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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풍속

설탕의 역사

작성자심리김정연16|작성시간06.05.23|조회수458 목록 댓글 0
1. 사탕수수의 고향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벼과 다년초로서 쿠바, 태국, 호주 등 연평균 기온이 20℃ 이상인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재배되며 줄기에 10~20%의 당분이 들어 있다.


설탕을 처음 제조한 곳은 인도지만 사탕수수가 처음 재배된 곳은 태평양 남서부의 뉴기니(New Guinea) 섬이다. 뉴기니 섬의 사탕수수 경작은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탕수수는 이어서 뉴기니 섬 바로 동쪽에 자리잡은 솔로몬 제도로, 다시 동남쪽의 뉴헤브리디즈, 그리고 뉴칼레도니아로 퍼져 나갔다. 기원전 6000년경에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거쳐서 마침내 설탕 생산의 원조국인 인도에 도착했다.


2. 최초의 설탕 생산국, 인도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인도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군대의 사령관인 네아르쿠스(Nearchus) 장군은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reed)’라고 했다. 기원전 320년에 인도를 다녀온 그리스인 메가스테네스는 설탕을 ‘돌꿀(stone honey)’이라고 소개했다.


돌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때 이미 액체 상태의 사탕수수즙이 아닌 결정화된 상태의 설탕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탕수수즙을 끓이고 햇볕에 말려서 만든 이 덩어리는 요즘처럼 고도의 기술로 정제되지 않은 조야한 수준의 설탕으로 원당(原糖)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 중국에 전해진 설탕

이 사탕수수가 중국에 건너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통 그 시기를 기원전 8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사탕수수가 아닌 설탕이 중국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것은 5세기경이다.


중국에서는 한때 설탕을 돌꿀(石蜜, stone honey)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 수입한 하얀 케이크 모양의 돌꿀이 중국에서는 가장 비싼 상등품으로 통했다. 7세기에 중국 정부는 기술자를 인도로 보내 설탕 제조법을 배워오도록 했지만 인도의 설탕처럼 달게 만들지는 못했다.


4. 설탕의 세계화에 힘쓴 마호메트

페르시아에서는 500년경부터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정복지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를 발견한 마호메트 군대는 즉각 그 ‘페르시아 갈대’에 매료되어 정복지마다 사탕수수를 갖고 갔다.


710년에 정복된 이집트에도 군대와 함께 사탕수수가 들어갔다. 이집트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농업 기술과 화학 지식을 동원해 사탕수수 재배 기술과 세척, 결정화, 정제 등의 설탕 생산 과정들을 발전시켰다. 사탕수수는 이집트에서 계속 서쪽으로 이동해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모로코까지 이르렀고 755년 마침내 지중해를 넘어 스페인 남부까지 이동했다.


5. 유럽에 설탕을 전파한 아랍

설탕이 유럽에 전해진 것은 아랍인의 역할이 크다. 아랍인들은 8세기에 스페인을 정복하면서부터 유럽에 설탕을 전하기 시작했다. 11~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설탕 전파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아랍으로부터 설탕뿐 아니라 설탕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시칠리아 등의 지중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랍과 지중해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일이 무척 까다로웠다. 수확을 하기까지 12개월에 이르는 긴 시간이 걸렸고, 그 동안에 30여 차례 물대기 과정이 필요했다. 따라서 물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아랍인들은 이러한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원당 무역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정제 기술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한 부의 축적은 나중에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 지중해 지역은 15세기까지 유럽 각지에 설탕을 공급하는 사탕수수 재배지로 각광받았다. 15세기 중엽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의 아프리카 서해안 섬들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6. 아메리카에 사탕수수를 이식한 콜룸부스

아메리카에 사탕수수가 처음 들어간 것은 1493년에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두 번째 항해를 하면서 카나리아 제도의 사탕수수를 카리브 해의 아이티 섬으로 가져가면서부터다. 아이티 섬을 시작으로 쿠바, 자메이카 등 카리브 해 전역에 사탕수수가 심어졌다.


1535년에는 스페인 탐험가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설탕 공장을 세웠다. 사탕수수는 페루,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로 계속 퍼져 나갔다. 푸에르토리코에는 1547년에 설탕 공장이 세워졌다. 1600년 무렵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설탕 생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산업인 동시에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산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서인도 제도의 설탕 섬들은 영국과 프랑스에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7.사탕무가 설탕이 되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활발하게 설탕을 생산하는 동안에, 식민지가 거의 없었던 독일에서는 사탕수수 이외의 식물에서 설탕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화학자 마르크그라프(Marggraf)는 사탕수수를 대신할 만한 식물로서 사탕무를 발견했다. 사실 사탕무는 마르크그라프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사람들 곁에 있어 왔다. 오랜 세월 사탕무는 채소로 쓰이거나 콧병, 인후염 등의 질환과 변비의 치료제로 사용되었다. 비록 달기는 했지만 마르크라프에 의해서 자당을 다량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기 전까지는 일개 채소에 머물러야 했다.


1747년 마르크그라프는 무의 뿌리로 설탕을 만드는 방법을 신문에 발표했지만 그 제조 과정은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탕무 설탕은 한동안 실험실 속에 갇혀 지내야 했다. 사탕무 설탕이 생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프러시아의 왕 프레데릭 4세이다. 사탕무 생산공장에 대한 지원 요청을 받은 그는 10년간의 생산 독점권과 보조금, 토지 등을 지원했고 그 결과 1801년 드디어 본격적인 사탕무 설탕 공장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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