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로 경험하는 동서양 사유의 만남에서
세계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국민으로 서양에서는 독일, 동양에서는 일본인을 꼽는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경우 저명한 철학자 야스퍼스는 대국민 탤래비전 교양 강좌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적인 교양을 위해서는 플라톤과 칸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는데 자기도 여기에 동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은 한 때 데, 칸, 쇼 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즉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지칭 한다고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독일과 일본에서 다 같이 지성인들이 빠지지 않고 읽어야 할 저자로는 철학자 칸트를 들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칸트를 읽지 않으면 우리의 대내외적인 현상을 우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있다고 오해하거나, 시간과 공간의 관념성을 알지 못하는 등으로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에서는 "칸트 이전에 칸트 없고, 칸트 이후에 칸트 없다" 또는 " 칸트를 읽음으로서 비로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연해서 말하자면 칸트의 사상은 그 뜻이 너무 깊고 넓어서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다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럼에도 일상적인 생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성인 누구나 그 개요만은 짚고 넘어 가야하는 이중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칸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중요한 업적인 시간과 공간의 관념성 확립을 접해 봄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정신적 지도자 한 분이 "주인은 손님에게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도 지난밤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도 꿈속의 사람들이다"고 한 말이나 중국의 선각자 한사람이 우리의 일상의 삶에 대해서 "꿈속 허공에 핀 환각의 꽃을 무어라 애써 붙들려고 하는가, 얻고 잃고, 옳고 그름을 한꺼번에 놓아버려라" 고 한데 대한 논리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인생에 대한 시각이 달라진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가끔 100층이 넘는 롯데 빌딩을 보고 위압감을 느낄 때가 있다. 또 세계적인 정복자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업적에 대해 경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대한 우주에 비교할 때 우리 지구는 한강의 전체 모래밭의 모래 한 알도 못되는 것인데 그 속에서 불세출의 영웅, 재벌 등을 논하는 것이 우스운 데도 당면하는 현실의 힘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일들에 압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할 때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서산대사의 글이 생각 나기도 한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굴 같고, 천가의 호걸들은 벌레들 같네" 이 글 때문에 당시의 왕인 선조에게 불려가 그렇다면 임금도 벌레들 같냐는 의미의 문초를 받기도 했다.
또 중국의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바뀌는 시기에 살다간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유영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는 항상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우주가 너무 좁다고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 광대 무변한 우주가 너무 좁다니 너무 허황한 이야기 일까?
그것은 우주가 아무리 커도 시간 공간 안에 속할 수 밖에 없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시간, 공간은 인간의 정신기능이니(철학적 용어로 직관의 순수 형식이니), 우주 마저도 인간정신의 기능인 시간, 공간의 무대 위에 나타난 거대한 꿈일수 밖에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에 종속 될 수 밖에 없고, 근원적으로 인간은 우주 마저도 초윌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 공간 인과관계의 제약을 벗어나서 기적도 행사 할 수 있었던 성자들 말고는 모두 시간 공간에 얽매어 있으며 우주가 좁다는 것은 시간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 인간의 한계를 한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시계를 보고 산다(시간 속에 산다). 또 활동하며 산다(공간 속어 산다). 그런데 시간 공간이 칸트가 말한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신 기능이라면(직관의 순수 형식이라면),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의 청각이나 시각과 같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정신기능 이라면, 경험적으로는 우리가 시간 공간 속에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초월적으로는) 시간 공간은 우리의 정신 기능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상적인 정신이 사라질 때는 시간, 공간도 사라지는 것이요, 우리의 현상적인 정신이 사라지더라도 시간, 공간과 그 속의 환경은 우리와 무관하게 그대로 존재 한다고 생각 해서는 안되며, 우리의 정신이 꿈속에서 시간, 공간과 환경을 창조하여 활동하다가도 깨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듯이 시간 공간이 객관적으로 실재 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 현상의 근원적인 기능이니( 철학적 용어로 직관의 순수 형식이니), 잠을 자지 않는 대낮의 시간, 공간 속에 나타나는 우리 내외의 모든 것 , 심지어 우주 마저도 우리의 꿈이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설명하면 우리가 사간과 공간 속에서 인식하는 객관적인 사물도 우리의 정신의 기본 골격인 시간 공간에 포함된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사간 공간이 우리의 정신기능인데 어떻게 그 시간 공간 속에 있는 사물들이 실재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간 공간 안에 있는 모든 현상들은 경험적으로는 엄연히 실재성을 지니나 선험적(근원적)으로는 관념성을 지니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표현 한다면 ''진공묘유''가 되는 것이다
거듭 이야기 하면 모든 사물은 우리의 건전한 정신과 함께 거짓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진실성을 지니며 실재한다. 그러나 좀더 깊은 차원에서는(선험적으로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정신의 현상으로 마치 꿈과 같이 있는 것이다.
불교 유식론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아뢰야식은 주관과 객관을(견분과 상분을) 포함한 정신 기능인 것이다. 그러므로 밤에 꾸는 꿈 만이 꿈이 아니고, 대낮에 생활하는 모든 것도 낮 꿈이 되어 버리며, 우리의 가장 절실한 현실인 삶과 죽음 마저도 낮 꿈 속에 이루어 지니, 그 낮 꿈을 꾸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자아는 생사를 초월한 불생불멸일 가능성이 있다는데 대한 믿음이 생긴다.
이러한 논리의 기반이 되는 즉 현상 인식의 기반이 되는 시간 공간이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정신적인 기능(직관의 형식) 이라는 데 대해 칸트가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감성론에서 자세히 해설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 한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주변 환경 에서 모든 것을 비워낸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없엘 수는 없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있다. 없애려 하여도 없어지지 않는 것, 그것은 우리의 근본 바탕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무한성을 생각해볼 때, 공간은 무한히 확대 되어 있다. 이 세상 만물은 아무리 크다 하여도 한계가 있다. 은하계가 아무리 커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은하계와 더불어 모든 우주를 품고 있는 공간 만은 무한의 무한 또 무한으로 그 끝을 상상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
시간도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는 무한히 소급되며, 미래로도 무한히 진행하여 역시 그 끝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
현실적으로 또 생각으로 부터도 제거가 불가능하고 크다는 개념으로도 상상이 불가능하며 시작과 끝의 상상이 불가능 하면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있어 이것 없이는 모든 현상적인 존재가 불가능한 것, 이것은 우리 자신이 현상을 인식하는데 바탕이 되는 근원적 정신 기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안경을 쓰고 있으면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두개의 렌즈를 통해서만 사물을 볼수 있듯 우리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가지 선험적인 정신기능의 바탕에서 만이 모든 것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의 선험적 감성론이다.
즉 인간의 정신이 사라지면 시간과 공간도 사라지며, 그 시간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 앞에 그토록 사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우주 마저도 사라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내가 없어 지더라도 내 주변의 산과 강 그리고 세계는 그대로 있을 것 아니냐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게 보면 한 개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칸트의 표현대로 라면 경험적으로는 실제성을 지님과 동시에 초월적으로는(근원적으로는) 관념성을 지니게 된다.
초월적인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이 주관적으로만 실재하고 객관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데 시간 공간 속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실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근윈적인 마음의 영상으로 존재 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것을 불교적인 관점에서 표현한 사례로 어느 강연회에서 지도법사에게 세계의 모든 현상이 그렇게도 정밀하게 합리성을 띄고 광범위하게 운행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아뢰야식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해 지도법사가 사람들이 우리의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너무 적은 범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답변했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통찰은 우리 인간의 최종 과제인 깨달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여기 대해서 쇼펜하우어가 서구철학과 인도철학을 융합시켜 저술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기술한 내용이 참고가 된다고 보고.그 내용의 일부를 간추려서 옮겨 본다.
(성자들이 경험했고, 열락, 환희, 깨달음, 신과의 합치 등으로 불리는 상태에는 이미 주관과 객관( 불교 유식론적으로는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의 형식이 없고, 게다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는 독자적인 경험만이 도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태는 인식이라 부를 수도 없다.
또한, 성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의지의 (쇼펜 하우어의 사상에서 의지는 광범위한 뜻을 지니나 여기서는 불교의 삼독심 즉 탐진치 중의 탐이나 오욕락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음)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더불어 객체화의 모든 단계에 나타나 있는 끊임없는 충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 최후에는 모든 현상의 일반적인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리고 시간 공간의 최종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 (아뢰야식의 견분과 상분)도 없어 진다.
이와 같은 성자들에게는 우리에게 그렇게도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가 모든 태양과 은하계외 더불어 무(이것이 바로 불교도의 반야바라밀이며, 모든 인식의 피안 즉, 이미 주관과 객관이 없는 경지이다)인 것이다.
참고로 위에서 쇼펜하우어가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는 뜻은 불교의 능가경 중 (몸과 자성 , 기세간의 일체는 장식의 영상이며, 소취(취해진 대상) 능취(취하는 자)의 두가지 상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유위법에서 능연(인식의 주관), 소연(인식의 대상)을 떠나면 오직 결정의 마음이라. 때문에 유심, 일심의 법을 설한다. 일체법들은 이름을 빌린 것일 뿐 모두 실제의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 내용과 상통된다고 생각된다.
바쁜 생활 중 언제 머리 아픈 철학 책을 볼 것인가 할 수도 있는데 요즈음에는 친절하게 철학을 소개한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철학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철학이 없는 사회는 정신적 빈곤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그의 저서 ''모두를 위한 서양 철학사''에서 한 말을 생각하게 한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인류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사람이라고 감탄하며 그의 서재에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는데 그 쇼펜하우어가 (시간 공간의 관념성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참다운 진리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얻는것과 같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칸트의 사상에 접해 보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세례를 받는것과 같다)고 했는데 혹시 요즈음 서점에 범람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수필이나 소설들을 볼 시간이 있다면 칸트 철학 해설서를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칸트 철학의 핵심을 쉽게 풀이한 것이 많음) 한번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처해있는 현상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극복 하는데 도움이 되고 결코 그렇게 어렵기만 한 내용도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원당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