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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집에 왜 모르는 사람이 있는 거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고, 내가 왜 이런 변을 당해야 하는 거야. 여러 가지 의문이 순간적으로 밀려왔다.
저항하려고 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다.
“야, 목욕탕에 수건 있지? 몇 장 가져와.”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화난 듯이 되풀이했다. “빨리 수건 가져와. 꾸물대지 말고.”
어둠 속에서 당황한 듯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았다.
하루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심장이 팔딱팔딱 뛰었지만 미약하나마 판단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이 목장갑을 낀 것 같았다.
그때였다. 비스듬히 뒤쪽에서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돼, 하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던 것이다.
그러자 하루미 입을 막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하는 수 없잖아. 그보다 가방 속을 살펴봐. 지갑이 있는지.”
뒤쪽에서 하루미의 가방을 잡아챘다. 가방 안을 뒤지는 소리가 나더니, 있어! 하고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얼마나 들어 있냐?”
“이삼만 엔. 나머지는 이상한 카드뿐이야.”
하루미의 귓가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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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그거야. 됐어. 현금만 챙겨. 카드는 소용없어.”
“지갑은? 명품이야.”
“쓰던 건 필요 없어. 가방은 새 것 같으니까 챙겨.”
얼마 안 되어 발소리가 들렸다. “이거면 돼?”라고 물었다. 이 남자의 목소리도 젊다.
“좋아. 그럼, 그걸로 눈을 가리는 거야. 풀리지 않게 뒤에서 단단히 묶어.”
순간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가 바로 하루미의 눈에 타월을 갖다 댔다. 아주 약하지만 세제 향이 났다. 늘 사용하는 세제다.
그는 타월을 머리 뒤에서 세게 묶었다. 여간해서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 다음에 그들은 하루미를 식탁 의자에 앉히고 양쪽 손목을 등받이 뒤로 당겨 묶었다. 그리고 양쪽 발목을 의자 다리에 묵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목장갑을 낀 손이 계속 입을 막고 있었다.
“지금부터 당신하고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하루미의 입을 막고 있던 리더 격인 남자가 말했다. “그래서 입은 막지 않을 거야. 다만 소리치지 마. 우리는 흉기를 갖고 있어. 소리치면 죽일 거야. 그렇지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작은 소리로 말하면 해치치 않아. 약속할 수 있으면 고개를 끄덕여.”
반항할 이유는 없었다. 하루미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바로 입에서 손을 뗐다.
“미안해.” 리더가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도둑이야. 오늘밤 이 집이 비어 있는 줄 알고 몰래 들어왔거든. 당신이 오리라고는 예상 못했어. 이런 식으로 당신을 묶어둘 계획도 없었고. 그러니 언짢게 생각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