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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처음만큼 / 엄상익

작성자행복의집|작성시간26.06.07|조회수2 목록 댓글 0



 

처음만큼

 

 

내 나이 70살이 되는 겨울이었다. 나는 동해 바닷가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하얀 파도가 치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긴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 세상이라는 나뭇가지에서 조용히 떨어져 나왔다. 아직 윤기가 있을 때 떨어져 내리는 낙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겨울에도 가지 끝에 매달려 떠는 쭉정이가 되기 싫었다.

 

창으로 허공에 걸린 노란 달이 보이던 날이었다. 혼자 달빛을 덮고 누워 있었다. 지나온 길들의 광경이 파노라마 영상같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까까머리 검정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어둠침침한 독서실에 있다. 칸막이 책상 앞에서 열심히 ‘영어 정해’를 외우고 있다.

 

책과 이불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등에 지고 가야산 해인사의 암자로 올라가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추운 방에 혼자 앉아 있다. 부우하고 문풍지를 울리는 칼바람이 지나갔다. 겨울바람이 소나무 숲을 스치면서 파도 소리를 낸다. 나는 삼십촉 짜리 알전구 아래서 법서를 보고 있다. 멀리 눈 덮인 산속에서 배고픈 짐승 우는 소리가 울린다. 미래의 꿈으로 얼어붙은 몸을 녹인다.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을 떠올려 마음의 온도를 올렸다. 지금의 아내다.

 

가방을 들고 법원으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마에 땀이 번질 거린다. 재판 시간에 맞추느라고 걸음이 바쁘다. 법정은 싸우는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가 매연같이 가득 차 있다. 숨이 막혔다. 재판장의 안경알이 얼음같이 차 보인다. 그게 나의 일터였다.

 

나는 가족의 입에 밥을 넣어주어야 하는 가장이었다. 매일매일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 다녔다. 어두운 저녁 살인 현장에 있을 때 무서웠다. 살아야 했다. 마음의 도화선이 타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서가 제일 위에 꽂혀 있는 영어 신약성경을 샀다. 다음날부터 고시 공부 하듯 그 책을 읽었다. 첫사랑을 하듯 불이 붙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백 삼십번을 읽었다. 속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집 앞 주유소에서 불이 났다. 곧 불이 옮겨붙을 것 같았다. 당황했다. 뛰쳐나가야 하는데 뭘 가지고 나가야 할지 막연했다. 멀리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노란 표지의 신약성경이 눈에 들어 왔다. 성경은 나를 데리고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책과 평생 함께했다. 평택에서 LNG선 스플렌더호를 얻어 타고 동지나 해를 지날 때 읽었다. 인도의 바라나시 새벽길을 걸을 때도 그 책을 배낭 속에 넣고 있었다. 그 책은 나를 바꾸었다.

세상을 보던 시선이 내면을 향하게 만들었다. 내가 진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내면으로 들어온 그 존재가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속에서 주홍빛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인생 항로가 변했다. 거대한 배가 키를 꺽어 천천히 방향을 돌리듯 목적지가 달라졌다.

 

법원 언덕길을 올라가는 내가 숨차 보인다. 백발에 어깨가 굽었다. 그렇게 늙어갔다. 이윽고 바닷가의 한 노인이 보인다. 눈썹이 하얀 노인은 오늘 아침도 그 책의 마지막 부분 한 장을 보고 있다.

‘나는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해 온 것도 보았다.’

 

노인이 된 나는 그랬나?하고 얼떨떨해 한다. 책은 계속 말을 건넨다.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방바닥에 하얗게 달빛이 펼쳐져 있다.

 

서초동 국립도서관의 서가 앞에 있는 내가 보인다.

조병화 시인이 평생 쓴 시를 모은 두툼한 전집을 빼내서 책상 위에 쌓아 놓는다. 그 시를 하나하나 읽어가고 있다. 시 속에서 먼저 간 시인 아내의 텅 빈 방이 나타났다.

등불 하나가 어둠을 녹이는 호숫가 집이 들여다 보였다. 노시인은 저승 갈 노잣돈이 거의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실 거냐고 그분을 향해 중얼거렸다. 떨고 있는 죽은 노시인이 내 마음으로 쳐들어 왔다. 내 속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라붙었다. 외롭고 두렵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게 뭘까? 나는 나를 정직하게 들여다 보려고 애를 쓴다. 신약성경을 보았던 처음의 떨림이 내게 남아 있는 것일까. 모르겠다.

 

달빛 속에서 홀로그램같이 슬며시 한 장면이 나타난다. 예수가 달빛 아래 바위 앞에서 떨고 있다. 쓴잔을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말한다.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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