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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부 도의 단계

5.3 일곱 가지의 인과(因果)

작성자혜천 안종률|작성시간23.06.24|조회수25 목록 댓글 0

5.3 일곱 가지의 인과(因果)

 

실질적인 수행(修行)에는 세 가지의 순서(順序)가 있다. 이타(利他)를 바라는 마음을 수행하는 것, 깨달음을 바라는 마음을 수행하는 것, 수행의 과보(果報)는 발심(發心) 임을 인식(認識)하는 것이다.

 

이타(利他)를 바라는 마음을 수행하는 데는 두 가지의 항목(項目)이 있다. 마음을 일깨우는 소의(所依)와, 마음을 바르게 일깨우는 것이다. 마음을 일깨우는 소의(所依)는 두 가지로 나뉜다. 중생들에게 마음을 평등(平等)하게 하는 것, 모든 중생들을 기쁨의 상(相)으로 여기고 수행하는 것이다.

 

한 중생에게 집착(執着)하고, 다른 중생에게 진에(瞋恚) 함을 버리지 않는 다면, 편견(偏見)이 없는 연(緣)을 일깨울 수 없기 때문에 평등사(平等捨)를 수행하여야 한다. 평등사(平等捨)는 행사(行捨) 수사(修捨) 무량사(無量捨)의 셋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량사(無量捨)이다.

 

무량사(無量捨)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모든 중생에게 탐진(耽瞋)의 번뇌(煩惱)가 없도록 성취하는 상(相)과, 중생들에게 탐진(耽瞋)를 벗어나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후자(後者)이다.

 

이에 따라 이(利)도 해(害)에도 집착(執着) 함이 없는 중용(中庸)을 목표로 탐진(耽瞋)를 없애고, 마음을 평등(平等)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평등하게 되면, 친우(親友)에 대해 평등심을 닦고, 친우(親友)에게 마음이 평등하게 되면, 원수(怨讐)에 대해 평등심을 닦고, 원수(怨讐)에게 평등하게 되었다면, 다음에는 모든 중생들에 대한 평등심을 수행한다.

 

모든 중생들에 대한 평등심을 수행하였다면, 탐진(耽瞋)을 단제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닦아야 한다. 중생의 측면(側面)에서 말한다면 중생들은 안락(安樂)을 원하고, 고(苦)를 싫어하므로, 한 부류(部類)에게는 친근하고, 다른 부류는 멀리하는 하는 것은 부당(不當)한 것이라고 인정하여야 한다.

 

자기의 측면(側面)에서 말한다면, 무시(無時)로 윤회하면서 나의 친족(親族)이 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를 탐애하고 미워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여야 한다. 이에 중생들에게 연민(憐憫)의 씨앗을 뿌리면, 대자비심(大慈悲心)이 쉽게 일어난다는 것을 긴요(緊要)한 요점(要點)으로 이해(理解)해야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母)를 생각하는 수행인데, 생사(生死)는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전전(轉轉)하여, 누구나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어머니의 육친(肉親)으로 전생(轉生)되지 않은 중생(衆生)이란 없다는 것을 사유(思惟)하여야 한다.

 

모든 이들이 과거(過去)에 어머니였고, 미래(未來)에도 어머니로 전생(轉生)하여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에 대하여 확실(確實)하고 올바르게 이해(理解)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이해 한다면, 모(母)에 대한 염은(念恩)도 쉽게 발생(發生)시킬 수 있다.

 

모든 중생들이 어머니였을 때 모든 해로움에서 보호받고, 모든 이로움을 주었으며, 모든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고, 금생(今生)의 몸이 얻어진 것이다. 이렇게 수행하여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로 일어났다면, 다음에는 친족(親族)과 일반인(一般人)과 원수(怨讐)까지도 어머니로 여기는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다음에는 어머니에 대하여 은혜(恩惠)를 생각하는 염은(念恩)을 닦아야 한다. 요컨데 금생(今生)의 어머니가 어떤 나쁜 인연(因緣)으로 눈이 멀어 인도자(引導者)가 없이 무섭고 험한 벼랑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어머니를 누가 험한 위험(危險)과 공포(恐怖)에서 구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이 무시(無時)이래 어머니였던 중생들이 번뇌(煩惱)와 마장(魔障)으로 마음이 혼란(混亂)하고 미혹(迷惑)되어, 지혜(智慧)를 얻지 못하고, 증상생(增上生)과 결정승(決定勝)의 길을 보는 눈이 멀어 윤회(輪廻)와 악취(惡趣)의 무섭고 험한 벼랑으로 걸어 가게 되는 것을 보면, 자식이 금생(今生)의 어머니를 구하려고 노력하듯이, 전생(前生)의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들을 윤회(輪廻)로부터 구제하는 것으로 보은(報恩)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자애(慈愛)와 연민(憐憫)의 대상(對象)이란, 안락(安樂)을 갖추지 못한 중생(衆生)을 말한다. 행상(行相)이란 그들이 안락(安樂)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안락을 얻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중생(衆生)들에 대한 자애(慈愛)와 연민(憐憫)의 공덕(功德)은 정토(淨土)에서 한량(限量)없는 공양물(供養物)로 탁월(卓越)한 승자(勝者)에게 공양(供養)을 올릴지라도 중생(衆生)들에 대한 자애(慈愛)와 연민(憐憫)의 공덕(功德)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극히 광대(廣大)한 재물(財物)로 구경(究竟)의 복전(福田)에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보다 중생(衆生)들을 안락(安樂)하게 하는 공덕(功德)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의미(意味)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깊히 사유하여야 한다.

 

이렇게 자기에게 사유(思惟)한다면, 출리(出離)의 마음을 일깨 우는 인(因)을 이루게 되며, 남에게 사유(思惟)한다면, 자비(慈悲)의 마음을 이끌어 내는 인(因)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먼저 자기(自己)에 대한 사유(思惟)가 먼저 선행(先行)되지 않는 다면, 요점(要點)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대자비(大慈悲)를 익힌 힘으로 남김없이 모든 중생들을 제도(制度)할 것을 발원(發願)하여야,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서원(誓願)하는 자성(自性)의 보리심은 노력(努力)하지 않아도 생겨나게 된다.

 

증상의요(增上意樂)를 수행한다고 함은, 이처럼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수행해서 중생들이 안락(安樂)이 결여(缺如)되어 시달린다면, 내가 어떻게 안락을 주고, 고(苦)에서 벗어나도록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자신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

 

자비(慈悲)는 선정(禪定)이나, 일체 위의(威儀) 중 어느 때나 모든 중생에 대해 수행(修行)해야 한다고 하였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의 수행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순서로 이타(利他)에는 보리심(菩提心)이 필요하다.

 

이것을 얻으려는 바람을 일으켜야 되지만, 이 정도만으로는 충분(充分)하지 않다. 귀의(歸依)에서 밝혔듯이, 신구의(身口意)와 선업(善業)의 공덕(功德)을 사유(思惟)하는 방식(方式)으로 먼저 신심(信心)의 힘을 증장시키고, 믿음으로써 원하는 소의(所依)를 해야 함을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가고자 하는 마음과 가는 마음의 차별(差別)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원심(願心)과 행심(行心)으로 나뉜다.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먼저 성불(成佛)을 추구(推究)하는 것은 원심(願心)이며, 후에 율의(律儀)를 받아 모든 자량(資糧)을 수행(修行)하는 것은 행심(行心)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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