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사적 362호 연산군 부부의 묘(사진 위쪽). 이곳에 딸·사위의 묘도 있다. 연산군의 외동딸 휘순 공주의 시아버지 구수영은 연산군이 쫓겨난 후 아들 구문경과 강제로 이혼시켰다가 많은 비난을 받고 재결합시킬 수밖에 없었다. 권태균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기자 |
연산군은 즉위 초반인 재위 3년(1497) 마치 자신에 대한 후대의 비난을 예언한 듯한 말을 남긴다.
“유왕(幽王)·여왕(여王)이란 이름이 붙으면 비록 효자나 자애로운 자손일지라도 백세(百世) 동안 능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여러 역사책에 써 놓으면 장차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3년 6월 5일).”
주(周) 유왕(幽王:재위 BC 781~771)은 미녀 포사(褒사)에게 빠져 주 왕실을 무력화하고 춘추시대로 접어들게 했던 용군(庸君)이며, 주 여왕(여王:재위 BC 857~842)은 폭정하다가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난 폭군이었다. 연산군이 하지 않은 일까지 역사서에 써 놓아 ‘유왕·여왕’이라고 이름 붙이면 자신이 장차 어떻게 변명하겠느냐는 뜻이다. 연산군은 재위 5년(1499) 8월에도 같은 우려를 했다. 마치『연산군일기』에 자신이 희대의 악한이자 음란한 폭군으로 그려질 것을 예견한 듯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연산군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쫓겨난 직후 시작됐다.
연산군은 재위 12년(1506) 9월 2일에 쫓겨나는데 여드레 후인 9월 10일 정승 및 김감(金勘)이 중종에게 “연산군이 스스로 지은 시집(自製詩集)과 실록각(實錄閣)에 소장된 ‘경서문(警誓文)’을 다 태워 없애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건의했다. 연산군의 흔적을 지우자는 주청인데, 중종이 허락했기 때문에 그날로 불태워졌다. 김감이 이런 주청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경서문’이 자신의 글이었기 때문이다.
‘경서문’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한 달 전인 재위 12년(1506) 7월 29일 바쳐졌다. 그날 연산군이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 거동하자 영의정 유순(柳洵)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서문’을 바쳤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乾)과 곤(坤)이 제자리가 있는 것이다(天尊地卑 乾坤定矣)”는 『역경(易經)』의 한 구절로 시작하는 ‘경서문’의 뒷부분은 “진실로 이 마음이 변한다면 천지와 귀신이 있습니다. 견마(犬馬)의 정성이 삼가고 삼감[삼감]을 이길 수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라고 이어지는데 한마디로 연산군에 대한 충성 맹세였다.
의식이 끝나자 도승지 강혼(姜渾)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며 ‘경서문’을 받들고 실록각으로 가 영구히 간직하게 했다. 영의정 유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올렸지만 ‘경서문’에 백관의 이름이 다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23명의 이름만 올라갔는데, 이들이 연산군이 쫓겨나는 날까지 의정부와 육조, 승정원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했던 핵심 실세였다.
한 달 후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폭정의 동반자 또는 조력자·앞잡이로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먼 오지로 유배되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중종반정 때 23명 중 화를 당한 인물은 단 세 명뿐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 신수근(愼守勤), 그의 동생 형조판서 신수영(愼守英)과 좌참찬 임사홍(任士洪)만 반정 세력에 살해됐다.
나머지 스무 명은 어떻게 됐을까? 놀랍게도 스무 명 전원이 중종을 추대한 공으로 정국(靖國) 공신에 책봉된다. ‘경서문’을 올릴 때의 이들 스무 명의 면면과 직책을 보자.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 판윤 구수영(具壽永), 좌찬성 신준(申浚), 판중추(判中樞) 김감, 우찬성 정미수(鄭眉壽), 판중추 박건(朴楗), 예조판서 송질(宋질), 공조판서 권균(權鈞), 도승지 강혼, 우참찬 민효증(閔孝曾),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 좌승지 한순(韓恂), 병조판서 이손(李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우승지 김준손(金俊孫), 좌부승지 윤장(尹璋), 우부승지 조계형(曺繼衡), 동부승지 이우(李우)’.
연산군이 폭군으로 쫓겨났다면 무사할 수 없는 직책들이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연산군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에 분노해 반정을 준비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의정 유순과 우의정 김수동은 별명이 ‘지당(至當) 정승’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연산군의 말에는 무조건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만 반복하던 인물들이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가지고 무오사화를 일으켜 연산군 폭정의 단초를 열었던 유자광은 반정 정권의 제거 1순위에 올라야 했으나 거꾸로 정국 1등공신에 책봉됐다.
도승지 강혼은 『연산군일기』 12년 7월 5일조에 “연산군이 승정원에 시를 내리면 강혼 등이 극구 찬양하므로 연산군 역시 그 말을 믿어 총애가 더욱 융성해졌다”고 적고 있고, 우부승지 조계형은 반정 당일 수챗구멍으로 도망갔다가 공신에 책봉되자 창성군(昌城君)이란 군호(君號) 대신 수구군(水口君)으로 불릴 정도였다. 좌승지 한순은 여동생이 신수영의 부인인 것을 믿고 조관(朝官)의 머리를 잡아끌 정도로 세도를 부리고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건물을 지을 때 독책(督責)이 성화 같았다는 인물이었다. 유순정을 제외하면 정변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반정 당일 밤 말을 갈아탄 인물들이었다.
연산군이 폐출된 지 20여 일 되는 중종 1년(1506) 9월 24일. 빈청(賓廳)으로 대신들이 모였다. 영의정 유순,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朴元宗)과 유순정·유자광·구수영을 비롯해 여러 재추(宰樞) 1품 이상 고위 관료들이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합동으로 연산군의 아들 문제를 주청하기 위해서였다.
“폐세자 이황과 창녕 대군 이성, 양평군 이인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오래 둬서는 안 되니 일찍 처단하소서.”
세자와 창녕 대군은 왕비 신씨(愼氏) 소생이었고, 양평군과 이돈수는 후궁 조씨 소생이었다. 세자 이황이 열 살이었으니 나머지는 더 어렸는데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청이었다. 중종은 조카들을 죽이라는 주청에 “이황 등은 나이가 모두 어리고 연약하니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다”고 일단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고, 대신들은 다시 재촉했다.
“전하께서 이황 등에 대한 일을 측은한 마음으로 차마 결단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 형세가 오래 보존되지 못할 것입니다.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이에게까지 미치면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대의로써 결단하여 뭇사람의 마음에 응답하소서.(『중종일기』 1년 9월 24일)”
‘혹 뜻밖의 일이 있어서 재앙이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미치면’이라는 말은, 혹 이 아이들 중 누가 왕위에 올라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신들이 살려면 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종은 “이황 등의 일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겠으나, 정승이 종사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므로 과감히 좇겠다”며 네 형제를 모두 죽이라고 명했다. 그렇게 네 형제는 9월 24일 당일로 약사발을 들이켜야 했다. 열 살짜리 큰형 아래 갓난아기를 갓 벗어났을 세 동생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약사발을 마셔야 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의 『연산군일기』는 사약을 내릴 것을 주장한 구수영에 대해 “구수영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세종의 아들)의 사위인데, 그 아들이 또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 들어 간사한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미녀를 사방에서 구해 바치자 왕이 혹하여 구수영을 팔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들 구문경(具文璟)이 연산군의 맏사위였으므로 세자는 며느리의 친동기였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에서 “나라에 도가 있으면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도(道)를 논할 것도 없이 어제까지 임금으로 모셨던 연산군을 배신하고 그 흔적 지우기에 나섰던 것이다. 도대체 연산군 재위 12년의 진실은 무엇일까?
인재들을 죽음으로 내몬 리더의 지적 능력 부족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② 준비 안 된 군왕
무오년, 서옥에서 바라보다(73Χ50cm):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항상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훈구파와 사림 간의 긴장은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를 계기로 폭발했다. 필화(筆禍)사건이 터지면 대(代)를 이은 숙청과 보복의 역사를 낳아 수많은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승우(한국화가) |
성종은 재위 9년(1478) 7월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에게 말 1필을 내려줬는데『성종실록』이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던 원자가 항상 준마(駿馬) 보기를 좋아하므로 내려준 것이다”고 쓴 것처럼 원자를 위한 것이었다. 강희맹은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의 외손자로서 세종의 조카였다.
세 살 때부터 말을 좋아했던 연산군을 성종은 ‘학자(學者) 군주’로 키우고 싶었다. 연산군이 열 살 때인 성종 16년(1485) 12월 형조판서 성준(成俊)이 “세자가 지금 『소학(小學)』『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 등의 책을 읽었으니 서연(書筵)에 청하여 앞으로는 뜻까지 해석하게 하소서”라고 청했다. 서연은 세자가 사부나 빈객 같은 스승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자리이다. 열 살 때 경서들을 읽을 줄은 알았으나 뜻은 해득하지 못했다.
1년 후인 이듬해 11월 서연관(書筵官)이 성종에게 “세자가 『논어』를 다 읽었습니다”고 보고하자 “이제부터『맹자(孟子)』를 읽히도록 하라”고 명한다. 1년 전에도 읽었다는『논어』를 이제야 다 읽었다는 보고는 세자의 학습이 지지부진함을 말해 준다. 과연 성종은 재위 23년(1492) 1월 승정원에 직접 전교를 내려 “세자가 지금 17세지만 문리(文理)를 해득하지 못해 내가 심히 근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고의 학자들에게 조강·주강·석강으로 하루 세 번씩 집중 교육을 받았음에도 연산군은 17세까지 문리를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종은 세자의 학습 순서를 바꾸었다. 원래 사서(四書) 등을 통해 유학적 세계관을 형성한 다음 구체적 사례가 담겨 있는『사기(史記)』 같은 역사서로 넘어가는 것이 세자의 학습 순서지만 역사서를 먼저 보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동부승지 조위(曺偉)가 성종 23년 “『사기』를 읽으면 문리가 쉽게 통합니다”며 역사서를 먼저 읽게 하자고 제안했고, 성종도 “그렇다. 영의정이 일찍이 ‘『춘추(春秋)』를 읽히는 것이 옳다’고 하였고, 나도 또한『춘추』는 선악을 포폄(褒貶:옳고 그름을 판단함)한 책이며 치란과 득실이 담겨져 있으니 역사라고 생각한다(『성종실록』 23년 1월 29일)”고 동의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연산군의 학문이 진취했다는 기록은 없고 “왕(연산군)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를 통하지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학습은 지지부진했다. 연산군은 시(詩)를 좋아한 반면 경전(經典)을 싫어했는데, 이는 유교국가 조선의 국왕으로는 큰 결점이었다.
호문(好文)이자 호색(好色)의 군주였던 성종이 서른여덟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연산군은 1494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했으나 왜 유교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즉위 직후 연산군은 수륙재(水陸齋)를 놓고 유신(儒臣)들과 처음 충돌한다. 성종의 영혼을 위한 불교의 천도제였으나 대간에서 “대행 대왕이 불도를 본디 믿지 않으셨는데, 이제 칠칠일에 수륙재를 지낸다면 효자가 어버이를 받드는 뜻이 아니니 지내지 마소서”라고 반대했다. 연산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지내려다 홍문관과 승정원까지 반대하자 후퇴했다가 다시 강행하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한마디로 국왕이 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왕이 된 이후 학문을 더욱 등한시했다. 연산군 6년(1500) 10월 사헌부에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는 경연(經筵)에 나오시는 날이 얼마 되지 않아 6년 동안『통감강목(通鑑綱目)』 1부(部)도 아직 다 진강(進講)하지 못했습니다”고 상소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경서(經書)는 물론 역사서도 읽지 않다 보니 국왕 자리가 지닌 고도의 정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연산군의 무지를 파고든 사건이 재위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 4년 7월 1일 윤필상·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유자광(柳子光) 등의 대신들이 국왕이 거처하는 편전(便殿)의 정문인 차비문(差備門)으로 와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연산군의 처남이자 도승지였던 신수근(愼守勤)이 안내했다. 예문관 사초 담당자인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하려 하자 신수근이 “참여해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당시 조정은 비사를 아뢰겠다고 요청한 훈구 세력과 이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사림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훈구 세력의 약화가 자신에게 부과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나 사림의 간쟁(諫爭)을 귀찮아했던 연산군은 오히려 훈구 쪽으로 경도돼 있었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洪士灝)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愼克成)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으나 외인(外人)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처럼 군사작전 하듯 비밀리에 명령을 내렸다. 홍사호 등이 달려간 곳은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풍질(風疾)을 치료하고 있던 경상도 청도군(淸道郡)이었다. 의금부 도사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라고 예견했다.
처음 문제가 된 사초는 ‘세조가 의경세자(덕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權氏) 등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는 것으로서 세조가 며느리들을 탐했다고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은 국문에서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고 말해 단독 소행으로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는 유자광 등이 ‘비사’를 알릴 때의 계획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조선 중기 허봉(허봉)은 ‘유자광전(柳子光傳)’에서 ‘유자광은 옥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해 밤낮으로 단련하는 방법을 모색했다’면서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꺼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추관(秋官)들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지칭해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친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답계역(踏溪驛)에서 잘 때 꿈에 초(楚)나라 의제(義帝)가 나타나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고 하소연하므로 꿈에서 깨어나 의제에게 조문했다는 내용의 글이다. 정축년 10월은 단종이 살해당한 달이므로 의제는 단종을 뜻하는 것이다.
‘술주시’는 중국 남북조 때 송(宋)의 유유(劉裕:362~422)가 동진(東晉) 공제(恭帝)의 왕위를 빼앗고 죽인 것을 애도한 시로서 이 역시 세조가단종을 찬시( 簒弑)했음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유자광전’은 “유자광이 주석하면서 글귀를 해석해 왕이 알기 쉽게 했다”고 적고 있고,『연산군일기』도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연산군은 유자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았다.
연산군은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세 사관(史官)을 대역죄로 능지처사했는데,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자신을 이용해 정적인 사림 세력을 제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사림이 왕권 강화와 훈구 세력의 약화에 도움이 되는 세력이라는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정국을 바라본 그 자체가 그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무오사화 이후 왕권은 크게 강해졌지만 훈구라는 바다에 떠 있는 왕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강화된 왕권만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적을 백성의 적으로 기록한 ‘붓의 권력’ 사대부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③ 부풀려진 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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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의 의견을 사실로 읽다 보면 사관의 의도대로 연산군을 해석하게 된다. 연산군은 국왕과 사대부가 공동 통치한다는 신흥사대부들의 건국이념을 부정했다.
연산군이 사대부 계급의 공동의 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 대해서도 폭군이었는가?
사관은 백성들에게도 폭군이었다고 비판한다.
중종 즉위일 『중종실록』은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라면서 “사직북동(社稷北洞)에서 흥인문(興仁門:동대문)까지 인가를 모두 철거하여 표를 세우고, 인왕점(仁王岾)에서 동쪽으로 타락산(駝駱山)까지 민정(民丁:백성)을 많이 징발하여 높은 석성(石城)을 쌓았다(『중종실록』1년 9월 2일)”라며 민가 철거를 폭정의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연산군은 실제로 민가를 철거했다. 그는 재위 9년(1503) 11월 승지들에게, “궁궐 담장 아래 100척(尺) 내에 집을 짓는 것은 법에서 금하고 있으므로, 법을 어기고 집을 지은 것에 대해 해당 관사에서 보고해야 하는데 아뢰지 않는 것은 원래부터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철거 대상은 국법에서 주택 건축을 금하고 있는 궁궐 담장 아래 100척 이내, 즉 30m 이내의 주택들이었다. 게다가 강제 철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먼저 병조·공조·한성부의 당상관(堂上官)을 보내 ‘집 주인들을 모아 철거의 뜻을 효유’시켰다. 담당 부서의 고위직들이 먼저 설득작업에 나서게 한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철거되는 사람들에게 비록 넉넉히 주지는 못하지만 면포(綿布:무명)를 조금씩 나눠주어 나라의 뜻을 알게 하라”라고 명했다.
병조판서 강귀손(姜龜孫)은 이 명에 따라 철거 대상 주택을 4등급으로 나누어, “큰집(大家)에는 무명 50필, 중간집(中家)에는 30필, 작은집(小家)에는 15필, 아주 작은집(小小家)에는 10필씩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보상책을 보고했다.
철거대상은 11월 6일 사헌부 장령 이맥(李陌)이, “대궐을 내려다보는 집은 마땅히 철거해야 하지만 그중 오래된 집들도 함께 철거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대궐을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있는 불법 주택들이었다.
사신은 이에 대해 연산군이 후원에서 나인들과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백성들이 알까 염려해서 “산 아래 인가를 헐기에 이르렀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 철거한 창덕궁 후원 동쪽 인가들과 성종의 후궁들이 거주하는 자수궁(慈壽宮)과 수성궁(壽成宮) 부근,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불법 주택들은 철거할 만한 사유가 있는 주택들이었다.
연산군은 “궁궐 담 밖의 집 건축은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돌아보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마땅히 법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금 도리어 빈 땅을 떼어 주었다”라고 대토(代土)까지 마련해 주었다. 게다가 “집을 비운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곳(安接處)을 마련해 아뢰어라”라고 명해서 한성 판윤(判尹:시장) 박숭질(朴崇質)이 “도성 안의 경저(京邸)나 빈 집을 원하는 대로 빌려 거주하게 하려는데, 만일 빌리려고 하지 않으면 관에서 독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책을 보고했다.
경저란 지방의 경저리(京邸吏)가 머물던 지방관아의 서울 출장소였다. 연산군은 또한 “심한 추위에 의지할 곳이 없다 해서 봄까지 기다려 철거하게 했으니 역시 혜택을 많이 받은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일정액의 보상금과 대토,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봄까지 철거를 연기한 것을 폭정(暴政)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래도 대간에서 계속 반대하자 연산군은 속내를 드러냈다. “집을 헐리고 원망하며 근심하는 심정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아는 조사(朝士:벼슬아치)들도 법을 범하면서 집을 지은 자가 많으니 헌부(憲府:사헌부)에서 당연히 죄주기를 청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도리어 말을 하는 것이냐?(『연산군일기』9년 11월 9일)” 사헌부가 백성들을 빙자하지만 속으론 벼슬아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었다. 연산군의 민가 철거는 백성들보다는 벼슬아치들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중종실록』의 사신(史臣)은 또 “광주(廣州)·양주(楊州)·고양(高陽)·양천(陽川)·파주(坡州) 등의 읍을 혁파하고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어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살게 했다(중종 1년 9월 2일)”라고 비난했다.
『연산군일기』10년(1504) 4월조는 지언(池彦)·이오을(李吾乙)·미장수(未長守) 등이 ‘위에 관계되는 불경한 말’을 한 사건이 발생하자 다섯 고을을 혁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 년 후인 11년 7월 광주 판관(光州判官) 최인수(崔仁壽)를 파직하라는 명령이 있는 것을 보면 다섯 고을 혁파는 엄포였든지 일시적 조처였음을 알 수 있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이궁(離宮:행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재위 11년 7월 연산군은 “장의문(藏義門) 밖이 산과 물이 다 좋아 한 조각 절경이므로, 금표(禁標)를 세우고 이궁 수십 칸을 지어 잠시 쉬는 곳으로 삼고자 하니, 의정부와 의논하여 지형을 그려서 바치라”라고 지시했다. 영의정 유순 등은 즉각 “상의 분부가 윤당하십니다”라고 찬성했으나,
사관은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양주·포천·영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고양·양천·금천·과천·통진·김포 등에 이르는 땅에서 주민 500여 호를 모두 내보내고, 내수사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킴)를 하니 초부·목동의 길이 끊겼다.(『연산군일기』 11년 7월 1일)”라고 비판했다.
동북 4고을, 서남 7고을 등 모두 11고을의 백성을 내쫓은 듯이 비판했지만 그 숫자는 모두 500여 호에 불과했다.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양주 한 고을의 호수(戶數)만 1만1300여 호에 인구는 5만2000여 명이라고 전한다. 11고을의 이름을 모두 든 것은 마치 이 백성들이 모두 내쫓긴 것처럼 호도하려는 사관의 의도였다.
그해 7월 22일 연산군은 추석을 앞두고,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명절)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2일을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라고 명절 출입을 허용했다.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했다는 것도 사관의 과장이다.
궁궐 근처 불법 가옥들도 보상해준 연산군이 이궁 건축 예정지 안의 민가에 보상해주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이궁을 설치하려 한 이유에 대해 연산군은 “무신년(성종 29년)에 대비께서 편찮으셔서 부득이 인가로 피어(避御)하셨으니 어찌 국가의 체모에 합당하겠는가?”라면서 “궐내에 온역(瘟疫:전염병)이라도 발생하면 옮겨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하고 또 사대부일지라도 집 몇 채를 가졌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이 어찌 별궁(別宮)을 만들 수 없겠는가?(『연산군일기』 10년 7월 28일)”라고 말했다.
또한 “경궁·요대(瓊宮·瑤臺:구슬 등을 박은 화려한 궁궐)를 만든다면 옳지 않으나, 이는 부득이한 바이다”라고도 말했다. 이때 만들려던 이궁의 규모는 ‘큰 집 50칸(大家五十間)’이었으니 99칸 민간 부호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소박한 궁이었다. 이때 예정된 이궁 터가 장의문 밖 장의사(藏義寺) 터인데, 지금의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초등학교 자리다.
그러나 연산군은 끝내 50칸짜리 이궁도 짓지 못했지만 11고을 백성들을 다 내몰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연산군은 백성들에게 성군(聖君)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관의 비난처럼 폭군도 아니었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깊이 근심하고/임금(上)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한다/때로 진실한 충성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매일 가짜 충성을 막으리라 생각한다(深病民有飢色, 痛恨凌上風俗, 時思欲見其實忠, 日念使杜其詐誠)(『연산군일기』 6년 8월 11일)”라는 어제시(御製詩)를 썼다. 연산군은 백성들의 굶주린 기색을 근심하고 사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풍속’을 통한하고 가짜 충성을 경계했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붓을 잡고 있는 사대부들에게 희대의 폭군으로 몰린 것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④ 황음무도 논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월산대군 부부 묘. 뒤의 봉분이 부인 순천 박씨의 묘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사진가 권태균 |
그 뒤에 유명한 한 일화를 덧붙인다.
“이보다 앞서 왕이 미행(微行)하면서 환관 5, 6인에게 몽둥이를 쥐어주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달려가 늙고 추한 비구니(尼僧)를 내쫓고 연소하고 자색 있는 7, 8인만 남게 해 간음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다.”
소문이 두려워 기생도 꺼리던 연산군이 정업원의 늙고 추한 비구니를 시끌벅적하게 때려 내쫓고 젊은 비구니를 취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중종실록』은 “처음 전전비(田田非)·장녹수(張綠水)를 들여놓으면서부터 날이 갈수록 거기에 빠져들었고, 미모가 빼어난 창기를 궁 안으로 뽑아 들인 것이 처음에는 백으로 셀 정도였으나, 마침내는 천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렀다”라며 연산군이 1000명의 후궁을 거느린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니 양기(陽氣) 보양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9년(1503) 2월 8일자는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老無病)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는 전교를 기록하면서 “백마 고기가 양기를 돕기 때문이다”라는 논평을 덧붙였다. 양기 보양에 늙은 말을 쓸 리 없다는 상식도 무시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이 있다. 흥에 겨워 재물을 마구 쓰며 즐기는 것을 가리키는데 연산군이 만든 흥청(興淸)이 어원이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흥청들과 대궐이나 길가에서 집단 혼음(混淫)을 벌인 것처럼 자주 묘사했다. 그러나 흥청은 연산군의 혼음 대상이 아니라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들이었다. 운평(運平)·광희(廣熙)도 마찬가지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12월 “흥청이란 바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씻으라는 뜻이고,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모든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은 모두 광희라고 칭하라”고 명했다. 광희부터 설명하면『경국대전』예전(禮典)에는 악생(樂生)은 297명, 악공(樂工)은 518명이라고 규정돼 있다. 이들 국가 소속의 악생과 악공들을 높여서 부른 새 명칭이 광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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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재위 10년 “흥청악(興淸樂)은 300명, 운평악(運平樂)은 700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廣熙)도 증원하라”고 명하는데, 이들 흥청악·운평악·광희악을 통칭 삼악(三樂)이라고 불렀다. ‘○○합창단’ 하는 식의 이름이다.
『경국대전』은 지방에서 뽑아 올리는 선상기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蓮花臺:가무극 배우) 10명, 여의(女醫) 7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뽑힌 선상기 중 뛰어난 음악인이 흥청이다.
『연산군일기』는 재위 12년(1506) 3월 “흥청악 1만 명을 지공(支供)할 잡물과 그릇 등을 미리 마련하라”고 명했다고 써서 흥청악이 1만 명이나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연산군이 11년 4월 “흥청은 어찌하여 수를 채우지 못하는가?”라고 묻자 장악원은 ‘정원 300명 중 93명을 채웠고 207인을 못 채웠다’고 답했다. 93명을 겨우 채운 흥청이 11개월 만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니 이 역시 사관의 창작이다.
삼악(三樂) 모두가 여성인 것도 아니었다. 연산군 12년(1506) 광희악(廣熙樂) 김귀손(金龜孫)이 운평 관홍군(冠紅群)을 강간하려고 폭력을 행사했다가 처벌받은 사건이 이를 말해준다.
삼악에 대해 사대부들이 분노한 것은 자신들과 접촉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그간 여악(女樂)은 사대부들의 예비 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재위 11년 1월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獻壽宴)을 제외하고 여악들을 조사(朝士:벼슬아치)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광희를 사천(私賤:사노비)으로 만들어 첩을 삼을 수 없게 했다. 연산군은 흥청을 최고의 예술가로 대접했다.
재위 11년 2월에는 흥청악 공연 때 “비록 제조(提調)일지라도 의자를 치우고 땅에 앉아야 한다”고 명했다. 이보다 앞선 재위 8년(1502) 3월 연산군은 “이제부터 궐문 밖으로 행행(行幸)할 때에 여악(女樂)을 쓰지 말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내려주는 각종 잔치 때도 남악(男樂)만 내려주었다.
그러자 같은 해 10월 정1품 영사(領事) 성준(成俊)이 항의한다.
“지금 여악은 하사하지 않고 남악만 하사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여악을 사용했지 남악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지금은 비록 술을 내려도 쓸쓸할 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셔도 취하지 않으면 위로하는 뜻이 아닐 것이니 조종(朝宗)의 고사를 따르소서.(『연산군일기』 8년 10월 28일)”
잔치 때 여악을 내려달라는 주청에 대해 연산군은 “대개 조관(朝官:벼슬아치)들이 여기(女妓)를 담연(淡然:욕심이 없음)하게 보지 않으니 한자리에 섞이게 할 수 없었다”면서도 앞으로는 여악을 내려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성준은 “성상께서는 사용하지 않으시면서 신들에게만 사용하게 하시니 황공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흥청은 연산군보다 사대부들의 색탐(色貪)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이 요순(堯舜) 임금으로 묘사한 연산군의 부친 성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6남21녀를 낳았다. 1000명의 후궁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된 연산군은 4남3녀에 불과했다. 왕비 소생의 2남1녀를 빼면 후궁 조씨 소생의 두 서자와 장녹수와 정금(鄭今) 소생의 두 서녀(庶女)가 있었을 뿐이다.
사관은 또 연산군이 백모(伯母)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고 주장했다.
연산군 12년(1506) 7월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관은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연산군은 서른한 살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의 부인이 남편과 동갑이거나 한두 살 많은 풍습과 비교해 보면 세조 12년(1466) 열세 살의 나이로 월산대군과 혼인한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는 53~55세 정도다. 당시 이 나이의 여성이 잉태할 수는 없었다.
연산군은 박씨가 사망하기 한 달 전에 시어머니 소혜왕후의 와병 때 정성을 다했고, 세자(이황)를 자기가 낳은 자식같이 돌보았다면서 절부(節婦)로 표창하고 승평부(昇平府) 대부인(大夫人)으로 승격시켰다.
절부 표창 기사 아래 사신은 “박씨에게 특별히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명하고 드디어 간통을 했다”라고 적고 있으니 아무리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해도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씨의 부친 박중선은 공신이고 또 큰이모가 세종비 소헌왕후였다. 박원종도 이런 이유로 왕실 일가 대접을 받았다. 성종이 무과 출신인 박원종을 승지로 임명하자 대간은 “외인(外人)은 모두 박원종을 발탁한 것이 월산대군 부인 때문이라고 합니다”라고 비판했으나 『성종실록』의 사관은 성종이 형수를 간음했다고 쓰지는 않았다. 연산군도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박원종에게는 마음대로 벼슬을 고르게 할 정도로 우대했다.
시에는 능하지만 역사서는 등한시했던 연산군은 반란은 최측근에서 일어나기 쉽다는 사실에 무지했기에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한 자신이 역사상 가장 황음무도한 폭군으로 기록될 줄도 전혀 몰랐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⑤ 崇武정책의 좌절
연산군과 문신은 군사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국방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는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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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난의 본질은 연산군의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연산군 5년(1499) 4, 5월에는 함경도 삼수군(三水郡)과 평안도 벽동진(碧潼鎭) 등 3개 지역을 습격해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우마와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최진 등은 전가의 보도를 꺼냈다. “하늘의 견고(譴告:경고)가 심한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몸을 수행하면서 매일 근신해야 하는데 어찌 백성을 괴롭게 하고 군중을 동원해 멀리 떨어진 산하에서 소추(小醜:여진족)와 더불어 종사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것이다. 혜성과 가뭄은 모두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근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은 “서정의 거사는 진실로 농사의 풍흉을 보아야 하지만 죽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이 너무 많으니 지금 만약 정벌하여 많이 참획(斬獲:목을 베고 사로잡음)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침략을 중지할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고 강행 의사를 밝혔다.
연산군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려 “오직 변방 백성이 피살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에 분한(忿恨)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서정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최진 등은 “서방의 도둑들도 하늘이 전하에게 경계하고 근신하라고 시킨 것이므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근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병혁(兵革)의 일을 일으켜 천위(天威)를 모독하십니까(『연산군일기』5년 5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여진족이 습격한 것은 하늘이 연산군에게 경고한 것이므로 근신해야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습격에 대한 응징은 물론 사로잡혀 간 백성의 귀환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변경에 사는 백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투였다.
연산군은 “지금 서정은 오직 백성을 사랑(愛民)하기 때문이다”고 재차 호소했으나 대간에서 극심하게 반대하자 대신들도 점차 주저하게 되면서 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해 9월 4일 여진족은 다시 평안도 이산(理山)의 산양회진(山羊會鎭)을 공격해 100여 명을 잡아가고, 또 벽동군 아이진(阿耳鎭)을 습격해 갑사(甲士) 김득광(金得光) 등 9인과 말 12필을 약탈해 갔다. 연산군은 통탄했다. “지금 사변을 보니 진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전일 재상들의 의논을 구하자 ‘안으로 덕스러운 덕정(德政)을 닦는 것뿐입니다’고 했는데, 하늘의 재변이라면 하늘의 경계에 근신하면서 덕정을 닦아 없앨 수 있겠지만, 이런 완흉(頑凶)한 무리가 침략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덕정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5년 9월 10일)
연산군은 “저들이 오늘 몇 사람을 잡아가고 내일도 몇 사람을 잡아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구경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내년에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강무(講武)에 나서기로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이었다.
그러자 좌참찬 홍귀달(洪貴達)이 “이름을 강무라 하지만 실은 사냥하는 것입니다”면서 “선왕(先王)의 적자(赤子)들이 온통 적에게 살해되고 잡혀갔는데 그 자제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사냥해서 그 제물로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선왕·선후(先后)께서 어찌 안심하고 이를 흠향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5년 9월 16일)”라고 반대했다.
홍문관 부제학 최진은 외적의 습격도 하늘의 경계라면서 그 대책으로는 “두려워하면서 몸을 닦아야(恐懼修省)할 뿐 강무를 정지하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강무 역시 백성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9월 26일)”며 강행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 10월 “근래 오랫동안 군사 사열(査閱)을 폐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사냥(打圍)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훗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황제들이 정기적으로 만주 지역으로 가 사냥한 것을 ‘사냥을 준비하며 무예를 연습한다’는 뜻의 ‘비렵습무(備獵習武)’라고 불렀던 것처럼 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강무든 사냥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오직 임금의 근신만 요구했다.
재위 6년이 되자 서정 반대가 잇따랐다. 대간뿐 아니라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같은 대신들과 도원수 성준까지 반대론에 가세했다.
연산군은 성준에게 “서정하기로 결정해놓고 토벌하지 않으면 그 기간에 적이 반드시 변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을 많이 잡아갈 것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따졌다. 성준은 다시 명년까지 기다려 정벌하자며 연기론을 제시했는데, 말이 연기지 사실은 포기였다.
서정을 하지 않으려면 방어 태세라도 잘 갖추어야 했다. 연산군 7년(1501)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윤제(金允濟)가 “금년 도내가 약간 풍작이 들었으니, 청컨대 먼저 이산에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고 치계(馳啓)했다. 산양회진 등이 있어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이산에 장성을 쌓자는 말이었다.
이때 장성 축성에 찬성하면서 좌의정 성준이 한 말은 대간들이 왜 축성에도 반대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조정 신하들은 남쪽 사람이 많은데, 인부를 뽑아 부역을 시키면 그 폐단을 받을 것을 꺼려 극력 저지하는 것입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25일)
성준의 말에 홍문관에서는 “성준이 ‘조정에는 남도 사람이 많아서 자기 집의 종이 부역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 정지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입니다”고 반박했다. 성준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피혐하자 연산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홍문관원을 국문했다.
그 전에도 축성 이야기가 나오면 대간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가 그 과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연산군일기』5년 7월 12일)”고 꾸짖기도 했다. 연산군은 군사를 백안시하는 이런 문풍(文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문신들은 병역의 의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실시해 조선의 국방력을 무력화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은 이때 예고된 것이었다.
연산군이 “만약 무사(武事)를 미리 연습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연산군일기』7년 10월 2일)”라고 말한 것이 90여 년 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⑥ 友軍 없는 군주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들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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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를 폐했다가 원자가 장성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성종실록』8년 3월 29일)”라는 우려였다. 그러나 성종은 “큰일을 당했는데 어찌 뒷날을 생각하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성종은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시킨 후 재위 10년(1479)에는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13년(1482)에는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다.
모친을 죽였으면 그 아들을 폐하는 것이 훗날의 비극을 방지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지만 성종은 이듬해 14년(1483) 정월 원자를 왕세자로 책립해 원자의 지위는 흔들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연산군은 언제 모친의 비극을 알았을까? 조선 중기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록(己卯錄)』은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12년(1506) 4월조는 연산군이 미복(微服)으로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참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썼으며,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도 ‘열조통기(列朝通紀)’에서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년(1495) 4월 승정원에 “선왕 때 폐비의 묘에 어떻게 묘지기를 정해 지키게 했는가?”라고 물어서 이미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해 9월에는 13년째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외할머니 신씨를 석방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고 나서 복수에 나선 사건이 아니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정치구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 3월 엄씨와 정씨를 타살한 것이 시발로 알려져 있었지만
재위 9년 9월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 때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이 내린 회배주(回盃酒)를 반 이상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신 작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이세좌는 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국문 끝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이듬해 3월 석방했으나
그달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세자빈 간택을 위한 간택령 때 손녀가 병이 있다면서 “지금 비록 입궐하라는 명이 있어도 입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모는 한편 그해 3월 24일 승정원에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승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병합해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공신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아무도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3월 30일 “위를 업신여기는 풍조를 개혁하여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이세좌는 선왕조 때 큰일을 당했을 때 극력 간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리고 홍귀달도 그해 6월 교수형에 처했다. ‘선왕조 때 큰일’이란 물론 모후(母后)에게 사약을 들고 간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세좌는 부친 이극감(李克堪)뿐만 아니라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등의 백·숙부가 모두 봉군(封君)된 거대 공신 가문이었다. 연산군은 나아가 공신들의 세력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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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은 연산군이 연락(宴樂)에 빠져 돈이 부족해지자 ‘여러 공신의 노비·전지를 도로 거두려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연락 때문에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공신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산군은 5월 10일 여러 『공신초록(功臣抄錄)』을 내리면서 “내 생각으로는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은 그 노비와 전토를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공신들의 세습 노비와 토지들을 기한을 정해 환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연산군의 말이라면 ‘지당하옵니다’만 읊조리던 지당정승 유순(柳洵)도 이 조치에는 반대했다.
태종도 신하들의 보필로 개국했기 때문에 공신을 책봉하고 노비·전토를 하사해 “영원히 상속하도록 하셨다”면서 “지금 다시 환수하려면 7, 8대나 전해져 온 자손들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반드시 인심이 소란하고 우려할 것입니다(『연산군일기』10년 5월 10일)”라는 것이었다. 지당정승 유순까지 반대하자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의 것도 환수하지 말라”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법 제정을 통한 일괄 환수가 불가능해지자 연산군이 선택한 것이 개별적 재산 몰수였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윤필상·이극균·성준·권주 등 생존 대신들을 사형시키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등 사망한 대신들은 부관참시했는데,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적개·좌리공신이었던 파평윤씨 윤필상(세조비 정희왕후 동생의 아들)의 재산에 대해 호조에서 “집이 다섯 채인데, 재물이 매우 많으니 한성부와 의논하여 몰수하고 역군(役軍) 20명을 정하여 옮기게 하소서”라고 청할 정도였다. 연산군의 재산 몰수는 내관들도 비켜가지 않아서 술에 취해 자신을 꾸짖은 김처선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이보다 앞선 재위 9년(1503) 6월에는 환관 전균(田畇)이 죽자 그의 노비 109명을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게 하고 20명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에게서 받은 것이었으나 사패(賜牌)에 ‘영원히 상속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관청(公)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 처리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재위 10년 5월 9일 “전일 적몰한 노비를 3등분으로 나누어 2분은 내수사에서 가려 차지하고, 1분은 각 관사에 나누어 주라”는 하교가 이를 말해 준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라는 것은 결국 연산군이 그만큼 갖겠다는 뜻이었다. 신하들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옥사를 확대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나 정창손처럼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부관참시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우의정 김수동이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인심을 잃은 결정적 이유가 재산 몰수에 있었다. 세조나 예종은 정적(政敵)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이 차지했다.
세조라고 공신들이 무조건 예뻐서 노비·전토를 하사하고 전횡을 눈감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공신 집단을 해체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대체세력을 찾아야 했는데 이 경우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0년 9월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에게는 성리학에 입각해 간쟁하는 사림도 왕권에 항거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미리 몸을 피한 정희량(鄭希良)을 제외하고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종친 이심원이 능지처참당하고 귀양 갔던 김굉필·박한주·이수공·강백진·최부·이원·이주·강겸·이총 등이 사형당했다.
공신들은 물론 사림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그를 보호할 세력이 없었다. 연산군이 공신들의 자리에 사림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마저 적으로 삼은 그가 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은 사림이 사필(史筆)을 쥔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제11대 중종 가계도
성종- 계비 2부인 정현왕후 파평윤씨 윤호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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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지하철 선릉역 8번 출구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선릉과 정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오늘 만나볼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1488~1544)의 능이다.
문무인석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인석 얼굴은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임금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계비 정현왕후 윤씨 : 성종의 세번 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파평윤씨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성종의 두번 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3월 5일 태어났다.
이 중종반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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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퉁방울 눈에다가 코가 으깨어진채 떨어져 나간 정릉 무인석. | ||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했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 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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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릉 능침 근경. | ||
# 왕비가 셋 있어도 무덤은 나홀로
중종은 1544년 11월 15일 19살 창경궁에서 왕위에 등극한지 39년, 보령 57세로 승하한다.
중종에 이어 인종(12대)이 왕위에 오른지 8개월만에 죽자 문정왕후(중종의 제2계비)는 자신의 소생인 명종(13대)을 왕으로 즉위시킨다.
중종은 결국 왕비가 3명이나 됐지만 그 어떤 부인 옆에도 묻히지 못하는 측은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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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릉 봉분 석호. | ||
# 시신 없는 무덤, 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40기는 대부분 한 번도 발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다. 하지만 선릉과 정릉은 예외다. 그렇다면 이 두 능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593년 4월 13일 선조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으로부터 선릉과 정릉이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은 불에 타버렸다는 비보를 듣는다. 선조는 바로 통곡을 하며 대궐문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의식을 행한다.
확인해 보니 선릉(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은 불에 타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진채 타다 만 뼈 잿더미들만 나오고 무덤 속은 이미 비었으며, 정릉(중종의 능)에서는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 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이를 가려내기 위해 선조는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 원로대신부터 전에 중종의 얼굴을 보았던 궁녀들까지 동원해 확인했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돼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령이라 그 확인이 쉽지 않았다. 시신의 확인이 쉽지 않자 조정에서는 일찍이 왕의 체격을 잘 알고 있는 덕양부인과 궁녀 등을 시켜 왕의 모습을 글로 적게 한 다음 시신과 대조토록 했다.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중키로 이마에 검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녹두보다 조금 작았고, 살찌지도 여위지도 않았으며, 얼굴은 길고 콧마루는 높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종의 능침에서 나온 시신은 살은 썩어서 떨어졌고, 검은 사마귀는 알아볼 수 없고, 왕의 얼굴은 길고 턱뼈도 길었는데 이 시신은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배 위에 대여섯 군데 칼 맞은 흔적 등 여러 정황으로 볼때 다른 사람의 시신 같다며 시신 확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뼈와 타다 남은 재를 가지고 다시 오례의에 맞춰 염을 해 안장한다.
그래서 조선왕릉 중에서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 된 것이다.
<중종반정 [中宗反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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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근(愼守勤)은 성종 대에 음보로 장령(掌令)이 되어 우부승지 ·중추부 첨지사 ·호조 참의를 역임하고 1495년 연조의 비가 된 누이의 덕에 승지가 되었다. 같은 해 선위사(宣慰使)로서 평안도 지방을 순회하고 우승지 ·도승지 ·이조 판서 등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가 파직되었다.
1504년 다시 돈령부 첨정(敦寧府 僉正)에 기용, 이듬해 우의정으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06년 좌의정에 올랐다. 사위인 진성대군(晉城大君: 中宗)을 옹립하고 함께 반정(反正)을 도모하자는 박원종(朴元宗) 등의 제의를 거절했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3형제가 류자광(柳子光) 일파에 살해되었다
* 폐비윤씨 밀고(갑자사화)한 임사홍 중종반정시 처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우옹(愚翁), 호는 인재(仁齋).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찬(瓚)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부수찬을 지냈으며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군기시부정·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직에 있었으나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비행을 풍자한 시를 지은 일로 무관의 말단직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1506년 그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연산군을 폐출시킬 것을 밀약하고, 호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어 군대를 동원하여 거사했다. 정변이 성공한 뒤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는 한편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되어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곧 이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창산부원군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또한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반정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고 중종 즉위의 인준을 받아왔다. 1509년에는 우의정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했다. 뒤에 좌의정을 거쳐 1513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편찬을 주도했다.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훈구파의 중심인물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한 뒤 권력을 장악했다. 본관은 영광. 자는 우복(于復).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庶子)이다.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던 갑사(甲士)로서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출전했다.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탄핵하여 제거한 뒤,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었고, 공신적(功臣籍)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의 봉작을 회복하고, 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493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로 있으면서 성현(成俔) 등과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완성했다. 성종 대 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되었다. 우선 노사신(盧思愼)·한치형(韓致亨)·윤필상(尹弼商)·신수근(愼守勤) 등 사림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던 훈구세력·외척을 모은 뒤, 김종직·김일손이 대역죄를 범했다고 연조에게 고했다. 이어 김일손 등의 심문과정에서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 전체로 사건을 확대하고, 이들에 대한 죄명과 형량 책정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무오사화를 계기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506년 연조 재위기간 동안의 잇단 사화와 실정에 반감을 품은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류순정(柳順汀) 등이 연조를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때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이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에 봉해졌다.
1498년 류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전횡(專橫)을 일삼았다. 아들 임희재(任熙載)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성희안 창녕성씨>
무오사화의 주인공 영광류씨 류자광(柳子光) 중종반정으로 공신 1년후 유배
1498년(연조 4)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있던 이극돈(李克墩)으로부터 스승(김종직)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음을 듣고, 이를 세조의 찬위(簒位)에 대한 비유로 간주하여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조선 전기의 문인 류순정(1459∼1512)은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저녁, 박원종(1467∼1510) 성희안(1461∼1513)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폭군을 권좌에서 축출한 인물입니다.
이튿날 중종을 조선 제11대 왕으로 옹립한 그는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봉되는 영광을 안았답니다. 이후 중종의 신임을 얻어 정권 핵심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중종반정 공로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우의정과 병조판서를 겸직하면서 이과(1475∼1507)의 반란을 다스려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에도 책록됐지요.
1509년에는 좌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삼포왜란(부산포 등에서 왜인들이 일으킨 폭동)이 발생하자 경상도 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습니다. 1512년 영의정에 올라 재직 중에 숨지기까지 최고의 관직을 누렸답니다.
진주류씨는 류순정 이후 대대로 한양에 살면서 명가로 거듭나 그의 조카 류보(?∼1544) 역시 중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류순정의 성품은 이에 대한 자료가 없으니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정국공신으로 책봉될 당시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의 초상화(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1호)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매우 온화하게 표현됐으며 눈동자는 생생해 살아있는 듯하고 눈썹과 수염은 올마다 섬세하게 묘사됐습니다. 귓바퀴는 옅은 갈색 선, 눈의 위 꺼풀은 검은 묵선, 아래 꺼풀은 갈색 선으로 자연스럽게 그려 넣고 머리에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가슴에는 금색의 화려한 공작 그림을 넣은 관복을 착용한 모습이 귀족의 품위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얼굴과 전신의 정면을 70% 정도 보이게 하는 7분면으로 입체감을 살린 초상화는 현재 몇 점 전해지지 않는 16세기 초 조선 공신 초상화의 전형인 동시에 바닥에 채전(彩顫·채색 비단)이 깔려있는 첫 사례로 가치가 매우 큰 문화재랍니다. 의자에 방석을 붙들어 맨 형태, 주머니와 접이식 종이부채 등 장신구는 당시 공신상의 의복을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8월 14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한양의 진주류씨’는 류순정의 초상화가 주인공입니다. 그의 후손인 진주류씨 문성공파 문중(종손 류원배)이 2004년과 2009년에 기증한 것으로 류순정 전신상 2점과 반신상 2점, 그 아들 류홍 초상화 1점, 류순정의 영정 보관함에서 나온 천연 방충제인 의향(衣香)과 부용향(芙蓉香) 등이 공개됩니다.
한 사람의 공신 초상화가 4점이나 남아 있는 것은 유례가 없답니다. 대부분 소멸되고 보존되더라도 1점 정도에 불과하거든요. 특히 화면 길이가 173㎝, 전체 길이가 240㎝인 대형 전신상은 실제 사람 크기로 제작된 것으로 초상화 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랍니다.
연산군과 중종, 두 임금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린 그의 초상화를 통해 정치와 권력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됩니다.
* 조광조의 좌절된 ‘과거사 청산’
조선 11대 임금 중종(中宗). 형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아니아니, 솔직한 표현, 진솔한 표현으로 말하면, 박원종(朴元宗)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중종은 말 그대로 바지왕의 모습 그대로였다.
“흠흠… 우리가 반정(反正)을 안 일으켰으면, 왕이나 할 수 있었겠어?”
“그치… 그냥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거잖아. 이런 걸 전문용어로 바지왕이라고 표현 할 수 있지.”
그랬다. 중종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바지왕이었다. 이런 그의 상황을 잘 보여준 일이 그의 비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의 폐출이었다.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매부였는데, 반정에 반대했던 인물이었다(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딱 보면 견적 나오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단경왕후가 계속 중전 자리에 앉아 있다간 좀 거시기 하지 않았겠는가?
힘없는 중종은 조강지처가 궁에서 끌려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중종, 별 힘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얼떨결에 바지 왕으로 낙점되어 반정 당일 날 옥좌로 등 떠밀려 올라간 왕이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지 않았던가? 얼떨결에 왕위에 올라간 중종이었지만, 언제까지 바지 왕으로 살수만은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 계산기를 두들겨 본 중종은 자신의 친위세력 양성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때 등장한 것이 사림파의 떠오르는 신성 조광조였던 것이다
조선 중기에 속하는 중종 시절,
34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왔던 조광조는 훈구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1519년)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고 난 뒤 유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로, 조선 왕조의 유교 문화를 발전시킨 '초석'으로 추앙받지만 당대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정국공신'들은 아첨꾼이었다
조광조가 '공자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의 개혁정치를 벌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수학하던 청년 시절에는 연산군이 벌인 두 차례의 사화(무오·갑자)가 있었고, 중종반정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것도 겨우 50여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가 국시인 조선에서 이런 파천황적인 일들이 벌어지게 된 까닭은 왕과 신하가 성리학적 이념을 옳게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조광조는 '공자 말씀'을 무기로 사사건건 왕과 훈구세력을 함께 압박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기지 못해 조선 왕조 건국 때부터 있어왔던 소격서(昭格暑·기우제를 지내는 도교 관련 사당)를 폐지할 수 밖에 없었고, 중종반정으로 조정의 주류가 된 훈구세력은 위훈삭제(僞勳削除) 공세를 받고 전전긍긍했다.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이 된 117명 가운데는 아무런 공도 없으면서 서로를 추천하거나 뇌물에 의해 공신에 봉해진 자가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정국공신의 65%에 달하는 96명의 녹훈을 박탈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도덕성 회복 문제였기 때문이다.
중종반정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정국공신들은 연산군에게 올바른 간언은커녕 비굴하게 아첨했던 "개나 돼지"들이었다.
세력을 불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정국공신을 참칭한 이 무리는 "자신들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이끌었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섬기던 군주를 스스로 몰아낸 사람들"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도덕적인 자책을 온 나라에 보여주는 성숙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50결(結)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했던 조선시대의 토지공개념인 한전법(限田法=均田制)은 민생을 위한 개혁이었으나 주장에만 그쳤다.
조광조가 남긴 유일무이한 제도적 개혁은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관리를 뽑아쓰는 현량과(賢良科). 수험자의 학식 여부만 가릴 뿐인 과거시험으로는 덕행의 유무를 알 수 없고, 덕행이 없는 관리로는 수신(修身)·수양(修養)이 바탕된 유교적 지치정치(至治政治)를 펼칠 수 없다는 게 조광조식 인재등용의 요체였다.
현실정치의 '힘' 싸움을 감당하지 못해 그러나 조광조의 현량과 설치는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한 훈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위적 '물갈이'의 목적도 컸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된 지점이 여기다.
정치의 바깥에 있을 때는 도덕적 정당성을 앞세워 기득세력을 공박할 수 있었으나, 중종의 총애로 사간원의 장(長)이 되자 그도 '힘' 싸움을 동반한 현실정치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광조가 지닌 힘은 그의 도덕적 순수성이었으며, 당시 조선 왕조의 핵심적 지배 세력은 이러한 도덕적 비평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보기에 조광조도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조광조를 그렇게 몰고 갈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 조광조에겐 훈구세력이 무진장으로 가지고 있는 그 힘, 권력기반이 없었다.
위훈삭제로 정치적 승리를 맛본 나흘 만에 훈구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중종은 연산군의 운명을 떠올리며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1. 무오사화(戊午士禍)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 :조의제문
⇒연산군 즉위 4년후 1498(연산군 4)년 김일손을 중심으로한 신진 사림세력이 유자광 중심의 훈구세력에게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사건을 말한다. 이때 훈구파에서 내세운 명분은 성종때 등용된 김종직이 생전에 쓴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었다는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의 내용은 진나라 말, 초나라 의제를 죽인 항우를 비판한것인데, 훈구파는 이를 단종을 죽인 세조를 비판한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분노한 연산군은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파내 부관참시한다.
2. 갑자사화(甲子士禍) (★궁중세력이 신하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 : 폐비윤씨 사약건
⇒ 무오사화 6년후 1504(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다.
본래 윤씨는 성종의 정비였으나, 그 투기가 너무나 심하여 폐출되었다.(그 유명한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바로 폐비 윤씨의 행위다.) 폐출된 윤씨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 정숙의(숙의는 후궁의 직책중 하나)등의 노력으로 결국 사사(賜死)된다.
성종은 죽기직전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은 생각해 자신의 사후 100년동안 윤씨의 일을 입밖에 내지 말것을 명하지만, 임사홍이 유자광, 신수근 등과 공모해 연산군에게 밀고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분노한 연산군은 두 숙의를 죽이고, 그들의 자식들을 귀양보낸후 그곳에서 모두 죽였다.
폐비 윤씨를 성종묘에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려 하자 권달수, 이행 등이 반대에 나섰다.
이에 연산군은 권달수를 죽이고, 이행을 귀양보냈으며, 내친김에 윤씨의 폐출을 찬성한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김굉필 등을 사형에 처한다.
이로도 모자라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정여창, 남효온등의 공신들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하고,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 모두 사형에 처했다.
갑자사화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선비를 싫어한 연산군이 그들의 기를 꺾기위한 점이 더 크게 작용한다. 실제로 이 사화로 인해 성종이 구축해놓은 인재풀이 무너지고, 국정과 문화발전에 큰 장애를 불러오게된다.
3. 기묘사화(己卯士禍)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 : 조광조 축출
⇒ 갑자사화 15년후, 중종 반정 14년 후 1519(중종 14)년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중심의 사림파가 축출된 사건.
본래 중종은 사림을 인정하고 중용하기까지한 군주였다. 그는 성균관을 중수하고 사화에 희생된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명망있는 사림들을 등용했다. 조광조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사림들은 정계에 나서자마자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유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또 중종반정 공신들을 중용함에 그들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4. 을사사화(乙巳士禍) (★소윤이 대윤 외척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 : 문정왕후 권력장악
⇒ 기묘사화 26년후, 중종 39년, 인종 9개월 후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小尹)이 대윤(大尹)을 몰아낸 사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는 정궁이 둘이다.
세자를 나은 장경왕후(=8개월 재위한 인종 母)와 '여인천하'로 유명한 문정왕후(=명종 母)가 그들이다. 먼저 장경왕후는 후에 인종이 되는 세자를 나았지만, 출산후 6일만에 산후조리 실패로 죽고만다. 이때가 장경왕후의 나이 25세때이다.
후에 문정왕후가 아들(=명종)을 낳지만 이때 이미 세자와의 나이 차이는 19살로 세자가 차기 왕이 되는건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대윤은 장경왕후(=윤여필의 딸)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로,윤원형이 영수였다.
이 사화는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자세히 나왔기에 따로 설명할것은 없지만.
장경왕후 소생인 세자(인종)가 중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때까지는 대윤이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인종이 즉위 9개월여만에 급사를 하면서(문정왕후의 독살설이 있다)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즉위한다.(명종)
이후 소윤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대윤을 철저하게 탄압을 받게되고 이후 수년에 걸쳐서 소윤은 반대파를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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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유자광 숙청하고, 축배 술을 들었다 勞苦至此, 其賜酒
중종반정의 주모자 유자광이 심복 유순정을 시켜 진성대군을 왕으로 불러
박원종은 유자광 몰아내기 공로자, 결국 그 박원종도 숙청되였다
유자광이 세운 중종이 사헌부(정보부)를 양성 유자광 타도 관제 상소 욕설 저주하여 숙청하고 국악 농악 정읍사 까지 숙청하는 중종실록 내용
유자광을 욕하기 전에 아래의 글도 우리나라에 없는 유자광 충성과 뛰어난 글솜씨 문장이다
이런 글이 국어 국사에 실렸으면 지금 충성을 경쟁하는 국회 정치가 되었을텐데 사계절 흠집잡기 흑색선전 경쟁으로 이 지경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 이처럼 민족최고의 간신으로 부각된 유자광의 진실을 조선실록의 기록에서 읽어보자
아래의 조선 실록기록을 역사순서별 자료로 읽어서 진실을 확인하고 올바른 교육자료로 제시 한다
성종 264권, 23년(1492 임자 / 명 홍치(弘治) 5년) 4월 1일(신축) 1번째기사
무재 있는 장수를 키우는 일과 명장을 변지에 기용하는 것에 관해 논의하다
특진관(特進官)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유순정(柳順汀)은 활을 쏘는 힘이 무쌍(無雙)하였습니다. 신이 듣건대, 이장곤(李長坤)이라는 자가 있어 나이 겨우 19세인데 용모(容貌)가 뛰어나게 훌륭하고 강궁(强弓)을 잘 당긴다고 하니, 청컨대 불러 보고 재주를 시험해 보아서 선전(宣傳)의 직임을 제수하여 무사(武事)를 익히게 하면 또한 다른 날의 장수가 될 것입니다.”
연산 63권,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8월 17일(갑자) 5번째기사
도망간 죄인 이장곤을 연좌시켜 처벌하게 하다
여기 유자광 심복 유순정이 중종반정 성공후 대비와 중종에게 왕위를 부탁하는 기록은 유자광의 왕위지명과 같다
남해 근리사(南海謹理使) 유자방의 아들 유방(柳房)이 치계(馳啓)하기를,
“죄인 이장곤(李長坤)이 도망갔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장곤의 집을 즉시 폐쇄(閉鎖)하고 그 부모·동생과 족친을 수금(囚禁)하며, 의금부 낭원(郞員) 중 순직 근신한 자를 보내어 그 형 이장길(李長吉)과 함께 조치하여 잡되, 손바닥을 꿰어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오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의금부 낭원 중 활 잘 쏘는 무신 2명을 보내어 잡아오라. 장곤은 활 잘 쏘는 용사이니, 그를 잡아 고하는 자는 익명서(匿名書) 때 잡아 고한 자와 같이 논상(論賞)하라. 그리고 남해 현감(南海縣監) 유성(柳星)은 이 실정을 모를 리 없으니 잡아다 국문하라.”
하였다.
이장곤을 등용한 유자광의 아들 유방을 시켜서 이장곤에게 미리 도망가게 하여 살린다
그래서 중종이 유자광을 유배 암살하고 자살로 기록했다
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9월 8일(갑신) 2번째기사
공신을 책정하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의로운 일을 일으킨 공을 의논하여 3등으로 나누었는데,
'유자광(柳子光)·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장정(張珽)·홍경주(洪景舟)를 1등으로, .....'
모두가 유자광이 등용한 측근자 들 만이 중종반정 일등공신 뿐이다
사신편집자 기록문에
전라도에서는 유빈(柳濱 ;유자광친족) 등이 거사(擧事)할 것을 같이 모의하여 서울과 지방에 격문을 띄웠고,....
여기서 전라도 병력 유빈은 유자광의 친족이였다
우의정 김수동은 한때의 명류(名流)로 어머니의 복제 중이었으니, 추대한 뒤에는 곧 돌아가 상제 노릇하는 것이 옳거늘, 공을 논한 뒤에 조용히 집으로 물러나 유자광에게 묻기를, ‘아우 김수경은 어떤 등급의 공에 기록되었느냐?’라고 하였다. 김수동은 탐욕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여기서 김수동이 자기 동생을 공신에 넣어 달라고 유자광에게 부탁한 것으로 유자광 주동세력 기록이 보여 진다
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12월 3일(정미) 3번째기사
유자광 등이 헌부가 서리를 잡아간 일로 사직하니 불허하다
중종은 은인 유자광을 정치보위부 같은 사헌부를 조직 이처럼 죽이려하자 유자광이 위험을 느껴 고향으로 가려해도 숙청하려고 거절했다
무령 부원군 유자광·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 등이 아뢰기를,
“무릇 1품 아문(衙門)은 비록 하리(下吏)일지라도 헌부에서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첩정(牒呈)261) 으로 통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신을 마련하는 것 때문에 국(局)을 설치했는데, 헌부에서 나졸을 풀어 서리(書吏)를 잡아갔고, 박영문에게 또 공함(公緘)262) 을 보내어 핵문하니, 이는 장차 신들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사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헌부에서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시 정승 등이 출사하지 않았는데 박영문은 항상 출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22일(을미) 1번째기사
중종은 박원종을 어렵게 유도하여 유자광 타도 세력으로 만들기 성공하자 즉시 술을 내리고 치하했다
좌의정 박원종이 유자광의 일을 아뢰다
좌의정 박원종(朴元宗)이 태봉(胎峯)을 봉심(奉審)한 일을 마치고 와서 복명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대간·홍문관·승정원·예문관과 태학생에 이르기까지 유자광의 일을 논계(論啓)하여 마지않는다 합니다. 이것은 온 나라의 공론을 들어 말하는 것이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자광은 이미 큰 공로가 있으므로 극형에는 처할 수 없으니, 멀리 귀양보내서 공론을 쾌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자광이 비밀히 원종에게 서간을 보내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옛말이 있다. 어찌하여 감싸주지 않는가?” 하니, 원종이 회답하기를 “사림(士林)이 그대에게 이를 간 지 이미 오랜데, 어찌 일찌감치 물러가지 않는가?” 하였다.】
중종 2권, 2년(1507 정묘 / 명 정덕(正德) 2년) 4월 22일(을미) 2번째기사
유자광죽이기 드디어 성공 기다린듯이 대간에게 술을 내리다
대간에 명하여 나와 일을 보게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유자광은 여러 대 조정의 원훈이니, 파직도 너무 과한데, 또 어찌 죄를 더하겠는가? 더구나 이미 노쇠하였으니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난들 어찌 생각하지 않고서 그러겠는가? 근일 경들이 나의 부덕으로 이렇게까지 노고하니, 술을 하사 한다
중종 22권,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6월 8일(계해) 2번째기사
유자광 심복 이장곤이 안당과 같이 절친한 조광조를 등용시킨다
안당이 조광조 등을 선무랑으로 올려 삼도록 추천하다
안당이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박훈(朴薰) 등과 같은 이들은 진실로 경서에 밝고 행실과 수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들을 등용하는 것은 마땅히 문신(文臣)을 등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야 합니다. 조광조는 또 효행(孝行)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올려서 선무랑(宣務郞)으로 삼고, 주부(主簿)의 직(職)에 준(準)하게 하여 그의 하는 바를 관찰하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중종 43권,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10월 27일(을사) 1번째기사
조광조 죽이기에 이장곤 안당 친족을 그집 종 송사련이 조작밀고하게하여 죽인다
대간이 안처겸과 관련된 이장곤 등에 관해 차자를 올리다
대간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이장곤을 배척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날을 복합(伏閤)했는데도 천청(天聽)이 멀기만 하여, 물에 돌 들어가듯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신 등은 성상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한 신 등이 홍문관의 상소를 보니, 조광조(趙光祖)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
전하께서 시급히 이장곤을 축출하여 화근을 끊어버리고 인심을 통쾌하게 하소서.
또 역적들이 열명(列名)한 것 속에...
안처겸(安處謙)안당과 알고 지냄이 열명한 것 속에 이름을 기록했겠습니까? 모두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시급히 그들의 죄를 결정하여 변방으로 보내야 합니다.
이처럼 안당 안처겸이 이장곤과 조광조를 등용시킨 사람인데 중종이 유자광파를 차레로 그들의 종을 매수하여 역모조작 증언을 시키고 주인의 재산과 여자를 첩과 종으로 하사하여 종이 공신과 귀족이 숙청시켰다
이 후부터 유자광은 타도가 애국으로 교육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최근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민족사 최고 1위의 간신으로 유자광이 조사되었다니 한심한 역사교육의 태만한 현실로 본다
성종 10년(1479년) 7월 13일(정묘) 2번째기사
유자광이 부산 애군방어 군역의 해이· 조선 배의 문제 등에 관해 국방상소문
유자광(柳子光)의 상소(上疏)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은 또 듣건대 삼포 제진(諸鎭)의 지키는 수병(戍兵)이 으레 모두 대리 보초서는(代立) 하여 혹은 군무(軍務)를 면제해 주고 뇌물을 받으며, 변진(邊鎭)뿐만 아니라 보병(步兵)으로 서울(京師)에 전출(番上)하는 자도 또한 이와 같은 유(類)가 많다고 합니다.
신은 또 듣건대, 각 포(浦군항)의 병선(兵船)은 항상 기슭에 정박하여 있고, 군졸(軍卒)은 행선(항해훈련; 行船)하는 것을 익히지 않으며, 수사(수병지휘관 水使)가 그릇된 사람이면 포구를 순찰함에 소홀하여, 오직 노래하는 기생만 싣고 주현(州縣)을 왕래(往來)하며, 오로지 유람하는 것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로써 생각하건대 수사(水使)는 절기마다 중삭(仲朔)) 에는 행선(行船)하고, 만호(萬戶)는 매월(每月) 행선(行船)하는 것으로 상사(常事)를 삼으면, 자연히 물길[水路]을 살필 수가 있고 노젓는 것에도 익숙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신은 또 듣건대 대마 도주(對馬島主)의 사송(使送)이 타고 오는 배[船]가 본도(本島)의 배가 아니라고 합니다. 제포(薺浦)에 4대선(大船)이 있고, 부산포(釜山浦)에 4대선이 있으며, 염포(鹽浦)에 2대선(大船)이 있습니다. 섬의 사신[島使]이 오면 이 삼포(三浦) 의 왜선(倭船)에 옮겨 타는데, 변장(邊將)은 왜인의 꾀임에 이용되어 바보처럼 알지못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배를 척량(尺量)하고, 내일은 이 배를 척량하되, 오늘은 한 자[尺]를 더하고 내일은 한 자를 감(減)하여 상호(相互) 가감(加減)하면서 왜인(倭人)의 의도를 그대로 따르는데, 이는 애당초 왜인이 변장(邊將)을 속인 것이 아니고 바로 변장(邊將) 스스로가 속은 것입니다.
또 국가(國家)의 병선(兵船)에는 철정(쇠못鐵釘) 을 사용하지 않고, 왜인(倭人)한테 쇠못(鐵釘)을 주어 그 왜선배에 대어 박도록 하니, 이러므로 왜선(倭船)은 그 견고함을 다하였으나, 우리 병선(兵船)을 돌아보면 모두 나무못(木釘) 을 사용하여 항상 깊은 물에 다니지 못하고 얕은 연안에 정박하여 있으며, 틈이 벌어지기가 쉬우니, 이는 오늘날 군사비리(邊事)의 큰 폐단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이런 만능 기능자 유자광 을 그 계파 정여립 까지 철저하게 죽이고 국방에 무능 거짓고발자 출세로 임진난과 일본에 망햇다
중동 6일전쟁 시 이스라엘의 용사처럼 조국으로 달려가서 참전하는
기백의 내용과 견주는 유자광의 사실기록
세조임금 13년 6월 14일
이시애의 함경도반난 평정에 관한 갑사 갑사(甲士) 유자광(柳子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하번(下番)하여 남원(南原)에 있으면서 이시애(李施愛)의 일을 늦게 듣고서는 바야흐로 식사하다가 비저(匕箸숫가락) 를 버리고 계속 군현(郡縣)을 독려하여, 신(臣)이 징병(徵兵)하는 문권(文卷) 속에 이름이 기록된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본디 궁검(弓?)으로써 자허(自許)하였으니, 용약(?躍)하라는 것을 듣고 말[馬]을 의지하여 행군을 기다려 여러 날 차례를 기다렸는데, 군현(郡縣)에서 행군을 독촉하여 날짜를 정하였다는 지령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에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분연(奮然)히 그윽이 이르기를, ‘국가가 비록 사방(四方)을 계엄(戒嚴)하여서 병졸(兵卒)을 정제(整齊)하더라도 어찌 사방의 병사를 다 징발한 연후에야 일개 이시애(李施愛)를 토평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갑사(甲士)에 적명(籍名)되어 항상 변야(邊野)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하였는데, 하물며 국가에 심복(心腹)하는 적(賊)을 당하여 신이 어찌 마음으로 축대(逐隊) 수행(隨行)하여 징병(徵兵)의 수에 열차(列次)하고 원방(遠方)에서 안처(安處)하여 자고 먹는 데 좋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이달 초6일에 남원(南原)으로부터 발정(發程)하여 하루에 갑절의 길을 걸어서 도로(道路)를 갔는데, 사람에게 전문(傳聞)하니, 모두 이르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는 아직도 굴혈(窟穴)을 지키고, 적은 죄 없는 이를 죽이어 함길도(咸吉道) 한 도가 소요(騷擾)하게 되었다.’고 하니, 어찌 일개의 적(賊)을 즉시 나아가 죽이지 못하고 전하의 치평(治平)에 누(累)를 끼치며, 묘당(廟堂)의 도의(圖議)를 수고롭게 하십니까?
살피지 못하거니와 전하께서는 벌써 장사(將士)로 하여금 1운(運)·2운(運), 심지어는 3운·4운에 이르도록 병사를 나누어 들여보냈다 하는데, 그렇다면 어찌 이제까지는 한 장사(將士)도 저는 홀로 해이하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빗물에 막히고 저는 홀로 막히지 않으며, 우리만 홀로 산천이 험하고 저는 홀로 험하지 않겠습니까? 비유하건대 두 쥐가 굴속에서 함께 다투면 힘이 있는 자가 이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급하게 장사(將士)로 하여금 날을 정하여 전쟁하여서 재화가 깊지 않은 때를 막지 않으십니까?
손무(孫武)는 말하기를, ‘병법은 졸속(拙速)함은 들었어도 공교하게 오해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니, 대저 옛 사람의 용병(用兵)하는 것은 모두 인의(仁義)로서 몸[體]을 삼고, 권술(權術)로써 용(用)을 삼으며, 더욱 귀중하게 여기는 자는 신속(神速)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장사(將士)가 두류(逗?)하고 진격하지 않는 것은, 신은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써 말을 폐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미천하다 하여 폐하지 마소서. 신은 비록 미천(微賤)하더라도 또한 한 모퉁이에 서서 스스로 싸움을 하여 쾌(快)하게 이시애(李施愛)의 머리를 참(斬)하여 바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세조 임금이 글을 보고 경탄(驚嘆)하며,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그 글을 읽게 하고, 이어서 세조임금이 전교하기를, “이 유자광의 글은 내 뜻에 매우 합당한 진실로 기특한 재목이다. 내 장차 임용(任用)하여서, 그 옳은 것을 시행하리라.” 하고, 명하여 밥을 먹이게 하였다.
남원에서 숫가락을 놓은 것을 여기서 밥을 먹게 하였다
사신(실록기록자)의 글
유자광(柳子光)은 전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庶子)이니, 효용하고 민첩하여 기사(騎射)를 잘하고, 서사(書史)를 알며, 문장을 잘 하였고, 일찍이 큰소리를 하여 기개(氣槪)를 숭상하였다
세조실록의 이런 유자광 충성 국방무술 글을 고의로 숨기고 실록에도 없는 십만양병주장 이율곡 남이장군 대장부시 거짓말로 한국교육을 역적조작교육터로 만들었다
권희덕 n
제12대 인종 가계도
중종 - 장경왕후 파평윤씨 윤여필 :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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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인종의 짧은 치세
2. [세조실록] 편찬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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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 (仁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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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천윤(天胤). 휘 호(艤). 시호 영정(榮靖). 중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파평윤씨 대윤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 비(妃)는 첨지중추부사 반남박씨 박용(朴墉)의 딸 인성왕후(仁成王后)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에 책봉되고 1544년 즉위하였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폐지되었던 현량과(賢良科)를 부활하고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한편 세자로 있을 때 1522년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동궁으로 있을 당시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여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긍휼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을 얻었으며,
서형(庶兄)인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하여 모자가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에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려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하여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손수 잠자리를 살폈고,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여짐에 따라 1545년(인종 1)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뒤의 明宗)에게 전위하고 경복궁 정침(正寢)에서 31세로 죽었다. 능은 고양(高陽)의 효릉(孝陵)이다. |
인종(仁宗), 1515년~1545년, 재위 1544년~1545년 8개월)은 조선의 제12대 임금이다. 휘는 호(?), 자는 천윤(天胤). 사후 시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며
중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인종 출산 후 6일 후 사망->아우 윤임 대윤의 총수이며,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편집] 생애
인종은 1520년(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유신(儒臣)들과 옛 글을 강론(講論)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4년 11월에 29세에 즉위했으나 병으로 제대로 정사를 살피지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기준(奇遵)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효릉(孝陵)이다.
인종이 즉위 9개월여만에 급사를 하면서 문정왕후(=소윤, 윤원형)의 독살설이 있다
[편집] 가족 관계
제13대 명종 가계도
중종 - 문정왕후 파평윤씨 소윤 윤지임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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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
2. 명종시대의 주요사건들 : 을사사화 / 양재역 벽서 사건 / 임꺽정의 난 / 을묘왜변
3.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 / 조선 성리학의 큰 인물 '이황'
4. [명종실록] 편찬
역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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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 (明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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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대양(對陽). 이름 환(緝). 시호 공헌(恭憲).
중종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둘째아들, 인종의 아우.
비(妃)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딸 인순왕후(仁順王后).
처음에 경원군(慶源君)으로 봉해졌다가, 1545년(인종 1) 경원대군이 되었다.
인종이 죽자 12세로 왕위에 올랐으며, 처음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小尹)일파가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 등의 대윤(大尹) 일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즉,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이를 구실삼아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사건, 1548년 사관(史官) 안명세(安命世)의 《시정기(時
政記)》 필화(筆禍)사건, 1549년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등으로 인하여 을사사화 이후
100여 명의 선비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는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普雨)를 중용하여 높은 벼슬을 주었고 불교를 중흥시켰다. 즉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다 1553년 친정(親政)이 시작되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간섭이 여전하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563년 비(妃)의 외숙 이량(李樑)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량
도 당파를 조성하여 선비들을 숙청하려 하므로, 기대항(奇大恒)에게 밀계(密啓)를 내려 이들을 추방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 일당을 숙청하고, 보우를 장살(杖殺)한 뒤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혼란 중에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일대를 횡행하였고, 1562년 황해도 일대에서 소란을 피운 임꺽정(林巨正)을 포살(捕殺)하였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나 이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하여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또한 여진족의 빈번한 침입으로 북쪽지방도 불안하였다. 그러나 수차(水車)를 제조하여 농사일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전함을 건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1554년 비변사(備邊司)를 다시 설치하였고, 수륙병(水陸兵)을 관찰사의 지휘 아래 두어 공동
출전하게 하는 등 국방대책을 수립하였다. 또 여러 가지 간행(刊行)사업을 전개하여 1548년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 1555년 경국대전의 원전(原典) ·속전(續典) 등을 간행하였다.
1551년에는 권문세가들이 불법으로 겸병(兼倂)한 토지를 몰수하여, 이를 공정하게 재분배하
는 등 치안 ·국방 ·문화창달 ·경제개혁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인순왕후 청송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자,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능은 양주(楊州)의 강릉(康陵)이다. |
명종(明宗), 1534년 ~ 1567년)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다. 휘는 환(?), 자는 대양(對陽). 사후 시호는 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明宗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이며
[편집] 생애
[편집] 즉위와 을사사화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2번째 비(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이고,
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이다.
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종의 첫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의 세자 호(岵 : 뒤에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세자 환(=명종)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대윤)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병으로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奉城君)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賜死)케 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盧守愼)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편집]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편집] 왕권강화의 시도
1553년 문정왕후가 10년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하게 된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견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량(李樑)을 이조판서, 그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전랑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량( 등은 왕의 신임을 믿고 파벌을 형성하여 횡렴을 일삼았으며 사림 출신의 관료들을 외직으로 추방했다. 이에 사림들이 반발하자 이량은 사화(士禍)를 꾀했으나 청송심씨 심의겸(沈義謙)에게 탄핵당하여 1563년 숙청되었다.
결국 1565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20년 동안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지니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왕위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윤원형과 보우(普雨)를 내쫓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2년 후인 1567년 34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와의 사이에 낳은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일찍 죽어, 왕위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인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셋째 아들 선조가 계승했다. 능은 강릉(康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 부 : 중종(中宗)
- 모 :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 소윤
- 왕비 :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 심의겸의 누나
- 후궁 : 경빈 이씨(慶嬪 李氏):초봉 숙의(淑儀), 영조대에 경빈에 추증
- 후궁 : 순빈 윤씨(順嬪 尹氏)
- 후궁 : 숙의 한씨(淑儀 韓氏)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후궁 : 숙의 신씨(淑儀 愼氏)
- 후궁 : 숙의 정씨(淑儀 鄭氏) - 정귀붕(鄭龜朋)의 딸
- 후궁 : 숙의 정씨(淑儀 鄭氏) - 정수의 딸
- 후궁 : 숙의 신씨(淑儀 申氏) - 신언숙(申?淑)의 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