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안에 계신 하나님
말의 힘, 은유의 힘
1.1. 말의 힘
말의 힘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트려보자!
황인숙
1.2. 은유의 힘
만찬
덥석덥석 어미 좀 껴안지 마.
-어디 잔치집이라도 다녀왔어요?
어째 이리 배가 불룩하데?
-먹긴 뭘 먹어.
너 기다리느라고
신작로 끝자락
눈요기한 것밖에 없는데.
-아버지도 안 계신데
상상임신이라도 했나?
-미끈하니 보기 좋지?
젖이 이사 와서 그려.
떡하니 젖퉁이가 받쳐주니까
고무줄 바지도 내려가질 안 해.
-땅속에서
누가 잡아당기나?
-어미젖은 이제 하체여.
어미도 롱-다리라니까.
이정록
2. 시가 내게로 왔다
시가 내게로 왔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였는지 강에서였는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아니,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거기에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의 입은 이름 부를 줄 몰랐고 나는 눈멀었었다.
그런데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이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하게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이,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순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만신창이가 된 구멍 뚫린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내 자신이 심연의 순수한 일부임을 느꼈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파블로 네루다
3. 시와 신앙
시인 예수
그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
새벽의 사람
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고요한 기다림의 아들.
절벽 위에 길을 내어
길을 걸으면
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
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
사람의 바람.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용서하는 들녘의 노을 끝
사람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워 하는
아름다움의 깊이.
날마다 사랑의 바닷가를 거닐며
절망의 물고기를 잡아 먹는 그는
이 세상 햇빛이 굳어지기 전에
홀로 켠 인간의 등불.
정호승
4. 시의 값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 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주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빚은 빛이다
아무도 따 가지 않은
꽃사과야,
너도 나처럼 빚 갚으며 살고 있구나
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며
겨우내 시들어가는구나
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아 있다는 게
오늘은 웬일인지 마음 놓인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 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겠지,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야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사과야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어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 가고 있어.
나희덕
사람의 몸값
금이나 은은 냥(兩)으로 따지고
돼지나 소는 근(斤)으로 따진다.
사람의 몸값은 일하는 능력으로 따지는데
일급(日給) 몇 푼 받고 일하는 사람도 있고
연봉(年俸) 몇 천만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한 푼의 동전에 고개를 숙이는 거지도 있고
몇 억의 광고료에 얼굴을 파는 배우도 있다
그대의 몸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은가?
그대가 만일
몇 백의 돈에 움직였다면 몇 백 미만이요
몇 억의 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면 몇 억 이상이다
세상에는
동장의 자리 하나에도 급급해 하는 자가 있고
재상의 자리로도 움직일 수 없는 이도 있다
사람의 몸값은 세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가 결정한다.
임보
5. 시와 일상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이문재
부엌을 기리는 노래
여자들의 권력의 원천인
부엌이여
이타利他의 샘이여,
사람 살리는 자리 거기이니
밥하는 자리의 공기여
몸을 드높이는 노동
보이는 세계를 위한 성단聖壇이니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향기인들
어찌 생선 비린내를 떠나 피어나리오.
정현종
우리 동네 목사님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이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기형도-
죄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함민복
예언자
이런 빌어먹을
새벽부터 가늘게 뜬 눈으로
고운 햇살을 빌어오고
어제는 밤늦도록 톡톡
머리맡에 떨어지는 위로를
다 받아 발끝까지 데웠지
한때는 큰맘 먹고
빌어먹지 않겠다고
이 악물고 뛰었고
이리저리 힘차게 펄럭이다가
손에 쥔 것은 지나가는 바람뿐
빌어먹을 년
엄마의 엄마가 말했지
평생 빌어먹는 엄마의 발꿈치는 돌이 되고
숨죽은 버선코는 날마다 꿀럭꿀럭
네까짓 것이 무슨 일을 하겠니
한껏 빌어먹을 것이 소명이지
빌어먹는 년
욕을 넘어선 축복
빌어먹는 이야기
하늘 향해 빈손 드는
대책 없는 사람 되라는
할머니 예언자의 백번 들어도 좋은 욕
김주련
빌어먹는 것이 큰 흉인 줄 알고 내 힘으로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빌어먹을 놈이 큰 욕인 줄 알고 절대 손 안 벌리겠다고 장담을 했다
그럴수록 비굴해지고 그럴수록 비정해지고 그럴수록 비루해지더라
빌어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빌려주지 않으면 살릴 수 없고
빈 손 들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더라.
빌어먹으니 친구가 생기고 빌어주니 이웃이 생기고 빌며 살니 하늘이 생기더라.
6. 시와 사랑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7. 시와 환대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시든 꽃에 반하다
시들어가는 꽃을 보면,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가,
입술에 닿은 깃털의 촉감 같은 목소리로
“아직 햇빛이 반할 만하오”라고 속삭여주어야지.
황선하
8. 시와 나
나의 시인
-윤동주
-임영조, 김용택, 이해인
-백석, 김수영
-천양희, 김혜순, 김행숙, 김소연, 황인숙, 고정희, 문정희, 김경미, 허수경
-김기택, 손택수, 박성우, 기형도
-김남주, 박노해, 신동엽, 조태일, 김준태, 신경림
-이성복,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최하림, 마종기, 박재삼, 송수권, 황지우, 이성복
-이문재, 나희덕, 정호승, 안도현, 도종환, 함민복, 장석남, 장석주, 이성부, 김경주
아이비의 꿈
오르리라
마른 등걸 타고
순백의 갈증을 내던졌던
고결한 그대의 뜻을 따라
목숨을 사랑했던
그대의 인내가
마침내 시푸런 감꽃 꿈을
차가운 절벽 위에 수놓았을
때,
난,
기적을 보오 기적을 보오
그대 보내고
파르르 갈색 어두움이 찾아오는 날에도
난
너무 오래 아프지 않으리오
바람이 한 줌 머물다 갈 적에
가벼이 가벼이 날 실어올리시면
이른 새 날
시린 서리 머금은 가슴으로
당신의 애마른 꿈 위에
하얗게 내려앉으오리이다
그 날
그대 위해
빛 속을 오르리라
비워진 한 마리 하루살이가 되어
내일 다시 허락하실
녹색의 꿈을 꾸며.
아이들은 해 아래서
아이들은 해 아래서
잘 살고
잘 놀고
잘 큰다
놀다가
밥 때가 되어
해가 집으로 가면
아이들도
놀던 흙, 놀던 땅, 놀던 물 그대로 두고
집으로 간다
한낮에 바닷가에 그어놓은 선도
쌓아놓은 모래성도
파도에 넘겨주고
다 잊고 다 지우고 푹 잔다
또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힘껏 산다
힘껏 논다
힘껏 큰다
아이들은 해 아래서.
9. 시와 사람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 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박찬
바다 시인의 고백
그곳에서 이곳까지 바다를 업고 왔다고 그가
말한다 파도처럼 철썩철썩 세상의 귀싸대기
때리며 말한다 끼룩끼룩 말한다 해풍 벗고
온몸으로 힘쓰는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한다
뻐끔뻐끔 아가미를 벌리듯 물고기처럼 그가
말한다 방파제처럼 단단해진 어둠속에서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눈을 낚아챌
것이라고 말한다 해안을 쓰면서 반대편을
써보려고 수평선을 쫘악 갈라놓을 것이라 그가 말한다
대개 절창이란 자신을 절단낸 뒤에야 오는
것이라고 물결 튀기며 그가 말한다 영감의 순간과
불면의 밤이 같은 세계의 겉과 속이라고 말한다 그를
미치게 하는 건 절벽의 확실성이 아니라 반복되는
파도에 대한 회의라고 그가 말한다
절벽을 바라보며 절망 때문에 울었다고 그가
말한다 울음이 한 사람의 언어라면 침묵도
한 사람의 언어라고 말한다 시퍼런 진실은
울음과 침묵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에게 시(詩)는 짐이 아니라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소외와 고독은 자청한 그의 이력이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은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 그가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의 고백이 바로 바닷속에 든
칼날 같은 시다
천양희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