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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 명조

辰月甲戌 己丑生 - 우민정치의 대가 안토니오 살라자르 명조

작성자松栢 조흔|작성시간18.01.01|조회수187 목록 댓글 0

살라자르 - 포르투칼 독재자 | 명리마을 

도무사 | 2018.01.01. 09:53 | http://cafe.daum.net/sajusajucom/FXAa/9961  

 

살라자르 - 포르투칼 독재자

이름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생몰년 : 18890428~ 19700727

출생지 : 포르투갈 산타콩바당 / 사망지 : 포르투갈 리스본

정당 : 국가연합 / 종교 : 가톨릭 / 배우자 : 없음

 

성명: 안토니오 살라자르, 남자

생년월일: 1889년 0428일 오후 15시 정각 / 출처: 출생증명서

출생장소: 포르투칼 Vimieiro, 40n24, 8w08 / 시간대: LST m9w08 (지방표준시간)

 

양 력: 1889042815:00 .. /: 1889032915:00 남자

 

87 77 67 57 47 37 27 17 07.10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 壬 甲 戊 己 : 82乾命

未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卯 - 申 戌 辰 丑

 

* 사망일자: 1970(82, 庚申대운 庚戌) 0722일 질병으로 사망.

* 부친은 농부출신으로 작은 땅을 가진 소지주,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관저에서 혼자 은둔생활을 했다. 신미시일 가능성도 있다. * 1916년 코임브라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가 됐다.

* 1926년 장군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재무장관으로 기용됐다.

* 1932(44, 甲子대운 壬申) 0705일 총리로 취임. 이후 독재자로 변했다.

* 1968(80, 庚申대운 戊申) 0916일 해먹에서 떨어져 혼수상태에 빠졌다, 새로운 후임 수상을 선출하였는데 몇 달 후에 다시 깨어나 정상적인 활동을 하게 됨. 이후 측근들이 여전히 살라자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 1970(82, 庚申대운 庚戌) 0722일 질병으로 사망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출처-나무위키

 

1. 개요

 

처음에는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마음을 바꾸어 코임브라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1916년 동 대학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26년 장군 카르모나의 쿠데타가 성공하여 재무장관으로 기용된 후 1932년 총리가 되었고, 국민통일당을 조직하여 일당독재를 추진하였다. <Estado Novo(이슈타두 노부, 새로운 국가)> 운동을 <Deus, Pátria e Familia(하느님, 조국, 그리고 가족)> 이란 슬로건으로 진행했다.

 

2. 우민 저개발 독재

 

경제학 교수라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반적인 독재자와는 달리 경제학자 출신으로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이 된 인물이었다. 재임기간 동안 세계 대공황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드높아지는 권세 앞에 1930년대 후반 쯤 되면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조차 꼭두각시로 전락, 사실상 포르투갈을 한 손에 쥐었다. 자신의 정책을 유지하지 위해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으며 3F 정책이라 불리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축구,(Futebol) 종교,(가톨릭) (Fatima) 그리고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민속 음악)

 

게다가 경제학 교수라는 이력과 어울리지 않게 산업화와 근대화에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보여 포르투갈의 경제 발전을 가로막았다. 20세기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낭만적 목가주의자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을 공업화 된 강력한 패권국가로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근대적 산업혁명의 광풍으로부터 벗어난 안전한 농촌국가로 만드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것이 30여 년 장기집권의 비결이었다.

 

먹물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면서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사실 초등교육은 기본 교육이라며 더 늘렸다. 지원을 별로 안해서 문제였지. 그래서 결국 포르투갈을 문맹률 40%로 만들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해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심지어 2차 대전 당시 전 유럽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과 연합국 모두에 물건을 팔아먹었을 정도.


그러나 더딘 산업화로 인해 6,70년대 많은 포르투갈 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후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다른 유럽 국가들로 유출되었으며, 덕분에 포르투갈의 최대 수출품은 포르투갈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현재도 이러한 경향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단지 다른 유럽 국가들도 독일 등 일부를 빼면 막장이다 보니 이민 대상이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등 번영하는 옛 식민지로 바뀐 정도다. 대항해시대에 신이 포르투갈 인들에게 요람으로 작은 포르투갈을 주고, 무덤으로 세계를 주었다는 말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3. 외교 정책

 

2차 세계대전의 독재체제였지만 살라자르 본인은 파시즘의 열광적 대중동원이나 대외적 팽창주의를 혐오하며 안빈낙도(...)를 추구했다. 그럼에도 살라자르 치하의 전체주의 체제였다. 어쨌든 포르투갈에 전체주의 독재정권이 들어서게 된 것에는 포르투갈 파시즘 운동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재체제임에도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고 아조레스 제도 등의 군사기지를 영국과 미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기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서 OECD, NATO 등 국제기구 창설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 사망

 

말년인 1968년에는 해먹에 앉아 있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로 쓰러졌다. 당시 포르투갈의 대통령직은 의례적인 존재일 뿐이었고 그가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다른 정치가들의 모략으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렇게 모든 권력을 상실했으며 마르셀로 카에타노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살라자르는 몇 달 뒤 의식을 되찾았으나 이미 완전히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건강이 나빠진 살라자르가 이 사실에 충격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고, 이런 부하들을 둬야 한다. 조작된 신문을 바쳐서 여전히 살라자르가 권력을 잡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살라자르는 아무 의미도 없는 명령서에 사인이나 하면서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모르고 있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사망했다. 아무래도 TV나 라디오는 잘 안 본 모양이다. 실사판 굿바이 레닌아니 굿바이 살라자르, 또는 트루먼 쇼를 찍다가 간 사람(). 이 부분은 2017123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그가 죽은 뒤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은 결국 식민지였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마카오만 제외하고 모조리 포기한다. 사실 마카오도 반환하려고 했는데 중국 정부가 서방에 대한 창구로 써먹으려고 거부했다(...)

살라자르 사후 포르투갈의 민주화는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군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살라자르 생전에 미발달된 경제로 인해 장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그 해법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권한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귀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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