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량(數量) 결정(決定)
일체 대승(大乘)을 포섭할 수 있는 수량(數量) 결정(決定)이 상호 의존이란, 얻은 재물에 탐착이 없고, 얻지 못한 재물에 구함이 없기에 재물을 돌아 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학처를 수호할 수 있고 계를 받고 계를 존중하며, 중생과 중생 아닌 것에 의지하여 생긴 여러 고를 참아 낼 수 있어 싫증을 내지 않고, 어떤 착한 일을 닦음에도 싫어하지 않으며, 적정과 무분별유가(無分別瑜伽)를 닦고, 관(觀)의 무분별유가(無分別瑜伽)를 닦는 등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이 여섯 가지가 모든 중생의 대승을 모은 것이며, 또 이러한 것도 육도의 단계로써 완성하므로 이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즉 이르기를, 재물을 즐기지 않음과 지극한 공경, 이 두 가지를 싫어하지 않음 그리고 무분별유가(無分別瑜伽), 일체 대승은 오로지 이것이로다 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대승에 들어가려 함과 육도를 수행하지 않고서 버린다는 것은 서로 어긋난다.
여러 가지 종류의 도(道), 혹은 방편에 의지하는 수량 결정이란, 이미 얻은 경계의 수용을 탐착하지 않는 도, 혹은 방편이 보시라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버림을 닦았기에 수용에 대한 탐욕을 여의었기 때문 이다. 그 얻지 못한 대상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산란한 방편을 단제하는 것이 계율이다. 비구의 율의(律儀)에 안주하면, 모든 일에 궁극의 산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을 버리지 않는 방편은 인내이다. 해를 받게 되는 모든 고(苦)를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을 증장하는 방편은 정진(精進)이다. 정진을 하는 데서 선(善)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장애를 소멸하는 방편은 육바라밀 중 정(定)과 혜(慧)이다. 선정(禪定)이 번뇌를 맑게 하고 지혜가 장애를 맑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도(六度)로 결정한다.
즉 이르기를 제경(諸境)을 탐하지 않는 도를 얻으려면 오직 산란을 단제함이요 다른 것은 없나니, 오직 중생을 버리지 않고 선을 증장하고 장애를 맑게 하는 것이요 다른 것은 없도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미 생긴 욕진(欲塵)과 산란(散亂)의 힘에 끄달림을 받지 않는 것은 탐욕 없는 보시이다. 일어나지 않은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무의(無義, 내용이 드러나 있지 않음, 범부의 사려분별을 넘고 자력의 조치가 없는 것)와 비의(非義, 의리를 어기는 것)의 산란을 제거할 수 있는 계율이다.
악을 짓는 중생이 많고 또 쉽게 생길 수 있으므로, 이 인연으로 타인의 이익을 저버리는 것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인내를 힘있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을 증장하고 오랫동안 수행하는 방식과 이런 장점을 사유하는 방식으로 오래도록 강력한 정진을 하는 것이고, 번뇌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선정이며, 또한 번뇌의 씨앗과 소지장(所知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설명한 이런 것들은 육도에 대한 최고의 이해를 줄 수 있다.
삼학(三學)에 의거 수량(數量) 결정(決定)을 상호 의존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계학(戒學)의 자성(自性)은 계율이니 이것은 또 재물을 고려하지 않는 보시를 한다면 바르게 계율을 정수(淨修)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계율의 자량(資糧)이다. 바르게 정수(淨修)한 후에는 질책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질책을 하지 않는 등의 인내로써 수호할 수 있으므로, 인내는 계율의 의지처이다.
선정은 심학(心學)이고 반야는 혜학(慧學)이며, 정진은 삼학(三學) 안에 포함되어 육도로 결정된다. 즉 이르기를, 삼학을 따라서 부처는 육바라밀을 바르게 말했노라. 첫 일학(一學)은 앞 삼도(三度)를 포함(包含)하고, 나중의 이도(二度)는 나머지를 포함하며, 나머지 일도(一度)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삼학(三學) 안에 들어간 다 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원만의 몸으로서 어떤 자타(自他)의 이(利)를 원만히 하고, 어떤 승(乘)에 안주하여 몇 가지 종류의 방편의 상(相)을 갖추고서. 어떤 학(學)을 수행하는 몸과 이(利) 대승(大乘) 방편(方便) 제학(諸學)을 원만히 하고, 집중할 수 있음은 오직 육도(六度)뿐 임을 알아야 한다. 동시에 육도(六度)는 깨달음으로 가는 모든 수행 요점의 총결이므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사유(思惟)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처음에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혹은 스스로 초탈(超脫)하지 못한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재물을 탐하고 가정(家庭)에 집착함이다. 이것의 대치(對置)로는 보시와 계율이다.
설사 잠시 초탈(超脫)했다고 해도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해 다시 반복(反復)하는 인(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중생의 바르지 못한 행에 의한 고(苦)와 선품(善品)을 오래 수행함으로써 오는 염리심을 냄이다. 이것의 대치로는 인욕과 정진이다.
고(苦)와 위해(危害)를 능히 참아내고 무수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루와 같이 보는 선열(禪悅)을 얻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문(門)으로 수련한다면 물리칠 수 있다. 인내와 정진을 통하여 그것이 가능하므로 극히 중요하다.
다만 이 정도의 보살행 뿐만 아니라 바로 현재의 선행(善行)을 닦는 데에도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없이 인내력이 약하며 도를 닦는 데에 용맹함이 없으므로, 이런 이유로 처음에 시작하는 자는 많아도 중간에 물러서지 않는 자는 드물다. 이런 것은 모두 인욕과 정진의 가르침을 닦지 않아 오는 것이다.
중간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르치게 되는 두 가지 원인이 있으니, 마음이 올바른 대상에 머물지 못하는 산란과 지혜를 손상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의 대치(對置)로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이다.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흩어진 염송(念誦) 등도 의미가 없다고 말하였다.
만일 안으로 맑은 법장(法藏)의 뜻에 대하여 아주 성성(猩猩)한 지혜가 없다면, 대략적인 취사 선택에서 착오와 전도의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치하지 않는 품성을 제거하여 대치할 수 있는 수량결정이다.
모든 불법의 근본 요점을 성취하는 수량 결정이란 바라밀의 처음 사도(四度, 施戒 忍 進)가 선정(禪定)의 자량(資糧)이 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종류로써 산란하지 않은 선정(禪定)의 정도를 완성할 수 있다. 이에 의지해서 관(觀)을 닦는다면 진실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계의 결정을 겸하여 말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생기(生起) 단계(段階)란 깨달음을 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보시가 있다면 계(戒)를 받을 수 있으며, 만일 악행(惡行)을 잘 방호(防護)하는 계율(戒律)을 갖추고 있다면 위해(危害)를 참을 수 있으며, 난행(難行)을 역겨워하지 않는 인내(忍耐)가 있다면 물러서려는 인(因)이 적어 정진(精進)을 해나갈 수 있으며, 만일 주야로 정진할 수 있다면 마음을 올바른 대상에 안주시킬 수 있고 능히 삼매(三昧)를 일으킬 수 있으며, 만일 마음이 정(定)에 들 수 있다면 진실을 그대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열(優劣)의 단계(段階)란, 이전(以前)의 단계(段階)일수록 더 저열(低劣)하고 이후(以後)의 단계(段階)로 갈수록 더 우월(優越)하다는 것을 말한다. 거칠고 세련됨의 단계란, 전 단계가 후의 단계보다 쉽게 들어가서 쉽게 수행할 수 있으므로 거친 것이고, 이후의 단계가 더 후자(後者)가 전자(前者)에 비하여 어렵게 들어가고 어렵게 수행하여야 하므로 이전(以前)의 각 단계(段階)에 비하여 더 미세(微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