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옹 (西翁) 스님 (1919-2003)
1919. 10. 10일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시다
1932년 백양사 만암(曼庵)스님을 은사로 득도수계
무문관,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선원 조실 역임
조계종 5대 종정 역임
현재 백양사 운문(雲門) 선원 조실
저서 ; <禪과 現代文明> <臨濟錄> 등
1975. 2. 26 부산시민회관 남북통일기원 대법회법어
2003년 12월13일 고불총림 백양사에서 세수 92세, 법랍 72세로 입적
인간의 역사는 평화 지향적
불교의 진리는 만고불변의 대도(大道)입니다.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도 정신적인 근본바탕은 불교였고 국가사회의 온갖 시련을 이겨낸 지혜와 의지의 바탕으로서 새 역사 창조의 지표가 불교의 진리입니다. 또한 시대적 변천이나 지리적, 인종적 차이를 초월하여 세계와 인생에 관한 보편적 진리로서 언제나 참신한 현실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오신 날’을 민족사적인 차원에서 공휴일로 제정한 것은 정부 당국의 현명한 영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제정기념 「남북통일 기원 대법회」를 한국불교의 요람이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신라의 항도 부산에서 갖게 된 것은 일천만 사부대중과 오천만 동포와 더불어 참으로 뜻 깊은 성사(聖事)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흐름은 한 대립에서 또 다른 대립의 등장으로 분열 투쟁해 간다고 합니다. 때문에 현재라는 상황 속에는 언제나 대립적 상태가 현존한다고 보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의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립이 해소 되었다는 것은 창조적인 역사발전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이 정체되었거나 종결된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래서 대립적인 상황과 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역사발전과 창조의 윤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현재는 대립으로 성립해 있고 또 성립해야 하며 인간의 역사는 평화지향적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분열과 투쟁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사회에 분열과 투쟁이 상존하는 것은 이러한 변증법적인 역사관에 입각하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립과 대립, 분열과 투쟁의 역사관에서는 총화가 성립할 수 없고 동족상쟁, 국토분단 등과 같은 인류의 비극은 불가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불교의 진리가 만고불변의 대도임을 전제한 바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총화는 바로 현재, 영원한 현재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대립과 대립적인 상황은 총화를 바탕으로 하고 총화를 전제로 해서 성릾한 것입니다. 미래에 성취하고자 하는 그런 총화가 아니라 바로 현재라는 상황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총화입니다. 예컨데 이러한 총화의 현재성은 어버이의 사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버이의 자녀에 베풀어지는 사랑은 어버이와 자녀간의 대립에서 쟁취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현재한 사랑」인 것이며 자녀에게 향한 일체 행동의 본질이며 원동력인 까닭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이러한 어비이의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의 한계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무한하게 확대시켜 놓은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라는 것, 자기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초월하여 대아(大我)를 실현하고 창조하는 참 사람의 사랑을 자비라고 합니다.
참사람은 인류를 절대 평등한 것으로 생각하며 또 그러한 생각마저 끊어버린 대자대비행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자비심은 현재한 것이어야 합니다. 먼 뒷날에 자비에 도달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행동이 자비 바로 그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자비심에서 출바하여 자비심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자각해야 할 것은 모두가 참사람의 근원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며 참 사람의 자비를 자기의 이웃과 소속집단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참사람의 자비행이 우리 일천만 사부 대중 속에서 실현되어 갈 때 그것이 바로 총화이고 집단과 집단의 대립 분열이 해소되며 분단된 조국은 평화적인 통일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 만능 주의적 풍조와 나하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 세계에서 참 사람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나 스스로 참 사람임을 확신하고 참 사람답게 행동하려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강대한 타율성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사는 길이며 자비심을 구현하는 길입니다.
우리불자들은 불교적 신심(信心)으로 삽시다. 이 땅의 정치 경제적인 시련과 사상적인 갈등과 방황은 자비의 바탕에 화해의 지표가 있고 자비 행 속에 인간의 인간다운 영광이 있음을 현실 속에서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4.8공휴제정 및 남북통일기원대법회 종정 법어 불기 2519년 2월 26일.
우리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불교가 융성했을 때 우리 민족은 가장 단합이 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모든 인간과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보편적인 바탕 원리로서 여러 개체라든가 특수한 현상들이 여럿이 아닌 하나임을 밝혀 줍니다.
이처럼 불교는 하나라는 바탕에서 자유자재한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을 때 모든 것을 통합하고 화합시킴으로써 민족이 혼연일체가 되어 잘 단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사회적으로 공평하고 단합하여 전쟁 없이 평화로울 때에 크게 발전합니다. 전쟁이 있다든지 서로 불평하여 분열되면 곡 쇠퇴하고 맙니다.
한국 역사상 가장 단합이 잘 되었던 때가 바로 불법을 바탕으로 삼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민족이 평화스럽고, 세계의 인류가 행복하게 살자면 불법이 다시 크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禪)의 현대적 의미
불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파가 있습니다.
가령 팔만대장경 가운데 법화경이 부처님의 경지를 가장 바르게 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도 있고, 또 화엄경이 그렇다고 생각해서 세워진 종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지 하는 바 경전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禪宗)만큼은 의지하는 경전이 없습니다. 선종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근본 자리를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깨닫고 생활하는 불교이지, 경전에 의지하지 아니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문자를 쓰지 않는다.」「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을 교안(敎內)이라고 할 때, 교 밖(敎外)이라는 것은 팔만대장경 밖에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 사람 마음을 바로 가르쳐서, 그 마음 성품을 보는 것이 성불이고 부처를 이룬 것이지 따로 부처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야말로 선종에 있어서 근본 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가령 불립문자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하니까 모두 그 문자를 부정해 버리고 팔만대장경도 부정해 버리는 것이 깊은 선의 경지라고 오해하여 아주 무식한 것이 선인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요사이 서양철학도 선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 철학의 본래전통이라고 하면 이성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거짓이다, 착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이렇게 분별하는 것이 바로 이성 아닙니까? 이렇게 이성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서양철학의 전통이라 하겠는데, 이성철학 그 밑바닥에는 사유(思惟)하는 사람의 정신과 정신의 대상이 되는 물질이 있다고 합니다. 곧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二元論)인데, 정신은 주인이고 물질은 하인과 같은 것이라고 보고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복한다, 패배한다는 것은 바로 욕망인데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육체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생명철학, 욕망철학이 생기고 마르크스와 니이체가 나옵니다.
그래서 19세기 말부터는 욕망철학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적 욕망은 인간의 껍데기일 뿐, 더 깊이 인간을 보면 진정한 실존이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전장에서 죽음의 경험을 많이 해 본 결과 「인생에는 죽음이 있다. 이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현실에서 죽음과 대결해서 죽음을 결의하고 허무 중에 죽음을 숙시하는 데에 인간다운 주체성과 실존이 있다」하여 이성과 감성보다도 더 깊이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죽음과 대결하여 긴장되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 죽음을 응시할 때 이것은 무에 빠진 죽음을 숙시하는 밝은 밤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거기에 바로 인간의 실존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선은 깨달음의 지름길
그런데 이런 것도 선에서는 참선하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사의 절대 모순에 빠져 한 덩이가 되어 의심해 들어가서 결국에는 무의식 상태가 돼서 의식이 끊어져 이것을 초월하여 생사가 없는, 자기 참 모습에서 자유자재하게 살 수 있는, 참으로 인간의 올바른 실존에서, 구경(究竟)의 실존에서 자유자재하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영원의 생명체를 해결하는 것이 선입니다.
하이데거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지만 선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자유자재하게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원리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깊은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참으로 인간의 본래 면목을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은 전부 자기 소견대로 주관적으로 뭉쳐서 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색안경을 쓰고 환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실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모두 환상이고 환각입니다. 주관이 뭉쳐서 현실의식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면 무의식은 무엇인가? 무의식은 의식이 숨어있는 것이어서 무의식도 주관으로 뭉쳐서 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을 타파해서 완전히 주관이 없는 본래의 자기 참 모습의 자리에 가야 환각이아니라 참으로 진실한 자기 본래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다운 인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인간상에서는 말하는 것도 참다운 것이고, 생각하는 것도 참다운 것이어서 참모습의 자격을 갖습니다. 말하자면 이성과 감성을 초월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다시 참모습 작용으로 이성으로도 작용하고 감성으로도 작용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참모습이라는 높은 차원에서는 문자가 참모습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 얼마든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종 계통에서 문자로 된 어록이 다른 종파보다도 역사적으로 더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자를 얼마든지 자유자재하게 그 놓은 경지에서 작용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불립문자입니다. 불립문자라고 하여 문자를 아예 못 쓴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이성적, 감성적 문자는 못 쓴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감각, 감성을 초월한 자기 본래면목, 참다운 인간상, 그 차원에서 문자를 사용하고 그런 초자연적인 경지에서 문자를 사용해야 그게 옳은 문자이지 이성, 감성, 보통 말하는 의식, 알음알이, 지혜로 문자를 사용하면 진리와는 다르고 본래면목 인간상과도 틀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립문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올바른 문자를 사용하자는 것이지, 문자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음알이로 의식과 지혜로 팔만대장경을 자꾸 읽고 연구하니까 자유를 못 얻고, 오히려 팔만대장경의 노예가 되어 올바른 불법을 모르고 깨닫지를 못하고 삽니다.
알음알이를 초월해서, 그 의식을 초월해서 자기 참모습 자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면 그것은 쉽게 말하는 교가 아니라, 교외별전에 대한 교내가 아니라 바로 선지(禪旨)입니다. 조사의 종지(宗旨)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면 팔만대장경만 부처님 조사의 종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말하든 말하는 모든 소리가 전부 부처님 종지이고 조사스님의 선의 종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물소리나 바람소리, 새소리 등, 모든 것이 선의 종지가 되어버립니다. 자기의 참모습 자리에 못 가고 의식에 떨어지고 분별에 떨어져서 보면 팔만대장경은 고사하고 조사스님의 어록까지도 참 법문이 아니라 분별망상입니다. 거룩한 어록(語錄)도 잠꼬대 소리 밖에 안 됩니다.
그러므로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는 것은 그러한 경지나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지 보통 말하는 「무식해야 된다.」는 게 아닙니다. 팔만대장경 밖에 전했다고 하지만 선이야말로 교내요, 팔만대장경의 근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서 교내(敎內)의 안이다. 교내의 내(內)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에서 깨달은 경지는 인간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 자리 참모습입니다. 선이라 하여 이상한 사람이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한 모습으로 이상하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 세상에 한번 나서 자기 참모습을 올바로 알고 깨닫는 것이 참선이지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평등한 자리
자기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밖에 참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자기가 진실하게 사는 거기에 참선이 있고 부처님이 있는 것이지 자기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 자기마음, 사람마음, 근본마음 그 자리가 부처지 따로 성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자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합니다. 누구든지 평등할 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허공과 같이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과 자연 그리고 대우주가 모두 하나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것은 횡으로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가 되는 아주 깊이 있는 평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가 돼 버리니까 대자 대비한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하나고 우주가 하나라는 바탕에서 서로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서로가 자비심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양을 지배하는 철학은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하자」,이것이 그들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변증법 역사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라는 것을 「대립을 투쟁으로 서로 해결해 나가는데 발전이 있다」고 보는데 오늘날은 다 알다시피 지구 인류를 한 번에 파멸시킬 수 있는 핵폭탄 같은 무서운 무기를 개발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인류뿐만 아니라 이 지구까지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사용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대립을 투쟁으로써 역사를 창조한다고 하면 그 무서운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불법의 바탕 위에서 자비와 화합으로 그 대립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면 세계 평화가 형성될 것이라고 봅니다.
역사의 흐름은 하나의 대립에서 또 다른 대립의 등장으로 분열, 투쟁해 간다고 합니다. 때문에 현재라는 상황 속에는 언제나 대립적 상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思考)의 입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립의 해소는 창조적인 역사발전의 총결로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대립적인 상황과 사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역사발전과 창조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각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참사람의 근원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며 참사람의 자비를 자기의 이웃과 소속집단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 만능 주의적 풍조와 나 하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 세계에서 참사람으로서의 자아(自我)를 발견하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스스로 참사람임을 확신하고 참사람답게 행동하려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강대한 타율성을 극복하고 주체적으로 사는 길이며 자비심을 구현하는 길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이 땅의 정치, 경제적인 시련과 사상적인 갈등과 방황은 자비의 바탕에 화해의 지표가 있고 자비 행 속에 인간의 인간다운 영광이 있음을 현실 속에서 보여 주어야겠습니다.
선의 참된 의미
다시 선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선법문은 의식도 초월한 높은 차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법문은 여러 가지 해설을 하면 의식의 경지에 떨어지고 알음알이의 경지에 떨어집니다. 자기의 참모습과는 어긋나 버린다는 말입니다. 선법문은 의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활발하게 말한 것이니까 그렇게 신심으로 마음을 텅 비우고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낭야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낭야스님은 분양스님의 제자인데 자명(慈明)등 그 외 여러 도반과 같이 분양(汾陽)스님 휘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던 곳은 무척 추운 지방이었습니다. 분양스님께서는 낭야스님을 단련하기 위해 재를 뿌리고 찬물도 뿌리고 나가라고 해도 낭야스님은 나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여 임제종(臨濟宗)선을 크게 일으켰다고 합니다.
어느 날 장수 스님이 낭야 스님께 여쭙기를 “허공과 같이 깨끗한 법계라 하는데 어찌 산하대지(山河大地) 차별이 복잡하게 건설이 되어서 시끄럽게 되었습니까?” 하고 의심이 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낭야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청정본연(淸淨本然)커늘 어찌하여 홀연(忽然)히 산하대지가 생겼다고 하는가?” 하시며 큰소리로 꾸짖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의 홀생산하대지(忽生山河大地)와 나중의 홀생산하대지와는 내용이 다릅니다. 먼저는 산하대지 있는 것이 문제였는데, 낭야스님 대답에서는 「어디 산하대지가 있느냐?」이 말입니다.
이 말 한 다디에 장수 스님은 깨달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천동각(天童覺)스님이 송(頌)하기를 「견유불유(見有不有) 번수복수(飜手覆手)로다」하였습니다. 「유를 보고 유가 아니고, 있다고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하고 「손을 뒤집고 손을 엎음이로다. 손바닥을 뒤집기도 하고 엎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산하대지가 어디 있느냐?」고 호령하는 법문은 석가여래가 팔만대장경을 설한 뒤에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법문은 조금도 손색이 없는 법문입니다. 그러므로 낭야 스님의 경지는 석가모니여래보다도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설명하면 알음알이에 떨어집니다. 의식에 떨어져 의식으로 해결되면 참선과 거리가 머니까 착어(着語)를 하나 붙이겠습니다.
산호침상양행루(珊瑚枕上兩行淚)
반시사군반한군(半是思君半恨君)
산호로 만든 베개 위에 두 줄기 눈물
반은 그대를 생각하고 반은 그대를 원망하는 도다.
이것은 옛말로 연시(戀詩)라 할 수 있고 요즘말로는 연애시라고나 할 수 있겠는데, 선에서는 이러한 글을 많이 인용합니다. 선의 깊은 경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참선을 하는 사람도 고목이나 찬 바위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감정이 활발히 살아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그런 경지가 아니고 다른 깊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