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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동성애에 관련된 자료가 있어 올립니다..

작성자04-최성은|작성시간06.07.07|조회수364 목록 댓글 1
 

<자료1>로마 황제 별궁 ‘빌라 하드리아누스’ ->동성애에 관련된 자료

슬픔에 빠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름다운 별궁을 지어 그를 기렸다. 해상극장과 대(大)욕탕, 나일강을 상징하는 고즈넉한 못, ‘이탈리아 정원의 표본’으로 불리는 그림 같은 정원이 탄성을 자아낸다.

빌라 하드리아누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카노푸스. 미소년 안티노스의 죽음을 기려 세운 이 못의 한쪽 변에는 이오니아식 원주와 그리스 신상, 그리고 악어 조각이 세워져 있다. 


서기 125년 어느 날 밤,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하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Hadrianus·76∼138, 재위 117∼138)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번을 뒤척이다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달빛이 교교한 정원을 거닐다 재스민색 살결을 지닌 한 소년을 보았다. 얼굴은 물론 어깨선과 손발까지 소녀 같았는데, 달빛을 받아 더욱 매혹적으로 비쳤다. 황제는 그만 소년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안티노스(Antinous)란 이름을 가진 이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 전후. 그리스 전래의 미소년다운 매력을 한껏 흘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도시국가(폴리스)들의 집합체였다. 각 폴리스는 늘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 일종의 전시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남성들은 병영생활을 주로 했고, 그러다 보니 성인남성들은 15세 전후의 미소년을 애인으로 삼아 동성애를 즐기는 일이 빈번했다. 그들에게 동성애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미모의 젊은이를 사랑했다고 하니까.

이에 비해 로마는 제국답게 동성애를 떳떳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황제였기에 미소년을 가까이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날 이후 황제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개를 끌고 다니듯이 안티노스를 자신의 순방 길에 데리고 다녔다. 따져보면 빌라 하드리아누스도 그의 여행벽과 그리스 취향, 이 둘의 합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서아시아를 향해 가장 긴 세 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준비를 한 곳도 이곳이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이집트에서 죽은 안티노스를 떠올리며 몸을 뒤척였던 곳도 이곳이다. 건물의 구조와 형태, 장식, 명칭 등이 로마 고유의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와 이집트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빌라와 그리스 취향을 한데 묶어놓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안티노스란 미소년이었다.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 미소년을 데리고 다녔고, 또 그를 어떻게 대했으며,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선왕인 트라야누스의 영향을 받아 사적인 감정을 매우 절제했던 그였기에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후세의 우리는 단지 상상력을 발휘해 그때의 상황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이집트 여행도 거의 끝나갈 무렵 황제 일행이 나일강 유람에 나섰다. 그런데 나일강을 거슬러 300km쯤 내려갔을 때 안티노스가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악어에 물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었다. 황제는 다행히 그 장면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보를 접하자 곧장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안티노스가 벗어놓은 옷가지와 샌들을 보고는 아녀자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누구보다 절제력이 강했던 그가 이렇듯 황제의 체통도 잊어버릴 만큼 평정심을 잃은 것이다.

안티노스를 처음 만난 지 5년. 열다섯 살의 미소년이 스무 살을 바라보는 청년으로 모습이 바뀌어가던 때였으니 이 일은 서기 130년 전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황제는 안티노스를 신격화하고, 사고가 났던 건너편 강변에 그리스 스타일의 신도시 안티노폴리스를 건설해 그곳에 안티노스의 신전까지 세웠다. 그런 다음에 이집트인들을 그곳으로 대거 이주시켰다.

하드리아누스 대제는 자신이 정무도 보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궁전 겸 별장, 즉 별궁을 다른 황제들과 달리, 로마 시내가 아니라 교외의 한적하기 짝이 없는 언덕 위에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로마의 역사는 기원전 753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 형제가 팔라티노(Palatino) 언덕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우며 시작됐다고 한다. 역대 황제들 또한 거기에다 궁전을 세우고 살았다. 왕궁을 뜻하는 영어의 ‘palace’란 말도 팔라티노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운 왕궁 유적인 도무스 아우구스투스가 남아 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이들과 달리 로마 시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티부르티니 언덕 120ha의 대지에 ‘빌라 하드리아누스(Villa Hadrianus 또는 Villa Adriana, 영어로는 Hadrian’s Villa)’, 즉 하드리아누스 별궁을 세운 것이다.

  

황제가 사랑한 소아시아 태생의 미소년 안티노스.

그에게서 관능미는 몰라도 지성미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아무튼 동성간의 사랑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기 십상이다. 사랑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가 가져야만 오래 지속될 수 있는데, 동성끼리는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안티노스의 경우 황제가 가지지 못한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기에 둘의 관계가 그나마 유지될 수 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같은 미모가 안티노스에게서 사라져버린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세계 유명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안티노스의 두상 조각을 보면 헝클어진 머리에다 리본까지 달고 있다. 눈은 아래로 내리깔고 있으며, 입도 소녀의 그것처럼 작다. 대신 입술은 두툼하다. 사랑을 갈구하는 여린 그의 모습에서 지성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의 모습이 그러했는지, 아니면 황제의 눈에 그렇게 비쳤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어떤 경우가 됐든 황제가 자신의 말벗으로 안티노스를 대동하고 다닌 것은 아닌 듯하다. 원래 학구열이 대단하고 학식도 풍부한 황제인지라 젊은, 아니 어린 소년이 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료2>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문화적 영웅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차이코프스키, 프란시스 베이컨, 비트겐슈타인, 랭보, 푸코에 이르기까지….

로마제국에서는 상류층의 동성애가 허용됐으며, 유럽의 기독교인도 처음에는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이었다고 한다.

16세기 초, 영국의 헨리 8세는 동성애를 종교 차원을 넘어 사회 범죄로 낙인찍었다.

그는 동성애자를 사형으로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한때 영국에선 살인보다 동성애로 처형된 사람이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과학동아 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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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에 관련된 자료를 좀 더 찾아보았다. 로마시대 때 동성애가 모두에게 허용된 것이 아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처럼 상류층 또는 권력 있는 자들과 같은 소수에게만 허용되었을 지라도, 안티노스에 대한 황제의 사랑, 즉 동성애에 대한 지금의 관념을 확 깨는 행동들이 많이 놀라웠다.

나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과거 로마시대 이전에는 동성애가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사고였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어떤 것에 대한 선입관을 가짐으로써 내 판단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동성애 허용도 그 당시에서만 받아들여졌던 한 문화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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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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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다희(국제경영2) | 작성시간 05.03.18 크리스트교에서는 동성애를 금기시했다고 했는데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처음에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건 순결을 중시하던 크리스트교와는 살짝 다른 내용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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