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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선사시대의 집

작성자정경연68|작성시간05.12.11|조회수437 목록 댓글 0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자연 동굴을 집터로 이용하였다.  그 예로는 평안 남도 상원의 검은 모루 동굴, 충북 제천의 점말 동굴, 충북 청원의 두루봉 홍수굴, 북제주군 애월읍의 빌레못 동굴 등이 있다.  

   한편, 강가 등지에서 집을 짓고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 함경북도의 동관진이나 굴포리,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 등이 있다. 공주 석장리의 후기 구석기 주거지는 기둥자리, 화덕 자리, 담자리가 있어, 당시의 집은 기둥을 세워서 만든 막집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집터는 동서 7.5m, 남북 7m 정도로 적게는 3내지 4명에서 많게는 10명의 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구석기 시대의 집자리 유적은 구석기인들이 집단적으로 음식물을 찾아 이동하는 무리사회(群社會:band)로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6000년 이후,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해변과 강가, 호수가에 집을 마련하고 고기잡이와 짐승들을 잡아먹고 살던 사람들로, 이들은 주로 움집(竪穴住居;수혈주거)을 만들고 생활하였다.

<서울 암사동 신석기시대 움집터>    

<복원한 신석기시대 움집>

         

   이들 움집터를 보면, 평면의 형태는 원형·타원형 그리고 네 모서리를 둥글게 죽인 네모평면을 이루며, 땅으로부터 40㎝에서 1.5m 정도의 깊이로 파서 바닥을 만들었고 중앙에는 불을 지핀 화덕자리가 있었다. 이들 집터에서 발견된 것은 기둥자리·서까래 조각 등으로, 집의 모양을 추정하면 집터 바닥에 세운 기둥 사이에 가로로 굵은 나뭇가지를 엮어 이곳에 서까래를 땅위에서부터 걸쳐 풀·나뭇가지·흙 등으로 지붕을 만든 움집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움집 속에서 남자들이 쓰던 석기와 여자들이 사용하던 토기들이 서로 반대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을 보면, 하나의 공간 속에서도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지탑리유적에서 피와 조의 탄화된 알갱이들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농경생활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며, 이는 장차 단순한 집만이 아니고, 곡물을 쌓아둘 곳간의 건축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고, 이의 원시형이 저장움의 출현이다.

   신석기인들이 집을 만들 때,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든 이유는 만들기 쉬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정 깊이 이상의 땅속은 온도변화가 적어 추위를 쉽게 견딜 수 있었고, 또한 건물의 높이를 낮추어 거센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움집은 사람이 자연을 가공하여 만든 최초의 인공주거로서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경험적 지식의 축척과 기술 및 도구의 발달에 힘입어 만들어졌고,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한 곳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 우선 지금까지의 도구가 석기였던 것에서 금속기로 바뀌기 때문에 자연히 주택건축도 이에 따라 한 걸음 나아갈 것이라는 것이 추측된다. 이들 금속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적을 때는 여러 채, 많을 때에는 100여 채의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면서 농사·고기잡이·목축으로 생활하였다.

 

 

   이들 집들은 하천이나 평야에서 가까운 낮은 야산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집자리 평면은 네모 또는 길쭉한 네모로서 대략 그 크기는 4∼5×5m, 4×7m이며, 땅으로부터 50∼100㎝ 정도 파서 바닥을 만든 것이었고, 중앙에서 안쪽으로 조금 치우쳐 화덕자리가 있었다. 또 이들 집터 중에는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제2호에서처럼 칸막이 흔적이 있는 것도 있으며, 또 신석기시대처럼 저장공(貯藏孔;저장을 위해 땅에 판 구멍)들이 없는 것을 보면, 따로 저장공간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집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집규모가 커진 점이다.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 덕은리의 것은 B.C. 7세기경의 것으로, 동서 길이 15.7m, 남북 너비 3.7m, 깊이 40∼90㎝ 되는 큰 것이었고 화덕자리도 두개나 나왔다.

 

   초기철기시대의 집은 청동기시대의 집과 큰 차이가 없는 움집이다. 대체로 화덕자리가 벽에 더욱 가까워지거나 화덕대신 구들을 이용한 예가 있다. 움집 내부의 생활공간이 더욱 확대되고 난방시설이 새로이 개발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높이 30cm, 폭 30cm 정도의 흙판을 연이어 붙여 터널형으로 만들고 한쪽에서 불을 피우고 반대편에 연기가 빠지게 만든 새로운 형태의 터널형 난방시설이 우리나라의 온돌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기철기시대의 경기도 수원 서둔동주거지에서는 이른바 “ㄱ자형구들”이 발굴되어 구들고래를 축조하여 난방하는 방법이 이미 기원전부터 출현하여 고구려의 ㄱ자형구들(長坑)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움집은 삼국형성기인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三國時代)까지도 축조 사용되다가 지상에서 완전한 온돌시설이 개발되면서 토담집으로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출처: http://user.chollian.net


*사진이 안떠서 파일첨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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