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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티기독인의 주장과 수세이기만 교회 현실

작성자개혁과진보|작성시간13.08.15|조회수30 목록 댓글 0

두 네티즌의 주장

“솔직히 얘기해 보자.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이 모두 사실인가?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진 것인가? 출애굽 사건이 정말로 있었던 사건인가? 노아의 홍수가 전 세계를 사십일 동안이나 뒤덮었나? 정말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나? 개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형성하는 사건들은 그 어느 하나도 역사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 없다. 심지어는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계보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실존의 인물로 밝혀진 사람은 없다. 성경이나 기독교를 애기 할 때에 이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개독들 말고는 모두 기초로 하여 논지를 펼친다. 그런데 오직 개독만이 이런 사실을 믿음이라고 속여가며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못을 박고 모른채 하며 논리, 이성, 증거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변론한다.”

 

한 네티즌의 글이다. 안티기독인이다. 아주 당당하다.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주장에 대해 교회는 수세이다. 나름대로 대응을 하는 경우도 순환논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급격하게 위축된다.

 

“님의 글을 읽으며 우매한 자들이 조금 약간이라도 무슨 말인지를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게 되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성경을 사실(FACT)로 보는 사람들이 사실이 아니면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사실로 들어난 일이 하나도 없는데 맞추어 가며 억지로 믿는다 말입니다. 빨래물 짜내듯이 쥐어 비틀어 짜내면서... 나오지도 않는데도.. ㅎㅎㅎ. 이런 아주 프레쉬한 말씀은 오랫만에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글에 대한 다른 한 네티즌의 응답이다. 진보신학 따르미이다. 대부분의 진보신학 따르미들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앞에 네티즌의 주장이 지극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순환논리의 문제

위의 네티즌이 그렇게도 당당한 이유는 순환논리라는 것 때문이다. 순환논리란 어떤 것을 참이라 가정하고, 그 가정을 또 다른 가정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며, 그렇게 해서 증명된 가정을 자신의 원래 주장을 증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하고, 그 주장의 근거를,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경이 진리이기에 그곳에 기록된 내용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그 내용들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위에서 제기한 물음에 대한 답을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찾고 그것이 참이라고 하기에 순환논리이며 옳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기독교인들은 믿음이라고 속이며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못을 박고 모른 채 하며 논리, 이성, 증거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변론하는 자들이라는 평이 옳다. 진보신학 따르미들이나 거기에서 열외가 될 것이다.

 

나는 믿음이라고 속고 사는 것이 싫고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속이며 살고 싶지 않다. 역사적 사실처럼 못을 박고 모른 채 하며 살고 싶지 않다. 같은 시대에서 같은 책을 읽고 공부하였는데, 논리, 이성, 증거 같은 단어를 사용하며 변론하는 자들이라는 조롱을 받고 싶지 않다. 잘못된 변론을 하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가상의 대화

과연 그의 주장은 옳은가? 진보신학 따르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전혀 아니다. 아주 유치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한번 확인을 해보자. 편의상 일대일 대화 형식으로 전개하겠다. 나와 그의 가상의 대화이다.

 

나 : 바빌로니아라는 나라에 대해 아십니까? 그 : 알지요.

 

나 : 어떻게 그것을 아시죠? 그 : 역사적 문서를 통하여서요.

 

나 : 그렇군요. 그 나라에서는 술의 양을 속여 판 사람을 물속에 던져 넣었다는데, 혹시 아시나요? 모르시면 제가 알려드릴 수도 있답니다.

경우의 수 하나는 그가 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워낙 똑똑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다른 경우의 수는 그가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친절하게 알려준다. 함무라비 법전에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가 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나 :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한번 밝혀 주실래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한번 증명해 보시지요?

이 질문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뻔하다. 하나 밖에 없다. 함무라비 법전에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는 없다.

 

나 : 바빌로니아에서는 술의 양을 속여 판 사람을 물속에 던져 넣었다는데,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달라니 함무라비 법전에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 대답이네요. 그렇죠? 그 : 그렇다.

 

나 :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바빌로니아에 그러한 형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달라니까 그 대답이 함무라비 법전에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란 말이시죠? 그 : 그렇다.

 

나 : 그것 참, 뭐가 다르지요? 성경에 예수님의 존재를 말씀하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 예수님이 역사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논증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 님의 논증과 님이 개독이라는 비난하는 저의 논증이 뭐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전혀 다른 것이 없는데, 혹시 님에게만 그것이 다르게 여겨지시나요?

 

궁금하다.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위에 언급한 한 진보신학 따르미는 뭐라고 대답할지도 궁금하다.

 

역사적 자료와 사실의 상관관계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조선왕조실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것이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역사적 자료에 기록된 내용을 우리는 일차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갈 수는 없는 우리의 한계로 인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자료에 해당된다. 예외가 없다.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가 두 개 이상이어야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는 많은 내용들을 폐기처분하여야 할 것이다.

 

그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역사적 자료에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면 어느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학자들의 몫이다. 여러 자료가 공존할 때에도 그 내용들을 연구하여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역시나 학자들의 몫이다. 물론 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우리는 수용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 : 고고학인가 전설인가>(핑클스타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주 그럴 듯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성경: 고고학인가 전설인가’(핑클스타인)을 읽고(1)‘, (2), (3)에서 밝힌 적이 있다. http://cafe.daum.net/BCRestoration/Nigm/311 312 313에 있다.

 

예수님이 실존인물인가?

그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한 유대인이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속국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반역으로 처형당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교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일 뿐이다. 그러한 예수님에 대해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기록해두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다만 그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고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있다면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는 그러한 결과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라고 하면 순환논리라면서 거부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성경의 내용을 그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록된 내용에 대한 설명도 순환논리라면서 잘못되었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서는 비석을 근거로 말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성경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이는 잘못된 태도이다. 그런 논리라면 함무라비 법전에 대한 오늘날의 지식도 모두 거부되어야 한다. 함무라비 법전의 비석이나 성경의 내용이 적힌 두루마리는 동일한 역사적 유산이다. 우리가 직접 살지 않은 과거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산이다. 순환논리이기에 절대적으로 잘못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부하려면 그에 맞는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기록으로 남겨진 과거의 어떤 일에 대하여 거부하려면 거부하는 쪽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여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나 몇 백 년, 몇 천 년 전의 과거를 직접 겪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한 경우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때에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죽이는 일이 기술되어 있다. 사실이 아니란다. 그것도 당당하게 그렇게 말한다.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니 다른 어떤 역사 기록에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기록한 곳이 없기 때문이란다. ㅎㅎㅎ.

 

인간 역사에 포악한 왕이 아주 많았다. 그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에 발생한 무지막지한 일이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역사 기록물에 기록된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생하였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아무리 포악한 왕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악행이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할 수 있으면 숨기려고 하기에 기록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가 그렇다. 기록되어 우리 손에 전해져서 알려지는 것이 특별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기록자가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헤롯왕의 그 악행이 복음서 이외에는 기록된 곳이 없다고 해서 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아기적 사고이다. 그것이 다른 어떤 곳에 기록되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내가 헤롯왕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유대인 역사가들이 그것이 기록하지 못하게 하고 로마에서 알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설사 그 일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록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떤 형태로든지 조치를 취하였을 것이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단 한 곳의 역사기록물에만 기록된 사건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사실이 아니라고 하여야 하는가? 전혀 아니다.

 

역사기록물의 어떤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곧 다른 기록물의 내용이 근거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충분히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연구를 통하여 어느 것이 옳다는 방식으로 그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같은 사건이 기록된 다른 역사기록물이 없기에 사실이 아니라니...

 

허접한 우월 의식

과학 좀 발달한 시대에 산다고 과거의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권한은 없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그 시대에서 그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만들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니다. 그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기록하였을 뿐이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의 경험 세계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알린 것이다.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는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거짓으로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들이 눈으로 목격한 것이었기 그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그 기록물과 대치되는 기록물을 근거로 하여서 자신이 지지하는 기록물의 내용이 옳다는 논증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전혀 없이 그냥 현대인의 관점에서 수용할 수 없기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러한 일을 행하셨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사고 안에서 그러한 일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식이다. 이것을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 논증인가!

 

무식하면 용감하다

순환논리는 잘 분별하여야 한다. 그것에 해당되면 무조건 잘못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환논리이면 잘못된 것이 있는가 하면 순환논리이지만 잘못된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위의 네티즌들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도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다. 안티 기독인들과 논증을 많이 해봤다. 그들은 어찌 그렇게도 한결 같은지... 위의 내용에 있어서 예외가 없다. 역시나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다. 그들이 다른 부분에서 전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무식해서 용감한 이들의 한결 같은 특징은 알려주어도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의 잘못된 사고를 수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곳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대응은 조롱이다. 토마스 제퍼슨이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 일반의 주장에 대해 조롱이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무식한 거 자랑 그만하고 살거래이, 부탁혀.

 

기독교의 대응

위에 언급한 무식한 안티기독인들의 주장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얼마든지 당당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논증할 수 있으며 논증하여야 한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사고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 이들이 동급으로 무식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자신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우매한 자들이라니... 어이가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정말 의아하다. 자신의 입장에서야 어떤 형태로든지 논증을 제시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다. 성육신, 공생애,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성령을 보내심, 배도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이 모두가 한 실로 꿰어져 있는 구속 역사이다.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 수 있다. 한 구슬이라도 빼려면 실은 끊긴다. 구속 역사의 실을 끊고서 하나님을 만나거나 알 수는 없다. 그렇게 하고서 만난다거나 안다는 하나님은 성경의 신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신일 뿐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논리를 넘어서는 삶이다. 성경적인 삶이다. 이 시대의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의 (율)법을 따르는 삶이다. 산상수훈의 내용, 로마서의 후반부에 있는 삶에 대한 교훈, 신약 성경 전반에 기록된 삶에 대한 교훈 등을 따르는 삶이다. 나는 자유, 평등, 평화, 정의, 인권, 복지, 생태라는 가치를 현재보다 더 온전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같은 일들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나서 비폭력 저항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바를 우리가 힘있게 논증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기에 부끄러울 뿐이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 수구로 변질되어 이 사회에서 신자, 교회, 예수님, 하나님까지 조롱받는 현실이 부끄러운 뿐이다. 언제쯤이면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 안타깝다.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져서 마음이 더욱 아플 뿐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교리와 삶을 세우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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