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상사부 도의 단계

5.7 육바라밀(六波羅蜜)

작성자혜천 안종률|작성시간23.06.30|조회수55 목록 댓글 0

5.7 육바라밀(六波羅蜜)

 

발심(發心)한 후 행(行)을 배우고 닦아 익히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발심(發心)한 후에 학처(學處)를 닦고 배워야 하는 이유(理由)와, 지혜(智慧) 방편(方便)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것과, 학처(學處)를 배우는 순서(順序)를 말함이다.

 

서원심(誓願心)을 일으키면, 그 자체(自體)가 큰 공덕(功德)이 있지만, 보살(菩薩)의 학처(學處)를 완성(完成)하지 않는다면, 성불(成佛)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행을 닦고 배워야 한다. 깨달음은 정행(正行)을 큰 가르침으로 하는 제대보살(諸大菩薩)의 것이요, 사행(邪行)을 가르침으로 하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정행(正行)을 가르침으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행(正行)을 가르침으로 삼게 되면 무상(無上) 정등각(正等覺)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행(正行)이란 성불(成佛)의 방편(方便)이며, 보살(菩薩) 학처(學處)를 배우는 것을 말한다.

 

발심(發心)한 보살은 먼저 자신을 조복(調伏)하지 못한다면 남을 조복(調伏)할 수 없고, 정행(正行)이 없이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남을 고(苦)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고상한 마음만으로 족하지 않으므로, 먼저 스스로 자신의 고(苦)를 없애는 방편에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이 성불(成佛)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성불(成佛)에 들어 가는 방편(方便)이 있어야 하고, 이 방편(方便)에 착오(錯誤)가 없어야 한다. 그릇된 방편(方便)으로는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結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원만(圓滿)하고 착오(錯誤) 없는 방편(方便)인가. 모든 것을 통달하는 지혜(智慧)는 자비(慈悲)의 뿌리에서 생기고, 보리심(菩提心)의 인(因)에서 생기고, 방편(方便)으로 구경(究竟)에 이른다고 하였다.

 

보리심(菩提心)이란 세속(世俗)과 승의(勝義, 궁극적인 이치)의 두 가지 보리심(菩提心)을 말하며, 방편(方便)이란 보시(布施) 등의 원만(圓滿)한 구족(具足)이다.

 

도(道)에 대한 분별심에 대하여 말한다. 무릇 분별(分別)이란, 나쁜 분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옳은 분별이라 할지라도 생사(生死)에 계박(繫縛)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릇 분별(分別)하는 과(果)는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별(分別)에 머무르지 않음이 성불(成佛)의 길이다.

 

보시(布施) 계율(戒律)의 지킴은 이러한 요의(要義)를 수행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이런 요의(要義)를 얻지 못하고, 그런 행에 들어감은 국왕(國王)이 자리를 내려앉은 것이고, 코끼리를 얻고자 하면서 발자국만 찾음과 같다고 하였다.

 

모든 대승자(大乘者)가 완성(完成)하여야 할 것은 적정(寂靜)의 열반(涅槃)에 만족(滿足)하여 머물지 않고, 생사윤회(生死輪廻)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다. 적정(寂靜)의 열반에 머물지 않아야 모든 것을 깨닫는 지혜, 세속제(世俗諦)에 의한 도(道)의 단계, 광대한 도(道), 복덕(福德)의 자량(資糧), 방편(方便)의 가지(加持) 등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생사윤회(生死輪廻)에 머물지 않으면, 진실성(眞實性)을 터득한 지혜, 진제(眞諦)에 의한 도(道)의 단계, 심오(深奧)한 도(道), 지혜(智慧)의 자량(資糧), 지혜(智慧)의 가지(加持) 등의 깨달음이 완성(完成)되기 때문이다.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이란, 모든 번뇌(煩惱)를 제거함이요, 복덕(福德)의 자량(資糧)이란, 모든 중생을 부양(扶養)할 수 있음이다. 세존께서 이를 인연(因緣)으로 하셨기 때문에 모든 보살은 복덕(福德)의 자량(資糧)과 지혜(智慧)의 자량(資糧)을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불과(佛果)를 얻고자 하면, 방편(方便)과 지혜(智慧)에 의지하여야 하고, 이 두 가지를 떠나면 성취할 수 없다.

 

모든 보살들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바르게 닦는 것은 원만한 깨달음을 구족하기 위한 것이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보살이란 지혜(智慧) 바라밀(波羅蜜) 하나만을 바르게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바라밀(波羅蜜)이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세존께서는 다만 한 가지 방법으로 깨달음을 증득(證得)하는 것, 즉 공성(空性)의 방법만으로는 모든 행(行)을 청정(淸淨)하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모든 사찰(思察)은 분별(分別)이다. 분별(分別)이 전혀 없는 것을 곧 깨달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 오해(誤解)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집착(執着)한다면, 마업(魔業)이라고 하였다.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집착(執着)하면 마업(魔業)이라고 하는 의미는 나를 둘로 전도(轉倒)하여 집착(執着)에 기인(基因)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청정(淸淨)하지 않다는 뜻에서 마업(魔業)이라고 하는 것이지, 육바라밀(六波羅蜜) 자체가 모두 마업(魔業)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도 마업(魔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저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하면서 공덕(功德)과 과환(過患)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견해(見解)가 확실(確實)해 질수록 법아집(法我執)이 점차(漸次) 증장(增長)해 가지만, 반면(反面) 법무아(法無我)에 대한 견해를 확실히 증장(增長)하게 되면, 법아집(法我執)에 대한 견해는 점차 감소(減少)되어 간다.

 

그러므로 행(行)과 견(見)의 두 견해(見解)가 열(熱)과 냉(冷)처럼 어긋나게 되므로 각각에 대한 견해가 서로 대립(對立)을 일으키지 않게 하여야 한다. 이것은 과위(果位)에서 법신(法身)을 얻으려는 안립(安立)과 색신(色身)을 얻으려는 양자(兩者)가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제(二諦)인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인식(認識)하고, 그것을 따름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교(敎)와 이(理)로 생사열반(生死涅槃)의 모든 법(法)이 결정되며, 자기의 본성(本性)은 조금도 스스로의 선택(選擇)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절대(絶對) 진리(眞理)를 한 축(軸)으로, 다른 한 축(軸)으로는 무엇이든 어김없이 결정(決定)되는 인과법(因果法)에 의거(依據)하여, 이 두 축(軸)이 서로 가감(加減) 없이 정확(正確)하게 적용(作用) 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만일 이렇게 동반(同伴) 되는 이치에 대하여 확실(確實)한 견해(見解)를 얻었다면, 이로부터 이제(二諦)의 뜻을 깨달아 비로소 부처의 사상(思想)을 얻는 대열(隊列)에 들어서게 된다. 이 도리는 다음에 관(觀)에 대하여 말할 때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성불(成佛)할 때까지는, 모든 수행(修行)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육바라밀(六波羅蜜)의 모든 행(行)을 구족하게 닦아야 한다. 이것은 할 수 있는 한 힘써 수행하고, 닦기 어려운 것은 원력처(願力處)로 삼아 수행할 힘의 근본을 쌓고, 업장(業障)을 맑게 하고, 서원(誓願)으로 삼는다면, 오래지 않아 모든 수행을 원만하게 이룰 수 있게 된다.

 

만일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어떤 가르침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멸(衰滅)의 인연(因緣)으로 가는 인(因)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번뇌(煩惱)와 상(相)의 집착(執着)에 얽매이는 것을 풀어야 하고, 학처(學處)의 밧줄로 단단히 죄어, 두 가지의 죄(罪)를 소멸(消滅)하고, 모든 선근(善根) 공덕을 멸(滅)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학처(學處)에 얽매이고, 상(相)에 집착(執着)하는 양자(兩者)가 다른 것이 아니고, 계율(戒律)을 갖추고, 아집(我執)을 여의는 양자(兩者) 또한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큰 가르침은 갖가지의 인(因)으로 이루어지고, 하나의 인(因)으로 구족(具足)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도(道)의 한 부분(部分)만 닦고, 다른 것은 닦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두 자량(資糧)의 문(門)을 모두 막게 되는 좋지 않은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소승(大小乘)의 수행상(修行上)의 차이점(差異點)은 궁극(窮極)의 자량(資糧)을 배우는 것과 배우지 않는 것으로 구분(區分)된다. 부분적(部分的)인 수행(分一乘)과 소승(小乘)은 같은데 이름이 다를 뿐이다. 왜냐하면 분일(分一)은 부분(部分)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혜로운 이들은 견고하고 올바른 견해를 일으켜, 여러 문(門)으로 수승(殊勝)한 대승(大乘)의 종성(種姓)을 얻는데 모든 능력(能力)을 집중(集中)시켜야 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