 인정에 더없이 흐뭇하기만 하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러한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1976년 목사 고영근은 부흥회에서 “정부가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박정희 대통령 부인의 묘소를 참배케 하여 개인 숭배를 조장하고 있다. 총화유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입한 양주를 먹는다”고 설교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77년 2월 22일 대법원은 상고심(주심 이일규)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면서 “육 여사의 묘소를 집단적으로 참배한 것은 공지의 사실이며 수입 양주에 관한 말은 지도자층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취지이므로 사실 왜곡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사법부 체면 살린 대쪽 판결’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다.


반공(反共) 드라마화

박 정권은 이 사건을 국민의 반공정신 무장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범인 문세광이 조총련의 사주를 받아 이번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이 그런 활용의 초점이었다. 그래서 즉각적인 TV 드라마 제작 명령이 떨어졌다. KBS PD 김연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한의 지령에 의한 조총련의 음모라고 즉각 결론을 내려 온 겨레가 조총련의 만행에 분노를 표할 때, 그 날 따라 토요일이라 12시에 퇴근해 머리를 식히느라 나는 방송국 근처에 있는 당구장에서 탤런트들과 당구를 즐기고 있었다. ……

내가 당구장을 나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바로 집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맞아 주시며 왜 지금 오느냐고 야단을 치셨다. 오후 2시부터 부장이 찾는 전화가 뻔질나게 걸려왔다면서 무슨 사고라도 저질렀나 해서 걱정을 하신 것이었다. 나는 무슨 일 때문인가 하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무조건 택시를 타고 빨리 사무실로 나오라는 명령이었다.

사무실에 도착해 얘기를 들어보니 월요일부터 당장 『조총련』 드라마를 제작, 방송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조총련』이 정부의 정책 드라마라서 시의에 맞게 빨리 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렇게 번갯불에 콩 튀겨먹는 식으로 채근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7920 원
(지식열쇠 98개)
물론 김연진은 그 일을 해냈다.

“방송이 1주 나간 후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수행원을 대동하고 직접 스튜디오로 찾아와 출연자들과 스태프를 격려하고 금일봉을 내놓았을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 가슴마저 뛸 정도였다.”


이와 관련, KBS가 1977년에 발행한 『한국방송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연예프로그램은) 9월 15일에 가서야 재개되었는데 KBS는 문세광을 밀파한 조총련의 내막을 파헤친 일일극 『조총련』을 긴급 편성하여 시청자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 『조총련』은 10월 13일 호평리에 종료되었는데 봄에 방송된 『어선 일신호』와 함께 실화물의 일일극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19호 검사실』에 뒤이어 9월 4일에 시작된 『노동당』은 이 『조총련』의 성공에 힘입어 11월 25일부터 일일극으로 전환되었고 실화극장은 『북에서 온 여인』으로 바뀌었다. 이 해의 연예대상(演藝大賞)은 작품 대상이 『조총련』, 그 밖의 상은 『꽃피는 팔도강산』과 『그리워』로 분산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박 정권의 주장과는 달리, 문세광은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게 아니었다. 박 정권의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재일교포 2세들의 박 정권에 대한 반감이 극에 이르렀는데, 문세광은 김대중 구출 재일한국인대책위원회 오

▲김대중

사카위원회 사무차장이라는 직책으로 군중대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맹활약을 해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육영수 피살 사건의 인과관계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육영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박정희도 “납치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면서 비통해했다는 증언도 있다. 문세광은 선고 법정에서 “나는 육 여사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해 이후 과연 누가 진범인가 하는 걸 놓고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수사본부 요원으로 현장검증과 감식을 했던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도 월간 『다리』 1989년 9월호에서 그런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건우는 후일 기자 노가원에게도 육영수를 가격한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

『국민일보』 1990년 5월 17일자는 <육영수 암살 진범은 이 사람>이라는 제하의 1면 사진과 5월 24일자, 31일자 시사토픽을 통해 ‘육 여사 암살 진범은 문세광이 아니라 청와대 경호원’이라는 보도를 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국민일보』는 노가원이 이건우의 증언을 전해들은 걸 계기로 취재팀을 구성해 다각적인 취재 끝에 보도했던 것인데, 그만 최종 확인을 건너뛰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국민일보』는 암살 음모 관련자로 이름이 거명되었던 신 아무개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2천400만 원의 위자료를 물어 주어야 했다.

  참고문헌

Ω김연진, 『내 연출 내 젊음 35년: 김연진의 TV 비망록』(다인미디어, 2000), 154∼156쪽.

Ω김재명, <유신체제의 버팀목 긴급조치의 남발>, 『월간중앙』, 1991년 9월, 378쪽.

Ω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2』(동아일보사, 1992), 52, 133∼134쪽.

Ω노가원, 『청와대 경호실: 군사 정권 30년 비사』(월간 말, 1994), 333, 343쪽.

Ω노신영, 『노신영 회고록』(고려서적, 2000), 182∼183쪽.

Ω선우종원, 『격랑 80년: 선우종원 회고록』(인물연구소, 1998), 309쪽.

Ω송인수, <법원 100년 세태 100년: 사법부 체면 살린 대쪽 판결>, 『동아일보』, 1995년 4월   25일, 29면.

Ω<오보 이야기: ‘육영수 여사 암살 진범’ 보도>, 『미디어오늘』, 1995년 11월 15일, 9면.

Ω육인수의 증언, 『신동아』, 1987년 11월호, 335쪽.

Ω이건개, 『동굴의 대통령 열린 대통령』(학연사, 1996), 42∼43, 151쪽.

Ω이환의, <내가 본 그때 그 순간의 대통령ㆍ박정희: “집사람 쓰러지는 장면도 보여줘”>, 월간조   선부 엮음, 『비록 한국의 대통령(월간조선 1993 신년호 별책부록)』(조선일보사, 1992),   187쪽.

Ω임희순, <8ㆍ15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박 대통령, 물 들이킨 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월간조선 엮음, 『한국 현대사 119대 사건: 체험기와 특종사진』(조선일보사, 1993), 223쪽.

Ω정재경, 『위인 박정희』(집문당, 1992), 309쪽.

Ω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 장면』(다섯수레, 1996), 130쪽.

Ω진혜숙 편저, 『육영수 여사: 그 생애와 업적』(산마음, 1983), 264∼266쪽.

Ω한국방송공사,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585쪽.

Ω한승헌, 『불행한 조국의 임상노트: 정치재판의 현장』(일요신문사, 1997),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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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한국 현대사 산책:197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2년 11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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